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76

고려말 개혁과 좌절시대 1 ㅡ 공민왕 1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76

ㅡ고려말 개혁과 좌절시대 1ㅡ


(공민왕 1)

(10년 넘게 써온 한국사 이야기)


**********************


ㅡ10년 넘게 써온 나의 한국사 이야기 ㅡ


단군으로 시작해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저는 한국사 전체 흐름을 제 나름 시각으로 정리해 왔습니다. 아직 다듬고 보완할 부분이 많지만, 10년 넘게 이 작업을 이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벅찬 뿌듯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됩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쏟아 정리한 글들이 사람들의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그저 묻혀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가끔은 문득,


“내가 하루씩 쌓아올린 이 시간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허망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금 까지 살아오면서 끈기없는 저 자신이 해낸 일 중에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작업이 바로 역사글을 쓰고 정리한 일 입니다.


60평생을 훌쩍 넘어 살아온 지금, 이 작업은 제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 믿습니다.


저는 ‘역사공부’는 단순한 연도나 사건 암기보다, 역사의 큰 흐름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 는 많겠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역사를 단순한 암기과목이 아니라, <오류를 발견하고 수정해 나가는 과학>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제임스 볼드윈의 말과도 닿아 있습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니, 과거와는 거의 상관 없다. 사실 역사가 강력한 힘을 갖는 까닭은 우리 안에 ‘역사’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말 그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 제임스 볼드윈 ㅡ


저는 역사를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히려 일반상식 수준에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글을 썼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글이 어렵지 않고, 흥미롭고, 소설처럼 재미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가능하면 독자들이 익숙한 시대극 드라마, 역사소설, 영화 속 장면들 인용하고, 다른 시대 사건과 비교 하면서 자연스럽게 흐름을 연결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이 글이 나만을 위한 ‘일기’가 아니라, 누구라도 읽고 우리 역사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안내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SNS라는 공간을 통해 글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누군가 읽고 공감해 주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진심으로 고맙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부족한 글이지만, 많은 분들과 함께 더 나누고 싶습니다.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역사에 대한 작은 울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입니다.^^


초롱박철홍 드림


***********************


공민왕 1


고려사에서 일반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왕이라 하면 단연 태조 '왕건'과 '공민왕'일 것이다.

특히 공민왕은 드라마, 영화, 소설 다양한 콘텐츠에서 자주 다루어 지며, 극적인 삶을 살다 간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 기억 속 공민왕 이미지는 아주 퇴폐적 이다.


공민왕은 원나라 공주였던 부인 ‘노국공주’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큰 상심에 빠졌고, 이후 방황과 방탕으로 치닫는다. 그 방탕함 끝은 비극적 이었다. 공민왕은 자신이 총애 하던 근위병 집단인 '자제위'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만다.


실제로 고려사에 기록된 공민왕 말년은 왕으로서 뿐만 아니라 일반인으로서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 퇴폐적이고 기이한 행태로 묘사되어 있다.


얼마 전 상영된 영화 <쌍화점>도 공민왕 변태적 사생활을 이러한 시각에서 부각시켰다.


물론 영화에 묘사된 일부 내용은 고려사 기록에 나오는 사실에 기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용 대부분은 고려 말 혼란상을 강조하고, 조선건국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담긴 기록일 가능성이 더 크다.


실제로 고려사는 조선건국 이후 '정도전', '조준'등 주도로 다시 편찬되기 시작했고, 세종 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세종은 고려사가 지나치게 왜곡 되어 있다며 여러 차례 그 내용을 다시 살펴보라고 명했다는 기록도 있다.


즉, 고려사에 묘사된 공민왕 말년 은 사실과 허구, 정치적 의도가 뒤섞인 복합적인 서술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서술만으로 공민왕 전부를 평가하는 것은 매우 단편적이고 편협된 시각이다.


실제로 공민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군주 중 한 명 이다.


특히 ‘신돈’을 등용하여 추진한 개혁은 한국사 통털어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급진적이고 혁신적 이었다.


만약 신돈개혁이 제대로 자리잡고 성공을 거두었다면, 조선건국은 없었을 것이고 우리 역사 흐름 역시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신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앞으로 공민왕 퇴폐적인 말년만이 아니라, 재위 초기에 단행한 개혁 정책과 그 의미를 함께 살펴보며, 고려말 복잡한 역사적 흐름을 보다 입체적으로 정리해 나가고자 한다.


