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79

고려말 개혁과 좌절시대 4 ㅡ공민왕 4 (신돈의 개혁 2)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79

ㅡ고려말 개혁과 좌절시대 4 ㅡ

(공민왕 4 - 신돈의 개혁 2)


박근혜 정권시절, '최순실' 때문에 나라가 어지럽다 못해 혼돈스러울 때였다.


당시 '하태경' 새누리당(현 국민의 힘) 의원은 국정농단 의혹 핵심 인물인 최순실을 고려시대 요승 '신돈'에 비유했다.


그는 “최순실을 보면 고려를 멸망하게 한 '공민왕' 시절 신돈이 떠오른다”고 발언했다. 같은 당 '박인숙' 의원 역시 “신돈이 공민왕시대 고려를 망하게 한 사건이나, 괴승 '라스푸틴'이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린 사건에 견줄 만한 사태”라며 최순실 사건을 규탄했다.


아마 요즘 같으면 '신돈'을 '윤석열 김건희'가 믿고 따르던 '천공'이나 '건진법사' '명태균'으로 비교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들 역사인식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요승신돈’이라는 말이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왔다 하더라도, 신돈을 최순실과 비교하는 것은 단순한 오류를 넘어선 엄청난 역사왜곡이다. 그런 비교는 역사에 대한 무지 소산이거나, 의도적인 정치적 호도다.


신돈은 1365년(공민왕 14) ‘진평후(眞平侯)’에 봉해졌고,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

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

취산부원군(鷲山府院君),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판서운관사(兼判書雲觀事) 등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긴 관직명 받은 ‘정식관료’였다.


신돈은 단순히 왕 총애를 등에 업은 실세가 아니었다.


신돈은 우리 역사 속에서 찾아 보기 힘든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신돈은 국가 개혁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행정가이자 사상가였다.


비록 승려출신이라는 점이 보수 기득권층 반감을 샀지만, 그가 권력 잡은 6년 동안 펼친 개혁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급진적이고 구조적 개혁시도로 평가받는다


이처럼 신돈은 당대 개혁 상징 이었고, 고려가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 위한 시대의 고뇌였다.


그리고 이 모든 개혁을 공식적인 직함을 가지고 펼친 공적인 관료 였다.


신돈 이름 앞에 ‘요승’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은 역사 본질을 외면하는 일이다.


그런 신돈을, 아무런 공적직책도 없이 사인(私人) 신분으로 대통령을 농락한 최순실이나 천공등과 비교하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비교 자체가 역사적 모욕이며, 왜곡이다. 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600년 전 지하에 묻힌 신돈이 벌떡 일어나 대성통곡할 일이다.


이제는 제대로 된 시각으로, 그동안 왜곡되고 폄하되어 온 신돈이라는 인물을 다시 바라볼 때다.


'신돈'의 본관은 영산(靈山), 승명은 '변조'(遍照)였다. ‘신돈(辛旽)’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세속명을 정하며 사용한 것이다. 공민왕이 내린 법호로는 '청한거사'(淸閑居士)가 있다.


신돈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 영산에 신돈 아버지 무덤이 있다는 사실만이 전해진다. 어머니는 옥천사 노비 였다고 한다.


1358년(공민왕 7), 신돈은 공민왕 측근 "김원명' 소개로 왕을 처음 알현했다. 그 당시 신돈은 글을 제대로 몰랐지만, 언변이 뛰어났고, 겨울이든 여름이든 늘 해진 가사 한 벌만 입고 다녔다. 그 모습은 궁중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공민왕 묻는 말에 막힘없이 답을 하는등 총명하기 이를 데 없어 공민왕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된다.


당시 공민왕은 불교에 심취해 있었고, '보우'를 국사로 삼아 불교를 적극 후원하고 있었다.


그러던 1365년, 공민왕이 지극히 사랑하던 원나라 출신 왕비 '노국대장공주'가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난다.


공민왕은 공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7일마다 대규모 승려를 동원해 범패를 부르고 상여를 따르게 했으며, 장례 비용만으로도 국고가 바닥날 지경에 이르렀다.


인도 '샤 쟈한' 왕이 사랑하는 왕비가 죽자 왕비를 기념한 무덤궁전 '타지마할'을 짓고 그 때문에 왕위에서 쫒겨난 꼴이 될 뻔했다.


그래도 타지마할은 세겨적 유물이 되어 엄청난 관광객을 받아들이고 있으니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


어쨌든 공민왕 개혁정치는 이 무렵부터 급속히 동력을 잃었다. 고려조정에서도 지나친 불교의식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때 공민왕은 뜻밖의 카드를 꺼낸다. 바로 '변조'(신돈)를 ‘사부’로 삼아 정사를 맡기겠다고 한 것이다. 사실 그 이전부터도 공민왕은 때때로 신돈을 불러 자문을 구하곤 했다.


이처럼 신돈의 집권은 공민왕 치세 복잡한 정치상황에서 등장한 독특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기득권세력 반발은 거셌다. 무장 '정세운'은 그를 ‘요승’이라 부르며 죽이려 했고, 공민왕은 그를 피신시키기까지 했다.


기득권 인물들을 어느 정도 정리한 후, 공민왕은 다시 신돈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1364년(공민왕 13), 신돈은 다시 궁중에 입궐해 실권을 잡는다.


그런데 의문이 남는다.


왜 공민왕은 아무런 정치·사회적 기반도 없는 한낱 중(僧)에게 조정중책을 맡겼을까?


조선후기 실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이렇게 평했다.


