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77

고려말 개혁과 좌절시대 2 ㅡ 공민왕 2(개혁의 시작)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77

ㅡ고려말 개혁과 좌절시대 2 ㅡ

(공민왕 2-개혁의 시작)

일부 역사학자들은 120여 년 전 구한말 국제정세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외교환경 사이에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한반도가 격동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방향을 모색해야 했던 시기는 비단 구한말에 국한되지 않는다. 시계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약 650여 년 전 고려 말에도 이와 유사한 대외 환경이 전개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하던 시기, 고려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극도의 혼란 속에 있었다.

당시 고려 외교상대는 주로 '중국' 과 '일본'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두 나라 모두 내부적으로 심각한 권력 교체기 또는 분열 국면에 접어 들어 있었다.

중국은 원나라의 쇠퇴와 명나라의 부상이라는 ‘원·명 교체기’에 놓여 있었고, 일본은 황실이 남조와 북조로 나뉘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대립하던 ‘남북조 시대’ 를 겪고 있었다.

이처럼 동아시아 전체가 정치적 혼돈에 빠져 있던 국면에서, 고려 젋고 새로운 군주 공민왕은 단지 정세를 관망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주변 불안을 고려 자주성과 주권 회복을 위한 기회로 인식하고, 능동적인 외교전략과 내정개혁을 동시에 추진하였다.

공민왕은 이러한 국제적 격변기를 역으로 활용하여, 고려의 위축된 자주권을 회복하고 내부개혁 단초 를 마련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당시 원나라는 피지배 민족인 한족의 대규모 반란, 즉 '홍건적의 난'으로 심각한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1354년, 원나라는 고려에 군사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에 고려는 <최영, 이방실, 안우, 김용, 정세운, 유탁>등을 지휘부 로 하여 병력 2천 명을 파병 하였다.

이들은 ‘고려종정군(高麗從征軍)’이라 불리며 원나라 원정에 참여하였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이들은 귀국 후 원나라의 피폐한 상황과 몰락 징후를 공민왕에게 상세히 보고한다. 보고를 들은 공민왕은 반원정책에 대한 확신을 더욱 굳히게 된다.

1356년(공민왕 5년), 공민왕은 원나라 '기황후'를 등에 업고 고려에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던 기황후 친오빠 '기철'과 '권겸'등 부원세력 핵심 인물들을 역모혐의 로 숙청한다.

역사에서는 이를 '병신정변'이라 부른다.

원나라의 권세가 절정일 때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같은 해 공민왕은 원나라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고, 고려문종 대, 독자적 연호와 제도로 환원한다.

또한 원이 고려 내에 설치해 놓은 지배기구인 '정동행성'도 철폐 하였다.

그리고 한 달 뒤, 공민왕은 몽골이 침탈해 백여 년간 장악해 온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것을 명하고, 이를 '유인우'에게 맡긴다.

'쌍성총관부' 공격은 공민왕 '반원개혁'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당시 쌍성총관부에는 고려계 귀족 들이 원 신하로서 작위를 세습 하던 지역이었다.

이곳 출신인 '이성계' 부친 '이자춘'은 원 신하로 있다가 고려가 공격하자 원 나라를 배신하고, 유인우 고려군에게 성문을 열어 쌍성총관부를 내준다.

이때 이성계는 갓 스무 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는 고려 정치무대에 처음 등장하게 된다.

드디어 조선개국 태조 이성계가 역사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1356년, 공민왕은 '최영'장군에게 군대를 맡겨 압록강 넘어 원나라 요동지역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최영은 약 2천여 명 병력 이끌고 요동 8참(지방 행정구역 중 하나) 집중 공격하여 격파하였으며, 이어서 '파사부' 등 3참을 점령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작전은 철저한 기습과 신속한 진격을 바탕으로 하여, 당시 원나라 요동 방어군을 크게 혼란에 빠뜨렸다.

'요동정벌'은 단순한 국경 방어 차원을 넘어 고려가 원나라에 대한 독립적 군사행동을 감행한 최초 사례로 평가된다.