'공민왕'은 1330년에 태어나, 1341년 원나라 황제 ‘순제’의 입조 요구에 따라 12세 때부터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는 고려 제27대 왕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형은 ‘희대의 강간왕’으로 악명 높은 '충혜왕'이다.


원 간섭기 시기 고려에는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등 무려 7명의 국왕이 교체되었다.


이 가운데 공민왕의 직전 국왕인 '충목왕'과 '충정왕'은 모두 충혜왕 아들들이다.


하지만 이 두 왕은 어린나이에 즉위해 어린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에, 국왕으로서 정치적 존재감이나 업적은 거의 없다.


그렇기에 내 역사 글에서는 충혜왕을 다룬 뒤, 충목왕과 충정왕을 생략하고 곧바로 공민왕 시대로 넘어가려 한다.


다만 이 두 왕 시대를 완전히 무시 할 수는 없으니, 간략하게라도 그 시대 상황을 짚고 넘어 간다.


앞서 정리했듯이, 충혜왕은 한 나라 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부끄럽고 치욕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현직 고려국왕 신분으로 원나라 사신들에게 직접 구타를 당한 뒤 납치되어 귀양 가는 도중, 끝내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 충혜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으니, 바로 '충목왕'과 '충정왕'이다.


'충목왕'은 겨우 여덟 살 나이로 즉위해 열두 살에 병사했다. 매우 짧은 재위기간이었지만 충목왕 치세는 의외로 평가받을 만한 치적들을 남겼다.


충목왕 시기에는 충혜왕 시대 폐단을 바로잡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권문세족들이 장악한 토지 제도를 개혁하려는 노력이 두드러 졌다. 그중에서도 권문세족이 독점하던 ‘녹과전(祿科田)’ 폐단 바로잡고,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 주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양전사업(토지 대장 정비)을 실시했고, 나라에 기근이 들자 백성구제에도 힘썼다.


충렬왕·충선왕·충숙왕 삼대 실록 편찬을 시작하였으며, 서연(書筵, 왕이 학자들과 학문을 강론하는 자리)을 열어 학문 진흥에도 관심 보였다.


이처럼 충목왕 치적이 비록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 시기의 정책들은 당시로서는 의미 있는 개혁시도들이었다.


물론 충목왕이 여덟 살 어린나이 였던 점을 고려하면, 그 스스로 선정(善政)을 펼칠 여지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치적들은 실질적으로는 충목왕 어머니이자 섭정을 맡은 ‘덕녕공주’의 주도로 이루어 졌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덕녕공주는 쿠빌라이 칸 손녀이자 원나라 황족출신으로, 당시 고려 조정을 사실상 주도하였다.


충목왕이 후사 없이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자, 충혜왕의 서자였던 '충정왕'이 또 다시

열두 살 나이로 즉위하게 된다.


'충정왕' 생모는 원나라공주가 아닌 고려인 '희비윤씨'였다.

이 점은 훗날 충정왕에게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만다.


섭정자리를 둘러싸고 충혜왕 정비 '덕녕공주'와 '희비윤씨' 사이에서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덕녕공주는 충혜왕 첫 번째 부인 이라는 명분으로 섭정지위를 이어 갔지만, 실질적인 정국운영의 주도권은 생모 윤씨가 차지했다.


전왕 충목왕에 이어 어린 충정왕 즉위하면서 조정은 더욱 더 혼란 스러워졌다.


충목왕 말기부터 본격화된 희비 윤씨세력과 환관들 전횡은 날로 심해졌고, 부원세력 기황후 오빠 '기철일파' 전횡 또한 극에 달했다.


문제는 고려내부만 혼란스러웠던 것이 아니다.


당시 원의 내부사정, 대외정세도 극히 어지러 웠다.


원 제국은 '주원장'을 필두로 한족 반란이 본격화되며 내부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동아시아 전역이 격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특히 일본은 남북조 시대 혼란 으로 중앙정부 통제력이 거의 사라졌고, 이 틈을 타 왜구침입이 극심해졌다.


1350년경에는 100여 척이 넘는 왜구함대가 고려 동해안을 약탈 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당시 사람 들은 이 침입을 그 해 간지를 따 '경인왜구'라 불렀다.


