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81

ㅡ고려말 개혁과 좌절시대 6 ㅡ공민왕 6 (공민왕 시해 1)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81

ㅡ고려말 개혁과 좌절시대 6 ㅡ

(공민왕 6 - 공민왕 시해 1)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통틀어, 현직 국가원수가 가장 가까운 측근에 의해 살해당한 사례는 단 두 차례 있었다. 하나는 1979년 10·26 사건, 또 하나는 그보다 600여 년 전인 1374년, 고려 말 에 벌어진 <공민왕 시해사건> 이다.


개혁군주로 널리 알려진 고려 '공민왕'은, 자신이 총애하던 친위 부대 ‘자제위’ 소속 '홍륜' 일당 에게 궁궐 안에서 참혹하게 살해 당했다.


이 두 사건은 시간적으로 600년 이상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개과정과 이후 정세변화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첫째, 두 사람 모두 현직에 있던 국가원수였으며, 가장 가까이서 모시던 충복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공민왕은 칼에, 박정희는 총에 쓰러졌다.


둘째, 시해를 실행한 측은 그 엄청난 사건을 저지르고도 이후 정세에 대한 아무런 대비 없이 무방비로 있다가 곧바로 진압 당했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셋째, 공민왕과 박정희 모두 시해 이후 역사적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뉘며 지금까지도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다.


이제 오늘 주제인, 1374년 <공민왕 시해사건>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공민왕은 재위 초반과 중반,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한 개혁군주였다.


공민왕은 권문세족을 억누르고 '신돈'을 등용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토지와 노비제도를 바로 잡는 등, 중세 봉건질서에 균열을 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이 스스로 신돈을 제거한 이후,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와 '동국통감' 등 사서에 따르면 공민왕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술과 방탕, 변태적 성행위 등 이해하기 어려운 행적들이 이어지며, 한 나라 국왕으로서는 도저히 납득 하기 힘든 기괴한 모습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가 예쁜 시녀들을 불러들여 방안에서 방탕하게 지냈다는 기록은 그나마 이해 가능한 수준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공민왕은 귀족자제 중 용모가 단정한 인물들로 '자제위'라는 친위경호조직을 구성했는데, 이들과의 '동성애적' 관계는 물론, 그들을 자신 후궁들과 합방시켜 몰래 지켜보는 변태적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더 충격적인 기록은, 공민왕이 후사를 잇기 위해 자제위 소속 홍륜 등을 시켜 왕비들과 관계를 맺게 하고, 그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나면 자신의 아이로 삼으려 했다는 설이다. 이 부분은 역사적 진위 여부를 놓고도 논란이 많지만, '고려사'에는 분명히 적혀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윗 이야기 진실여부는 알 수가 없다. 사실 '고려사' 중 고려 말 부분은 믿기가 힘든 이야기가 수두룩 하다.


'고려사' 자체가 조선건국하고 나서 조선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건국 명분과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고려 말 과 공민왕을 심하게 폄하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고려사'는 조선이 오백년을 넘게 지탱함에 따라 고려 말 상황 650여년 전 기록인 고려사 내용 그대로 사실로 받아 들이고 있을 뿐이다.


그 진실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사' 가 고려왕조 필망론을 제시하기 위해 공민왕 말년 행적에 대해 과장은 있을 수 있지만, 고려사 이외에 여러 기록들에서도 공민왕 말년은 총기를 잃은 모습으로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 무렵 공민왕이 여러모로 실정을 저지른 것 일정 부분 사실이라 할 수 있다.


1374년 9월, 공민왕은 내시 '최만생'으로부터 충격적 소식을 듣는다. 후궁 '익비'가 자제위 출신 '홍륜'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이다. 격노한 공민왕은 즉시 최만생에게 명을 내려 홍륜과 그 일당을 처형하라고 지시한다.