[공민왕은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인물을 얻어, 인습으로 굳어진 폐단을 개혁하려 했다. 그 즈음 신돈을 보고 도를 얻었고, 욕심이 적으며, 미천한 출신에 일가친척 도 없으니, 일단 맡기면 거리낄 것 없이 과감히 개혁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많은 역사서들이 신돈을 ‘요승’ 으로 헐뜯고 있지만, 안정복 평가 는 주목할 만하다.


세간에는 신돈이 공민왕을 유혹 하기 위해 <노국공주를 닮은 여인 반야>를 들이밀었다는 이야기도 떠돌지만, 이는 신빙성이 떨어 진다.


공민왕은 신돈에게 정사를 맡기며 직접 맹서를 적은 글을 써 주었다.


“스승과 나는 사생을 함께할 것을 부처님과 하늘에 맹세한다.”


물론 이 글에 기득권층은 강하게 반발했다.


원로 유학자 이제현은 신돈을 두고 “흉인으로 나라를 어지럽힐 자”라 경고했고, 이에 신돈은 강하게 맞받아쳤다.


“유학자들은 좌주와 문생이라 하여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조정을 농단한다. 이제현 문생 들은 나라 안에 도둑처럼 번졌다. 유학자의 해독이 이렇다.”


요즈음 sky로 대변되는 명문대 출신들 행태와 비슷했다.


재상 '임군보'는 공민왕에게 항의하며 말했다.


“변조는 본디 중입니다. 아무리 인재가 없다 하더라도 천한 중 에게 정사를 맡겨 천하 웃음거리 가 되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처럼 고위문신과 재상들은 들끓었다.


반면 하급관리들은 신돈에게 동조하며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신돈개혁은 그야말로 속전속결 이었다. 집권 3개월 만에 공민왕 이 불신하던 대신들을 대부분 축출했고, 기존 좌주·문생 파벌도 무너뜨렸다. '최영' 같은 존경받는 무신마저 조정에서 내쫓았다.


신돈은 저택조차 소유하지 않고, 사찰이 아닌 남의 집에 머물렀다. 조정 출입 시에도 관복을 입고 머리를 기른 채 다녔기에 사람들 은 그를 ‘비승비속(非僧非俗)’ 이라 불렀다.


이 무렵 유학자 '이존오'가 신돈을 탄핵하며 다시금 물러나게 하라고 상소했으나, 공민왕은 오히려 이존오를 지방으로 좌천시켰다. 이후 더 이상 누구도 신돈을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


1366년, 신돈은 조정에 복귀한 지 6개월 만에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했다.


불법으로 점거된 토지, 강제로 노비가 된 백성, 부역을 피한 양민들을 조사해 바로잡는 전례 없는 개혁을 감행한 것이다.


그 대상에는 대형사찰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국이 술렁였다. 소지주들은 희망에 들떴고, 노비들은 양인 될 날을 꿈꾸며 신돈을 찾아왔다. 부녀자들 송사 까지 신돈이 직접 나서 해결해 주자 여성들까지 그에게 몰려 들었다.


하지만 기득권층은 신돈이 부녀자를 겁탈했다는 악의적 루머를 퍼뜨렸다. 반개혁 세력은 이처럼 칼을 갈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개혁이 결국 신돈 자신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바로 '신진사대부' 등용 이었다.


신돈은 '성균관'을 재건하고, '이색'을 대사성으로, '정몽주'를 박사로, '이숭인'을 학관으로 삼았다. 기존 유생과 구세력은 배제하고 새로운 유학자를 키우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들 신진유생은 중 출신 신돈을 얕잡아 보고 거세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중 일부는 훗날 무장 '이성계'와 손잡고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다.


또한 신돈은 '순자(循資)제도'를 도입하여 과거제도 개편을 추진 했다. 권문세가 자식이나 공신 후손들에게 부여되던 특혜를 없애고, 향시-회시-전시의 3단계 시험으로 공정한 등용시스템을 마련했다.


이 개혁으로 조정은 빠르게 개편되었고, 하층민들은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기득권 적개심은 더욱 깊어졌다.


그렇게 6년간 추진된 개혁에 서서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졌다.


'고려사'에는 신돈이 여색을 탐하고, 재물을 모았다고 적혀 있다. 고려사는 신돈을 거세게 공격한 정도전등 신진사대부가 기록한 것이라 진실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시 기득권 세력은 이 흉흉한 소문을 파고들었다.


결국 이즈음들어 공민왕도 신돈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기록에 따르면 신돈은 공민왕이 능으로 행차할 때 길목에 군사를 매복시켜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 했고, 두 번째 모의도 측근 고발로 탄로나 실패하고 수원으로 유배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배 이틀 만에 죽임을 당했다.


공민왕은 신돈에게 해명할 기회 조차 주지 않았다.


“네가 부녀자를 가까이 한 것은 기운을 기르기 위함이라 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또 성 안에 좋은 집을 일곱 채나 가졌다고 하니, 맹세한 글과 다르지 않느냐?”


신돈은 잡힌 지 나흘, 유배된 지 이틀 만에 죽었다. 신돈 아들마저 죽임을 당했다. 신돈측근들도 모조리 제거됐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었는데도 '우왕'이 신돈 아들이라는 것은 가당치도 않는 말이다.


이렇게 우리 역사상 가장 과감 하고 전례 없는 개혁은 무산됐다. 다시 반동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 쳤다.


그리고 공민왕의 상상하기 힘든 변태적 행위가 벌어지고, 가장 믿었던 측근들에게 암살당한다.


공민왕은 왜 신돈을 죽였을까?


기득권의 이간질 때문이었을까?


신돈의 축첩과 뇌물, 반역시도 때문이었을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어서 신돈의 개혁 3편이 계속됩니다.


― 초롱 박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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