내우외환이 겹치고 국정을 생모 윤씨가 농단하자, 백성은 충정왕 숙부이자 충혜왕 동생인 '강릉대군 왕기'(훗날 공민왕)에게 기대를 걸기 시작했다.


심지어 고려중신들까지도 “이대로는 안 된다”며 원나라에 강릉대군을 새 국왕으로 책봉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른다.


만약 충정왕 어머니가 원나라 황족출신이었다면, 감히 이런 요청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원나라는 고려조정 간절한 요구를 받아들여 충정왕을 폐위 시키고 강릉대군을 공민왕으로 즉위시킨다.


폐위된 충정왕은 강화도로 유배 되었고, 이듬해 향년 16세 나이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다. 독살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사실만 봐도, 원 간섭기 고려국왕 위상이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알 수 있다.


고려국왕은 원 황제 임명직으로 변화된 것이었다. 무신정권기 보다도 더 비참한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어쨌든 공민왕 즉위는 여러모로 이례적 이었다.


당시 공민왕 나이는 22세.

만약 원 간섭기가 아니었다면, 왕위는 결코 그에게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친형(충혜왕) 아들 둘이 연이어 왕위를 잇고 난 후, 다시 왕위를 되찾은 사례는 우리 역사에서 공민왕이 유일하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고려에는 서서히 반원(反元) 기류가 일기 시작했다.


공민왕은 아버지(충숙왕), 형(충혜왕)이 원나라에 당한 수모를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연경에서 10년 동안 공민왕은 원나라가 내외로 끊임없는 반란에 시달리며 국력을 소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몸소 느꼈다. 그리고 홍건적 반란 이후, 원은 더 이상 이전 제국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즉위 직후 공민왕은 원이 강요한 변발(변발풍)을 풀어헤치고, 반원 자주정책을 공식 선언했다.


놀랍게도 그의 부인, 원 황족 출신 '노국대장공주'는 이 같은 공민왕 결단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공민왕에게 힘을 실어준다.


이는 어머니가 원나라 공주가 아니었던 충정왕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었다.


이어서 공민왕 본격적인 개혁정치 가 시작된다.


이어서 <공민왕 2 – 개혁의 서막>이 계속됩니다.


초롱박철홍


사진순서


ㅡ 공민왕 어진으로 추정

ㅡ 조선 종묘에 있었던 공민왕과 노국공주

ㅡ고려말 개혁과 좌절시대 1ㅡ


(공민왕 1)

(10년 넘게 써온 한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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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10년 넘게 써온 나의 한국사 이야기 ㅡ


단군으로 시작해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저는 한국사 전체 흐름을 제 나름 시각으로 정리해 왔습니다. 아직 다듬고 보완할 부분이 많지만, 10년 넘게 이 작업을 이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벅찬 뿌듯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됩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쏟아 정리한 글들이 사람들의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그저 묻혀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가끔은 문득,


“내가 하루씩 쌓아올린 이 시간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허망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금 까지 살아오면서 끈기없는 저 자신이 해낸 일 중에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작업이 바로 역사글을 쓰고 정리한 일 입니다.


60평생을 훌쩍 넘어 살아온 지금, 이 작업은 제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 믿습니다.


저는 ‘역사공부’는 단순한 연도나 사건 암기보다, 역사의 큰 흐름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 는 많겠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역사를 단순한 암기과목이 아니라, <오류를 발견하고 수정해 나가는 과학>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제임스 볼드윈의 말과도 닿아 있습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니, 과거와는 거의 상관 없다. 사실 역사가 강력한 힘을 갖는 까닭은 우리 안에 ‘역사’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말 그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 제임스 볼드윈 ㅡ


저는 역사를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히려 일반상식 수준에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글을 썼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글이 어렵지 않고, 흥미롭고, 소설처럼 재미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가능하면 독자들이 익숙한 시대극 드라마, 역사소설, 영화 속 장면들 인용하고, 다른 시대 사건과 비교 하면서 자연스럽게 흐름을 연결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이 글이 나만을 위한 ‘일기’가 아니라, 누구라도 읽고 우리 역사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안내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SNS라는 공간을 통해 글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누군가 읽고 공감해 주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진심으로 고맙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부족한 글이지만, 많은 분들과 함께 더 나누고 싶습니다.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역사에 대한 작은 울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입니다.^^


초롱박철홍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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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1


고려사에서 일반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왕이라 하면 단연 태조 '왕건'과 '공민왕'일 것이다.

