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왕국 '부여'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21
ㅡ 잊혀진 왕국 '부여' ㅡ
우리 고대사를 정리하는 일은 쉽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정설’로 인정되는 역사적 자료 자체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사를 광범위하게 서술한 '환단고기'가 있으나, 오랜 시간 '위서'(僞書) 논란에 휩싸여 왔다. 나 역시 '환단고기' 진위를 단정할 수 없으며, 비전문 역사저술자로서 지금까지는 정설 위주로 역사를 다루고, 그 위에 내 개인적 역사관 과 일부 야사를 덧붙여 왔다.
하지만 상고사는 이마저도 어렵다. 남아 있는 기록조차 중국 사서에 단편적으로 언급된 몇 줄 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위서 논란이 있는 자료에 기반할 수는 없기에, 이러한 한계를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바란다.
우리는 흔히 우리민족 역사를 '5천 년'이라고 말하지만, 기원전 3천 년 무렵부터 기록은 거의 없다. 그래서 내가 이 상고사 시리즈를 써 내려가면서도, 애써 내용을 구성해도 10편 정도에 불과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잊혀진 왕국 ― 부여
한국사 교육은 대체로 단군과 고조선에서 삼국시대로 곧장 넘어가는 구조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고대 국가들이 소홀히 다뤄졌고, 부여 역시 ‘부족국가’ 정도로만 언급될 뿐이다.
대표적으로 자주 시험에 나왔던 ‘영고(迎鼓)’라는 제천행사 외는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부여는 고조선과 동시에 존재했던 독립된 고대국가로, 오늘날 중국 만주 북부 송화강 유역에서 성립한 국가였다. 고조선과는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었고,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 했다.
특히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시조가 부여 왕족 출신임을 내세운 점 에서 중요한 국가이다. 당시 고조선이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부여'에 두었다. 이는 부여가 고조선 못지않게 강력하고 문화적 으로 영향력 있는 나라였음을 말해준다.
2. 단재 신채호와 ‘부여주족론’
'신채호' 선생은 이미 1908년 '독사신론'에서 부여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기자조선-마한-신라>로 이어진 기존 정통사관을 부정하고 <단군조선-부여-고구려·백제>로 이어지는 ‘부여주족론’을 제시 했다.
그에 따르면, 부여족이 민족사 중심동력(주족)이었고, 중국계 (지나족)·흉노·오환·말갈·일본족 등은 ‘객족’으로 보았다.
신채호는 “우리 민족 4천년 역사 는 곧 부여족 성쇠소장의 역사”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고구려·백제·발해 모두 부여의 후예임을 내세웠고, 고고학적 유물과 중국사서 기록 등 여러 정황이 이를 뒷받침한다.
3. 부여 기원과 계통
‘부여’라는 이름은 중국 사서 곳곳에 등장하며,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 남부여>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 중 오늘 다루는 부여는 '북부여
(北扶餘)로, 기원전 2~3세기 무렵 송화강과 눈강이 만나는 평야 지대에 성립된 국가이다.
이 부여에서 ‘동부여’가 분리되고, 그곳에서 '주몽'집단이 나와 고구려를 세웠다. 고구려에서 다시 일부가 내려와 백제 세웠고, 발해 역시 스스로를 부여 후예로 자처했다.
4. '예맥족'과 민족 형성
부여는 '예맥족' 계승국가로 평가 받는다. ‘예맥’은 고조선 말기부터 고대 한반도북부와 만주일대에 존재했던 종족으로, 오늘날 한민족 형성 주축으로 여겨지고 있다.
‘예’와 ‘맥’은 본래 같은 계통에서 갈라진 것으로 보이며, 이후 고조선과 부여를 거쳐 한민족 형성 뿌리가 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단군신화 속 곰(맥족)과 호랑이 (예족) 이야기는, 이 예맥족 간의 통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5. 부여 멸망과 잔존
부여는 전성기에는 8만 호를 지닌 강대국이었으며, 당시 고구려보다 국력과 인구에서 우세했다고 한다. 그러나 285년 '선비족 모용부' 침공을 시작으로 쇠락 했고, 346년 '전연 모용황'에게 국왕과 5만 명이 포로로 끌려가며 사실상 멸망한다.
이후 410년 광개토대왕의 동부여 원정, 그리고 494년 '물길'침공 까지 잔존세력은 끝내 고구려에 투항하게 된다. 일부 세력은 북방으로 이동해 ‘두막루’를 형성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두막루'는 부여유민들이 세운 국가로 추정되며, 5세기부터 8세기까지 약 300년가량 존속한 것으로 여겨진다.
6. 건국신화와 ‘난생설화’
부여 시조 ‘동명왕’ 설화는 고구려 시조 ‘주몽’ 이야기와 너무나도 유사하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신화’, 활 솜씨, 강을 건너 도망치는 이야기까지 거의 동일 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고구려가 부여에서 갈라졌다는 점을 보여 주는 대표적 증거이다.
반면, 고조선과 백제건국 설화는 더 현실적이다.
고조선은 천신족의 하강(환웅) 이야기이며, 백제는 주몽의 아들 비류·온조가 권력다툼 끝에 남하 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전승' 이야기이다.
7. 부여 사회와 제도
부여는 농경을 중심으로 하는 정착국가였으며, 특산물로는 말, 모피, 주옥 등이 있었다.
- 영고(迎鼓):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형벌을 결정하고 죄인을 사면하던 제천 행사
- 형사취수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제도로, 과부를 보호하는 복지 개념
- 사출도(四出道): 왕도를 중심으로 마가·우가·저가·구가 등 4개 부족장이 주변 지역을 통치 하는 지방 행정구조
- 1책 12법: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 도둑질은 12배 배상, 가족은 노비로 삼는 엄격한 법률 체계
- 순장과 옥갑: 왕과 귀족의 장례 시 함께 묻는 순장 문화와 장례용 수의 사용
8. 마무리
500년 이상 이어진 고대국가 부여는 고조선과 함께 우리 민족 핵심 뿌리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발해까지 부여 계통임을 자처했고, 역사적·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부여’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거의 동시대인 중국 '삼국지' 속 조조, 유비, 관우, 장비, 제갈공명 등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익숙 하면서도, 정작 우리 직접 조상 뿌리인 부여 왕들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부여'를 중국사 한 축으로 편입해 버렸다. 우리가 아는 부여는 중국 사서에 단편적으로 기록된 내용과 '삼국사기', '삼국유사' 몇 줄이 전부이다.
이런 상태라면 중국 '동북공정'을 우리가 이겨내기 쉽지 않다.
역사는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지고 제대로 기억되지 않으면 왜곡 된다.
부여를 단지 시험에 나오는 ‘영고' 나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통성과 뿌리를 함께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의 뿌리와도 같은 부여라는 나라가 단 한 편으로 정리된다는 사실에 처참함과 안타까움이 교차한 마음으로 오늘 글은 끝낸다.
다음 편에서는 <고구려 초기 왕들 업적>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 초롱박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