삼국시대, 삼국 언어는 서로 통했을까?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16
― 삼국시대에 대한 궁금증 2 ―
(삼국시대, 삼국 언어는 서로 통했을까? 자유롭게 왕래했을까?)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까지 우리는 이들을 ‘같은 민족’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왔다. 그래서 서로 언어가 통했을 것이라 믿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앞편에서 살펴본 것처럼, 당시 삼국의 사람들은 서로를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 대한 궁금증을 좀 더 깊이 들여다 보겠다.
첫째, 삼국 언어는 통했을까? 통역 없이 대화가 가능했을까?
앞서 설명했듯, 한민족은 ‘우랄-알타이’ 계통 북방계 민족과 한반도 토착 남방계 민족이 혼합되면서 ‘단일민족화' 되었다 한다.
과거에는 한국어를 ‘우랄- 알타이' 족에 속한다고 배웠지만, 최근에 는 이러한 분류가 교과서에서도 사라졌고 다양한 언어 기원설이 제기되고 있다.
어쨌든 공통된 뿌리를 지닌 삼국 언어 형태는 기본적으로 유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수백 년간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하다 보니, 언어적으로 방언 수준 이상의 차이가 생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영화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나온다.
백제 병사가 '거시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를 들은 신라 첩자가 그것을 암호로 오해하고 상부에 보고하는 장면이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거시기'를 제외하고는 서로 말이 통하는 것으로 그려지며, 특히 욕설 장면에서는 완벽히 소통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당시의 실제상황을 기록한 음성자료나 문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자유로운 언어소통은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예를 들어, 지금도 제주도 방언을 서울 사람이 알아듣기 어려운 것처럼, 삼국 간 언어는 어느 정도 유사성은 있었을지언정 원활한 대화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신 간 대화에는 통역이 필요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물론, 같은 뿌리를 공유한 언어 였기에 기본적인 의사소통 몸짓, 손짓을 동반한 일상 수준 대화는 가능했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삼국 언어는 점차 독자적인 방향으로 분화되었고, 고구려어와 신라어는 지리적 거리만큼 언어적 차이도 컸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이들 사이에 위치해 중간적 언어 특성 을 지녔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삼국 백성들 사이에서는 제한된 수준의 소통이 가능했겠지만, 공식외교나 군사적 교류에는 통역이 필수였을 것이다 오랜 교류 속에서 상인, 외교관 등 은 서로 언어에 익숙해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신라어 기반으로 한 '통일신라어' 가 형성되고, 이것이 후에 중세 한국어로 발전하게 된다. 실제로 신라어는 향가와 같은 문학작품을 통해 삼국 언어 중 가장 많이 연구된 언어이다.
그렇다면, 삼국시대 사람들과 지금 우리가 만나면 소통이 될까?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고대 향가 하나를 해석하기 위해서도 양주동 같은 언어학계의 천재가 필요했던 것을 떠올리면, 당시 사람들과의 직접 소통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지금 우리가 고대 라틴어나 고대 그리스어 사용자와 대화하려는 것과 비슷하다.
혹은 외국인과 처음 만났을 때 언어 장벽을 느끼는 상황과도 같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삼국 언어는 공통 조상을 지닌 ‘고대 한국어 계통’ 으로 기본적인 유사성은 있지만, 자유로운 소통은 어려웠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둘째, 삼국 간에 자유롭게 왕래했을까?
삼국 간 왕래는 정치적, 군사적 상황에 따라 크게 달라졌으며, 전반적으로는 자유롭지 않았다. 삼국은 대부분 전쟁 또는 경쟁 관계였기 때문에, 일반 백성 간의 왕래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류가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삼국은 때로는 동맹을 맺고 외교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으며, 특정 시기에는 상업적 교류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맺은 ‘나제동맹’이 있다.
이러한 외교적 연합 덕분에 제한적인 왕래와 문화 교류가 가능했으며, 그 영향으로 불교와 같은 종교, 그리고 예술, 기술 등도 삼국 간에 전파되었다. 다만, 이것은 철저히 공식적이고 제한적인 형태였고, 일반 백성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던 상황은 아니였다.
이러한 교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설화가 바로 '서동설화' 이다.
'서동설화'는 백제 '무왕'(서동)과 신라 진평왕 셋째 딸 '선화공주' 사이의 로맨스를 담고 있다. 서동은 신라 경주로 가서 아이들 에게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게 한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 노래는 신라 도성 전체에 퍼졌고, 대궐 안까지 들리게 되어 결국 선화공주는 귀양을 가게 된다. 이로 인해 서동과 선화공주 는 결혼하게 되고, 훗날 서동은 백제 무왕이 되어 금을 얻어 사찰 을 세웠다는 설화이다.
이야기에 나오는 동요는 실제로 신라 향가 ‘서동요’로 전해지며, 이는 민간 설화가 향가로 승격된 희귀한 사례이다.
만약 이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 이라면, 백제와 신라가 어느 정도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했으며, 언어 소통도 어느 정도 이루어 졌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다만, 서동설화의 진위에 대해서 다양한 학설과 논쟁이 존재한다.
실제로는 왕족 간 결혼이 정치적 연합의 수단이었을 수 있으며, 일반인의 왕래와는 거리가 멀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언어 소통 역시 완전히 자유로웠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늘 이야기한 삼국 언어 소통과 왕래 문제는 대부분 추정에 기반 하고 있다. 관련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확정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삼국이 서로 접촉하고 교류한 흔적은 분명 존재한다.
그렇기에 고대사를 바라볼 때는 "그랬을 것이다"라는 전제 하에, 다양한 해석과 상상력이 필요한 분야임을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혹이나 이 글을 읽으신 분들께서 다른 의견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 주어 함께 고대사의 퍼즐을 맞춰 가면 좋겠다.
― 초롱박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