특히 공민왕은 드라마, 영화, 소설 다양한 콘텐츠에서 자주 다루어 지며, 극적인 삶을 살다 간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 기억 속 공민왕 이미지는 아주 퇴폐적 이다.


공민왕은 원나라 공주였던 부인 ‘노국공주’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큰 상심에 빠졌고, 이후 방황과 방탕으로 치닫는다. 그 방탕함 끝은 비극적 이었다. 공민왕은 자신이 총애 하던 근위병 집단인 '자제위'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만다.


실제로 고려사에 기록된 공민왕 말년은 왕으로서 뿐만 아니라 일반인으로서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 퇴폐적이고 기이한 행태로 묘사되어 있다.


얼마 전 상영된 영화 <쌍화점>도 공민왕 변태적 사생활을 이러한 시각에서 부각시켰다.


물론 영화에 묘사된 일부 내용은 고려사 기록에 나오는 사실에 기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용 대부분은 고려 말 혼란상을 강조하고, 조선건국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담긴 기록일 가능성이 더 크다.


실제로 고려사는 조선건국 이후 '정도전', '조준'등 주도로 다시 편찬되기 시작했고, 세종 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세종은 고려사가 지나치게 왜곡 되어 있다며 여러 차례 그 내용을 다시 살펴보라고 명했다는 기록도 있다.


즉, 고려사에 묘사된 공민왕 말년 은 사실과 허구, 정치적 의도가 뒤섞인 복합적인 서술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서술만으로 공민왕 전부를 평가하는 것은 매우 단편적이고 편협된 시각이다.


실제로 공민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군주 중 한 명 이다.


특히 ‘신돈’을 등용하여 추진한 개혁은 한국사 통털어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급진적이고 혁신적 이었다.


만약 신돈개혁이 제대로 자리잡고 성공을 거두었다면, 조선건국은 없었을 것이고 우리 역사 흐름 역시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신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앞으로 공민왕 퇴폐적인 말년만이 아니라, 재위 초기에 단행한 개혁 정책과 그 의미를 함께 살펴보며, 고려말 복잡한 역사적 흐름을 보다 입체적으로 정리해 나가고자 한다.


'공민왕'은 1330년에 태어나, 1341년 원나라 황제 ‘순제’의 입조 요구에 따라 12세 때부터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는 고려 제27대 왕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형은 ‘희대의 강간왕’으로 악명 높은 '충혜왕'이다.


원 간섭기 시기 고려에는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등 무려 7명의 국왕이 교체되었다.


이 가운데 공민왕의 직전 국왕인 '충목왕'과 '충정왕'은 모두 충혜왕 아들들이다.


하지만 이 두 왕은 어린나이에 즉위해 어린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에, 국왕으로서 정치적 존재감이나 업적은 거의 없다.


그렇기에 내 역사 글에서는 충혜왕을 다룬 뒤, 충목왕과 충정왕을 생략하고 곧바로 공민왕 시대로 넘어가려 한다.


다만 이 두 왕 시대를 완전히 무시 할 수는 없으니, 간략하게라도 그 시대 상황을 짚고 넘어 간다.


앞서 정리했듯이, 충혜왕은 한 나라 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부끄럽고 치욕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현직 고려국왕 신분으로 원나라 사신들에게 직접 구타를 당한 뒤 납치되어 귀양 가는 도중, 끝내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 충혜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으니, 바로 '충목왕'과 '충정왕'이다.


'충목왕'은 겨우 여덟 살 나이로 즉위해 열두 살에 병사했다. 매우 짧은 재위기간이었지만 충목왕 치세는 의외로 평가받을 만한 치적들을 남겼다.


충목왕 시기에는 충혜왕 시대 폐단을 바로잡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권문세족들이 장악한 토지 제도를 개혁하려는 노력이 두드러 졌다. 그중에서도 권문세족이 독점하던 ‘녹과전(祿科田)’ 폐단 바로잡고,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 주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양전사업(토지 대장 정비)을 실시했고, 나라에 기근이 들자 백성구제에도 힘썼다.


충렬왕·충선왕·충숙왕 삼대 실록 편찬을 시작하였으며, 서연(書筵, 왕이 학자들과 학문을 강론하는 자리)을 열어 학문 진흥에도 관심 보였다.


이처럼 충목왕 치적이 비록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 시기의 정책들은 당시로서는 의미 있는 개혁시도들이었다.