이로써 공민왕은 원나라에 대한 종속적 관계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국방의지를 표명하였고, 고려 군사력 향상과 국토방위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또한 이 승리는 고려 내부 결속을 강화하고, 공민왕 개혁정책 추진 에 힘을 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1358년(공민왕 7) 최영이 이끈 고려군은 4백 척 규모 함대를 동원해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다.

1359년(공민왕 8) 홍건적 장수 '모거경'이 4만 명을 이끌고 고려 침공하여 서경까지 함락시켰으나, <안우·이방실·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패해 퇴각하였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 20만 명이 다시 고려를 침공해 수도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그러나 곧 고려군 대대적 반격에 부딪혀 압록강 너머로 물러났다.

홍건적은 원나라에 저항하는 한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홍건적침입은 고려 반원개혁 일부 차질을 빚었고, 고려조정은 원나라와 관계 개선을 위해 한때 관제를 공민왕 개혁 이전 체제로 되돌리기도 하였다.

1362년에는 '김용' 음모로 명장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가 희생당하였다.

같은 해 2월부터 7월까지는 요동 지역 원나라 출신 군벌 '나하추'가 '쌍성총관부' 잔당 '조소생'과 함께 고려 동북면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대패하면서 쌍성총관부 원나라 잔당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이 사건은 이성계가 원나라장수 에서 고려장수로서 두각을 나타낸 계기가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원나라에서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공민왕을 폐위 시키고 '덕흥군'을 추대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1363년초 공민왕은 왜구 토벌을 계획하였으나 잠시 중단 하였다.

1363년 음력 3월, 김용은 원나라 지원을 받는 덕흥군과 내통하여 흥왕사에서 공민왕 암살을 기도 하였으나, 최영이 진압했다.

이때 '노국공주'가 흥왕사 내 공민왕 침실 앞에서 암살세력을 맨 몸으로 막아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원나라 지원 받는 반란세력이 원 출신 공주 앞에서는 손을 쓰지 못했다.

물러난 덕흥군은 1364년 음력 1월 원나라 지원을 받아 '최유'와 함께 원군 1만 명을 이끌고 고려 서북면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최영과 이성계 활약으로 섬멸 되었으며, 고려출신으로 원나라 장군이었던 최유는 포로로 잡혔다.

1364년 여진 대추장 '김삼선', '김삼개' 형제가 고려 동북면을 침입했으나, 이성계 휘하 고려군 에게 크게 패하였다.

또한 같은 달 원나라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가 고려 서북면 연주 (평안북도 영변)를 침입하였다.

이는 원나라가 고려에 가한 마지막 공격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 의해 참패로 끝났다.

같은 해 음력 5월, '김속명'이 이끄는 고려군은 진해에 침입했던 3천 명 왜구를 격파하였다.

당시 고려군은 이처럼 짧은기간에 수많은 외침을 독자적인 힘으로 모두 물리칠 만큼 매우 강력 하였다.

사실 이 시기는 대외적으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지만, 역설적으로 국방력은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최고 수준에 달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상실했던 요동지역을 공격해 일시적으로나마 영토회복 하기도 했으며, 이처럼 짧은 기간에 수차례 외침을 받고도 이를 모두 고려군 단독 힘으로 당당히 막아낸 사례는 한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뒤, '병자호란'이 벌어졌던 시기로 시선을 돌려보면, 공민왕 시기와 여러모로 흥미로운 비교가 가능 하다.

당시 중국대륙은 명나라 쇠퇴와 청나라 부상이라는 ‘명청교체기’ 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는 마치 원이 기울고 홍건적과 같은 한족 반란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공민왕 시대와 흡사한 대외정세다.

이처럼 주변이 요동칠 때, 국가는 냉정하고 현실적인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 '광해군'은 이를 정확히 간파했다. 명과 청 사이에서 실리 추구하며 전쟁을 막고 국토보존 하려 했다. 이는 공민왕이 원과 관계를 조율하면서 고려주권을 회복하려 했던 노선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문제는 내부에 있었다.