이 이야기 역시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고려사'에 따르면, 공민왕이 스스로 익비와 홍륜을 합방시켜 임신하게 하려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익비가 실제로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인데 오히려 격노하며 홍륜을 처형 하라고 명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다. 물론 겉으로는 자신이 아이를 가진 것처럼 꾸미기 위해 홍륜을 제거하려 했다는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이 또한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어쨌든 최만생은 공민왕 홍륜일당 처형지시 명령 이면을 간파했다. 홍륜을 제거한 뒤엔 자신도 제거 될 것이 분명하다는 판단이었다. 최만생은 권력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최만생은 왕명을 따르기는 커녕, 오히려 홍륜에게 공민왕 처형 지시 사실을 알린다.

게다가 그들과 함께 공모하여 공민왕을 선제적으로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최만생 입장에서는 그것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그들은 만취한 공민왕이 잠든 틈을 타 왕을 습격해 잔혹하게 시해한다.


최만생이 먼저 칼을 들어 공민왕 을 내리쳤다. 이어 홍륜 일당이 달려들어 공민왕을 난도질했고, 피와 뇌수가 벽에까지 튀었다.


하지만 공민왕을 시해한 홍륜 무리는 아무런 뚜렷한 대책도 없이, 시신을 방치한 채 숨어 버리고 만다.


혹시 이 장면, 1979년 10월 26일의 그 밤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비록 '김재규'는 숨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시해 직후 무대책 상황은 매우 닮아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신은 궁정동에 그대로 놔둔 채, 어디에 보고할지, 시신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아무런 지시도 없이 김재규는 육군본부로 향했다.


더 나아가 김재규가 사후 대책에 전혀 준비가 없었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는 그 이후 벌어진 장면에 있다. '박흥주' 대령이 김재규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차에 태우고 이동하던 중, 정승화가 "어디로 가는 겁니까? 육본으로 가시죠"라고 말하자, 박흥주가 되묻는다.


“중정으로 갈까요? 육본으로 갈까요?”


이에 김재규는 잠시 고민하다가 육본을 선택한다.


국가 원수를 시해해 놓고도 그 이후의 행선조차 미리 정하지 않았다는 점은, 아무리 생각해도 놀랍고도 어이없는 일이다. 결국 김재규의 이 결정 하나—육본을 택했다는 그 한 마디가 우리 현대사 거대한 분기점이 되었던 것이다.


만약 그때 김재규가 육본이 아닌 중정을 택했다면?


비록 최종적으로 실패했더라도, 한국 현대사 방향은 크게 달라 졌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아무런 준비도 없이 국왕 시해라는 중대범죄를 저지른 홍륜과 최만생은, 결국 자제위 총책임자였던 '김흥경'에게 모든 것이 보고되며 일이 드러난다. 김흥경은 곧바로 공민왕의 친모인 '명덕태후'에게 공민왕 시해사실 을 알린다.


놀랍게도 김흥경은 이미 그전에 홍륜이 시해를 모의하고 있다는 밀고를 접수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민왕이 홍륜을 극진히 총애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감히 직언하지 못했다. 혹여 거짓 밀고를 믿었다고 오해를 받아 자신 목이 날아갈까 두려웠던 것이다.


결국 김흥경은 이 사실을 숨긴 책임으로 훗날 최영에게 탄로가 나, 참형에 처해진다.


이 대목에서도 10.26 당시 '김계원' 비서실장이 떠오르지 않는가?


김계원 역시 김재규가 대통령을 사살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도 몇 시간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던 인물이다. 상황을 지켜보며 김재규가 사후 대책 없이 일을 저질렀음을 눈치챈 뒤에서야 겨우 진실을 밝혔다.


이처럼 개혁군주로 불리던 공민왕 은 즉위 23년 만인 45세 나이에 허망하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하게 된다.


하지만 다음 날, 공범인 최만생과 홍륜 일당은 내시 '이강달'과 '경복흥', 그리고 권문세가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인임' 등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유배된다.