물론 충목왕이 여덟 살 어린나이 였던 점을 고려하면, 그 스스로 선정(善政)을 펼칠 여지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치적들은 실질적으로는 충목왕 어머니이자 섭정을 맡은 ‘덕녕공주’의 주도로 이루어 졌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덕녕공주는 쿠빌라이 칸 손녀이자 원나라 황족출신으로, 당시 고려 조정을 사실상 주도하였다.


충목왕이 후사 없이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자, 충혜왕의 서자였던 '충정왕'이 또 다시

열두 살 나이로 즉위하게 된다.


'충정왕' 생모는 원나라공주가 아닌 고려인 '희비윤씨'였다.

이 점은 훗날 충정왕에게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만다.


섭정자리를 둘러싸고 충혜왕 정비 '덕녕공주'와 '희비윤씨' 사이에서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덕녕공주는 충혜왕 첫 번째 부인 이라는 명분으로 섭정지위를 이어 갔지만, 실질적인 정국운영의 주도권은 생모 윤씨가 차지했다.


전왕 충목왕에 이어 어린 충정왕 즉위하면서 조정은 더욱 더 혼란 스러워졌다.


충목왕 말기부터 본격화된 희비 윤씨세력과 환관들 전횡은 날로 심해졌고, 부원세력 기황후 오빠 '기철일파' 전횡 또한 극에 달했다.


문제는 고려내부만 혼란스러웠던 것이 아니다.


당시 원의 내부사정, 대외정세도 극히 어지러 웠다.


원 제국은 '주원장'을 필두로 한족 반란이 본격화되며 내부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동아시아 전역이 격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특히 일본은 남북조 시대 혼란 으로 중앙정부 통제력이 거의 사라졌고, 이 틈을 타 왜구침입이 극심해졌다.


1350년경에는 100여 척이 넘는 왜구함대가 고려 동해안을 약탈 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당시 사람 들은 이 침입을 그 해 간지를 따 '경인왜구'라 불렀다.


내우외환이 겹치고 국정을 생모 윤씨가 농단하자, 백성은 충정왕 숙부이자 충혜왕 동생인 '강릉대군 왕기'(훗날 공민왕)에게 기대를 걸기 시작했다.


심지어 고려중신들까지도 “이대로는 안 된다”며 원나라에 강릉대군을 새 국왕으로 책봉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른다.


만약 충정왕 어머니가 원나라 황족출신이었다면, 감히 이런 요청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원나라는 고려조정 간절한 요구를 받아들여 충정왕을 폐위 시키고 강릉대군을 공민왕으로 즉위시킨다.


폐위된 충정왕은 강화도로 유배 되었고, 이듬해 향년 16세 나이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다. 독살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사실만 봐도, 원 간섭기 고려국왕 위상이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알 수 있다.


고려국왕은 원 황제 임명직으로 변화된 것이었다. 무신정권기 보다도 더 비참한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어쨌든 공민왕 즉위는 여러모로 이례적 이었다.


당시 공민왕 나이는 22세.

만약 원 간섭기가 아니었다면, 왕위는 결코 그에게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친형(충혜왕) 아들 둘이 연이어 왕위를 잇고 난 후, 다시 왕위를 되찾은 사례는 우리 역사에서 공민왕이 유일하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고려에는 서서히 반원(反元) 기류가 일기 시작했다.


공민왕은 아버지(충숙왕), 형(충혜왕)이 원나라에 당한 수모를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연경에서 10년 동안 공민왕은 원나라가 내외로 끊임없는 반란에 시달리며 국력을 소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몸소 느꼈다. 그리고 홍건적 반란 이후, 원은 더 이상 이전 제국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즉위 직후 공민왕은 원이 강요한 변발(변발풍)을 풀어헤치고, 반원 자주정책을 공식 선언했다.


놀랍게도 그의 부인, 원 황족 출신 '노국대장공주'는 이 같은 공민왕 결단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공민왕에게 힘을 실어준다.


이는 어머니가 원나라 공주가 아니었던 충정왕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었다.


이어서 공민왕 본격적인 개혁정치 가 시작된다.


이어서 <공민왕 2 – 개혁의 서막>이 계속됩니다.


초롱박철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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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공민왕 어진으로 추정

ㅡ 조선 종묘에 있었던 공민왕과 노국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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