명에 대한 의리와 충성을 외교 절대기준으로 삼은 서인세력은, 조선 현실과 백성 생존보다는 ‘명분’을 앞세워 행동했다.

결국 그들은 우리 역사에서 손꼽히는 '최악쿠데타'를 감행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 한다. 그렇게 세워진 인조정권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연속적 참화를 자초했고, 수십만 명 백성이 학살당하거나 청나라로 끌려가 비극적 운명을 맞는다.

그에 비해 공민왕 시기는 수많은 외침과 내부 혼란 속에서도, 오히려 고려 자주성이 회복되던 시기였다.

원나라 100년 간섭에서 벗어나, 고려 스스로 힘으로 국토를 지켜 내고 외침을 막아낸 보기 드문 시기였다.

물론 백성들은 연이은 침입과 전쟁에 시달렸고 국토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지만, 분명한 사실은 당시 고려는 외세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방어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 무장 '최영'과 '이성계'가 전면에 등장한다.

두 사람은 공민왕 위기극복 노력 과 함께 전장에서 고려운명을 떠 받치며 '민심영웅'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훗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 등장은 이 시기부터 예고되고 있었다.

우리는 이 두 시기를 단순히 <‘전쟁’의 관점이 아니라, 어떤 판단이 국익을 살리고, 어떤 명분이 국가를 망하게 하는가> 라는 교훈으로 되새겨야 한다.

광해군과 공민왕의 냉철함은 당대에는 외면받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전략과 선택 가치는 오히려 빛난다.

이 때 고려내부에서는 '정몽주', '정도전'등 '신흥사대부'들과 최영, 이성계 '무인세력'이 신장되고 있었다.

공민왕은 이런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정몽주, 정도전 등 신흥사대부들을 신진관료들로 채용하고, 그 세력을 배경으로 밖으로 반원정치를 더 강화시켜 갔다.

그리고 고려 내부적으로는 원나라식 관제와 전제를 타파하고 예전 고려식으로 되돌리는 개혁을 단행한다.

이처럼 공민왕은 대외침략들을 잘 막아내면서 원의 지배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나려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해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은 대외적으로나 내부적으로 혼란의 시기를 겪었다. 미중 패권경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북한의 군사 도발, 일본 및 중국과 외교적 갈등,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는 우리의 안보와 경제를 동시에 흔들었다. 내부적으로 윤석열의 뜬금없는 비상계엄선포로 극심한 정치 양극화, 사회적 갈등등 구조적 난제가 국민들 피로감을 가중시켰다. 다행히 이재명정부가 출범하면서 정국은 일정 정도 안정을 찾아 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격랑의 국제정세 속 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외부 충격이 닥칠 수도 있다. 돌발적 군사충돌, 경제블록 급변,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사태는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정권 유불리, 정당 이해득실을 넘어, 우리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역사거울이 있다. 바로 고려 말 공민왕 시대와 조선인조 시대이다. 어느 쪽을 따르느냐에 따라 국가 운명이 바뀔 것이다.

이처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찰과 결단이다.

외침을 막아낸 최영과 이성계 같은 유능하고 책임 있는 장수, 내부개혁을 주도한 정몽주와 정도전 같은 신념 있는 신진관료 들이 절실한 때다.

정치의 본령은 국가와 민생을 지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한 정쟁이 아니라, 격동의 시대를 헤쳐 갈 역사적 지혜와 인물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공민왕 시대 교훈은 지금 이 시점 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공민왕이 주변 격랑같은 대외정세 어느 정도 수습해가던 무렵, 그에게 있어 마음의 버팀목이자 평생 반려자였던 '노국공주'가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노국공주 죽음은 공민왕에게 깊은 상실감을 안겼다.

공민왕은 한동안 정사(政事)조차 돌보지 못할 만큼 깊은 실의에 빠진다.

그러나 그 절망 속에서도 공민왕 개혁은 고삐를 완전히 놓지는 않았다.

공민왕은 당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승려 '신돈'을 전격 등용 하며, 우리나라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대대적인 내부개혁에 착수 한다.

이어서 공민왕 3 - 신돈의 개혁이 계속됩니다.

초롱박철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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