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고려말 개혁과 좌절시대 5 ㅡ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80
ㅡ고려말 개혁과 좌절시대 5 ㅡ(공민왕 5 - 신돈의 개혁 3)
(공민왕 5 - 신돈의 개혁 3)
700년 전, 고려말 개혁가 '신돈'을 다시 조명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의 대표적 정책기관인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은 오늘날 기준으로도 놀라운 개혁적 성격을 지닌 조직이었다.
권문세족들이 탈취한 토지를 원래 농민에게 돌려주고, 강제로 노비 가 된 이들을 해방시키는 작업은 단순한 행정이 아닌, 철저한 민중 중심 개혁이었다.
신돈개혁에 관한 내 글을 읽은 독자들은 “그 시대에 그런 개혁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지금 시대와 맞닿아 있는 그의 발언이 소름 끼칠 정도”라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고려사 열전에 전하는 신돈의 아래 발언은 지금 들어도 놀랍다고 했다.
[“유학자들은 좌주·문생이라 칭하며 조정 안팎에서 서로 끌어주고 밀어준다. 그래서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다 한다. 이제현의 문생들은 온 나라에 퍼져 결국 도둑이 되었다. 유학자의 해독이 이와 같다.”]
― 고려사 신돈 열전 中 ㅡ
이 말은 무려 700년 전 발언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사회에서 정치· 법조·언론·학계가 학연·지연으로 얽혀 특권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 보면, 당시 신돈 개탄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충실하게 개혁을 해가던 신돈을 공민왕이 급하게 제거한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학자들은 크게 네 가지 요인을 지목한다.
1. 보수 기득권층의 저항
신돈의 개혁으로 권문세가와 무장세력은 경제적·정치적 기반 을 잃었다. 공민왕조차 이들의 격렬한 반발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책임을 신돈 에게 떠넘겼다.
2. 신진 사대부의 이탈
신돈이 직접 발탁한 유학자들이 성장해 왕에게 직접 정치를 하라고 요구하면서 신돈과 관계가 틀어졌다. 불교적 배경을 가진 신돈은 이들 성리학 사대부 지지 잃고 만다. 신돈은 믿는 도끼에 스스로 발등을 찍힌 꼴이 되었다
3. 불교 내부의 분열
신돈은 화엄종 기반으로 불교 개혁을 추진했지만, 선종을 중심으로 한 기존 불교세력과 충돌했다. '보우'스님등 기존 종파 인사들을 적으로 돌리는 실수를 범했다.
4. 국제정세 변화에 대한 무관심
명나라가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국 새로운 패권으로 등장하자, 공민왕은 외교노선 전환을 꾀했다. 하지만 신돈은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고, 공민왕은 결국 새 인물로 새 판을 짜려 했다.
대외정세까지는 신돈의 한계였다.
이후 공민왕에 의해 신돈은 처형 되었고, 그가 몰아냈던 '최영'·
'경복흥'등 무장과 '이색'· '백문보' 등 유학자들이 다시 조정에 복귀 했다.
신돈이 죽자마자 개혁은 철저히 후퇴했다. 토지제도는 혼란으로 돌아갔고, 노비 제도는 더 악화 되었으며, 불교계도 과거 타락한 모습으로 복귀했다.
신돈을 처형한 공민왕 마음은 점점 정사에서 떠나, 음욕과 기이한 사적 변태적 행위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공민왕 내면은 슬픔과 집착, 현실도피가 뒤엉킨 욕망의 소용돌이 속으로 가라앉아 갔다.
그러나 신돈개혁은 좌절되었지만, 그 정신은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
조선건국 핵심인물인 '조준'과 '정도전'은 신돈 토지·노비 정책을 모델 삼아 '과전법'과 신분개혁을 추진했다. 과거제·순자법등 신돈 제도개혁 역시 조선초기에 계승 되었다.
신돈은 불교 자비사상과 유학 도덕적 정치이념을 접목해 실천한 한국사 최초의 현실 개혁가였다. 권력 정점에서 민중 삶을 위해 실제 개혁을 단행한 인물은 우리 역사상 신돈이 유일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요승(妖僧)' 이라는 조롱뿐이다.
신돈이 키운 신진사대부들도, 불교계도, 조선건국 세력도 신돈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을 건국하고 고려사를 쓴 신진사대부들은 오히려 신돈 때문에 고려 말이 더 혼란스러워 졌다는 것을 강조했다
신돈을 그렇게 부정적 인물로 그려야만 새로운 왕조 정당성이 확보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왜곡은 실제로 개혁을 시도한 인물이 역사의 악당으로 낙인찍히는 구조가 얼마나 견고한지를 보여준다.
신돈 1편에서 썼지만 신돈과
비슷한 인물이 있다.
영화 '로얄 어페어'(A Royal Affair, 2012)는 18세기 덴마크에서 개혁정치를 추진하다 처형된 독일출신 의사 '요한'의 실화를 다룬다.
정신질환을 앓는 덴마크 국왕과 결혼한 영국 공주 '캐롤라인', 그녀와 국왕의 주치의 '요한'은 계몽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덴마크에 고문금지, 자유교육, 복지정책 등을 도입하며 개혁을 이끈다. 그러나 귀족들 반발로 쿠데타가 발생하고, 요한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군중들은 그에게 돌을 던지고 비난을 퍼붓는다. 죽음을 앞둔 요한이 마지막으로 외친 말은 이렇다.
“난 당신들 편이야!”
그 장면은 마치 신돈의 말로를 보는 듯했다. 왕권에 의존한 개혁가, 지지기반 없이 민중의 삶을 위해 희생한 인물, 그리고 무지한 대중에게 돌 맞는 마지막 장면까지 닮아도 너무 닮았다.
신돈과 요한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1. 권력기반은 왕에게 의존했다.
2. 민중과는 정서적으로 교감하지 못했다.
3. 동시대 귀족·보수 세력을 이겨낼 동력을 마련하지 못했다.
4. 개혁은 너무 앞서갔지만, 당시 시대는 그 개혁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처럼 공개적인 검증과 제도화된 견제가 없는 ‘위로부터의 개혁’은 취약하다.
도덕성과 지속가능한 제도적 장치 없이 추진된 개혁은 내부 부패 또는 외부 반발에 의해 무너진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면, 개혁가는 결국 ‘앞서 간 죄’로 처형되거나 잊혀지고 만다.
역사는 반복된다. 신돈은 죽고, 요한은 죽었지만, 그들이 심은 씨앗은 후대에 꽃을 피우기는 했다.
“난 당신들 편이야!”
이 외침은 700년이 지난 지금에야 겨우 들리기 시작했다.
신돈이 정말 요승이었는지, 아니면 시대가 감당하지 못한 개혁가였는지, 나는 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다.
이어서 공민왕말기 변태적 행위가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