이후 '이인임'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권력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일련의 사건이 '고려사'에 기록된 공민왕 말년 주요 내용 이다.


이런 이야기를 주제로 삼아 만든 영화가 '조인성'이 홍륜 역할, '주준모'가 공민왕 역할을 맡아 열연한 '쌍화점' 이다.


이 영화에서도 조인성과 주준모가 동성애를 하는 장면이 적라하게 나온다.


공민왕의 말년을 둘러싼 이 같은 ‘해괴망측한’ 이야기들을 영화적 상상력과 결합해 표현한 작품 이기도 하다.


만약 '고려사'에도 등장하는 이 기록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공민왕은 친형인 '강간왕 충혜왕' 이나 조선의 연산군, 심지어 로마의 네로황제를 능가하는 희대의 음란군주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사' 기록은 여러 면에서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


무엇보다 공민왕이 즉위 초부터 그런 인물이었더라면, 공민왕 전반기 통치에서 드러난 눈부신 개혁정신과 정치력은 설명되지 않는다. 특히 사랑하던 노국공주 가 사망한 이후에도 그는 정사를 포기하지 않고, 신돈을 통해 강력한 개혁정책을 6년 이상 지속해 나갔다.


또한 공민왕이 시해된 직후, 공민왕 아들로 알려진 '우왕', (모니노. 공민왕과 반야 사이에서 난 아들, 당시 10세) 이 지체 없이 즉위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공민왕에게 왕위를 이을 적자가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익비와 홍륜 사이에 아이를 갖게 한 뒤 그 자식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설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고려사'에는 공민왕이 우왕을 신돈자식으로 의심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러나 그런 의심이 실제라면, 공민왕이 애초부터 우왕을 왕세자 로 삼았을리도 없다. 당시 왕위 계승 원칙과 혈통 중심적 사고를 고려할 때, 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모순이다.


이처럼 공민왕 말년 행태를 둘러싼 기록들에 대해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조선개국 세력, 특히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 권문세가들이 고려왕조 정통성을 부정하고 조선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역사적 왜곡을 가했다는 해석에 무게를 두고 있다.


특히 ‘우왕·창왕은 신돈의 자식’ 이라는 주장은 고려왕조 몰락을 '신돈'이라는 ‘요승’과 공민왕 부도덕함으로 귀결시키려는 의도가 짙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건국 당위성을 부각시키는 데 필요한 프레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공민왕이 자신 부인을 외간 남성과 강제로 간통하게 하고, 그 아이를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기록은 너무도 황당하다.


이는 단지 개인적 일탈이나 병적인 행태를 넘어서, 당시 사회 윤리와 왕조질서를 완전히 부정 하는 내용이다. 실제로 그와 같은 일이, 그것도 왕실 내에서 벌어 졌다면 수많은 고관대작들이 이를 묵인했을 리도 없다.


무엇보다 개혁군주로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공민왕이 단기간에 갑작스레 '광기 어린 변태 군주'로 돌변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노국공주 죽음 과 신돈 숙청으로 인해 실의에 빠졌다 해도, 그가 말년에 이처럼 극단적인 행동을 보였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물론 역사적 사실로서, 공민왕은 자제위 출신이자 자신의 측근이던 홍륜 일당에게 시해당한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 시해 배경에 조선개국 세력 정치적 목적과 왜곡된 서술 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하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기록들을 더 신중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과연 <공민왕 시해>는 단순히 이런 개인들 돌발과 비겁함, 그리고 우발적 음모로만 설명될 수 있을까?


650여 년간 위와 같은 정설이 받아들여져 왔지만, 최근에는 다른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바로 ‘궁정음모론’이다.


10.26 사태도 김재규 우발적 행태로만 보지않고 알게 모르게 미국이 개입한 '미국음모론'도 나오고 있다.


글이 길어져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하겠다.


이어서 공민왕 시해 2 - 궁중음모론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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