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고려말 개혁과 좌절시대 7 ㅡ(공민왕 7 - 공민왕 시해 2, '음모론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82
ㅡ고려말 개혁과 좌절시대 7 ㅡ
(공민왕 7 - 공민왕 시해 2, '음모론')
공민왕과 박정희!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시대 권력자 였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권력절정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시해되었고,
그 죽음은 곧장 새로운 권력 탄생 으로 이어졌으며, 사건의 진실은 끝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도, 역사 속 궁정동 ‘김재규’와 고려 궁궐 속 ‘자제위’ 사이를 오가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자제위, 그들은 왜 공민왕에게 칼을 들었는가?”
“아니, 누가 그들에게 칼을 쥐어준 것인가?”
“김재규는 왜 박정희에게 방아쇠를 당겼는가?”
“김재규는 과연 단독범 이었을까?”
이처럼 박정희와 공민왕 시해 사건의 이면에는 단순한 개인감정 이나 우발적 충돌을 넘어선
구조적 권력갈등과 외부세력 개입설, 즉 '음모론'이 깊이
드리워져 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사살한 뒤 재판정에서 외쳤다.
“그것은 민주화를 위한 혁명적 결단이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여전히 묻는다.
“왜 하필 그날, 그 자리에서 총을 쏘았는가?”
“누군가 그를 외롭게 몰아넣은 것은 아니었을까?”
당시 상황을 보면,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최고 권력기관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지철' 등 강경파에 의해 점점 고립되고 있었다. 한편 미국은 유신체제에 냉담해지고 있었고,
한미관계에도 미묘한 균열이 감지되던 때였다.
이런 정황 속에서 제기된 음모론 이 바로 ‘미국 개입설’이다.
일각에서는 “CIA가 김재규 라인 과 접촉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또한 시해 직후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이례적으로 빠르게 권력 공백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김재규가 의도적으로 고립되도록 사전에 유도된 ‘희생양’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1374년 10월 고려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개혁군주 공민왕은 자제위 소속 내시 홍륜·최만생 등에 의해 침전 에서 시해된다.
'고려사'는 공민왕이 후궁익비가 홍륜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에 격노하여 홍륜을 제거하려 하다가 시해당했다고 서술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익비와 홍륜 합방은 사실상 공민왕 지시에 따른 정치적 연출 이었다. 그런데 공민왕이 직접 주도한 일에 격분하고 홍륜을
죽이겠다고 결심했다는 점은 커다란 모순이다.
그리고, 더욱 미스터리한 점은 다음과 같다.
왜 공민왕은 가장 신임하던 최만생에게 살해당했는가?
호위병들은 왜 시해 현장에 전혀 출현하지 않았는가?
공민왕의 어머니 명덕태후는 왜 그날 새벽, 우연히 아들의 침전에 있었는가?
왜 아들의 참혹한 시신 앞에서 냉정하게 침묵을 지켰는가?
이 모든 의문은 결국 ‘궁중음모론’ 으로 귀결된다.
공민왕 모후 명덕태후는 남양 홍씨출신으로, 원나라와는 무관한 고려토착 권문세가 가문출신이다.
그녀는 공민왕 개혁정치에 공개적 으로 반감을 표출했고, 특히 신돈 에 대해서는 적의를 감추지 않았다.
공민왕을 시해한 홍륜은 명덕태후 와 매우 가까운 친족으로,
명덕태후 조카 증손자였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홍륜배후에 명덕태후 존재가 있었을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다.
더욱이 공민왕 시해 직후 명덕태후는 공민왕 죽음을 숨기고
“임금이 편찮다”고 거짓말을 전하며, 이인임·경복흥 등 실세를 불러 후속 대책을 논의했다.
당시 명덕태후의 침착한 대응, 시해 당시 수상한 호위병 공백,
홍륜과의 혈연 관계, 그리고 정치적으로 이인임과 연결점까지 고려할 때, 공민왕 시해는 단순한 내시들 반란이 아니라 공민왕 개혁을 두려워 하고 있었던 기득권층 ‘권력연합’의 결과였을 가능성이 크다.
또 다른 시선은 홍륜 개인감정 에서 비롯된 정치적 복수다.
홍륜 조부 '홍언박'은 과거 ‘흥왕사의 변’ 때 김용에게 살해된 대신이었다. 일각에서는 공민왕이 김용을 통해 이를 사주했다는 설도 있다. 즉 '흥왕사의 변'은 조작된 자작극 친위쿠테타였다는 것이다.
만약 홍륜이 조부 죽음에 공민왕 연루되어 있다고 여겼다면,
겉으로는 총애를 받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복수를 품고 있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모든 추론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고려사' 말기 공민왕 편이 믿기 힘든 내용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고려사'는 공민왕 사후 60년이 채 안 되는 시점, 조선을 건국한 '신진 사대부'들에 의해 편찬되었다.
물론 세종은 '고려사' 간행을 반복하며 오류를 고치려 했지만,
그 역시 고려말기 ‘전왕조사’를 바라보는 시대적 한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세종대왕은 명 황제의 죽음에도 21일간 상복을 입으며 조문했고,
단군보다는 기자를 조선의 시조로 보았다.
이러한 사대주의적 관점은 '고려사'에 고려 말 혼란상을 과도 하게 부각하고 조선건국을 정당화 하는 왜곡을 낳았을 가능성 배제 할 수 없다.
지금도 1979년 10.26 진실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물며 600여 년 전 고려궁궐에서 벌어진 시해사건이야말로
어찌 한두 마디로 결론지을 수 있으랴.
우리는 그저, 정황과 인물 관계, 사료에 남겨진 단서들, 그리고 상식적 추론을 통해 가장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를 조심스럽게 제시할 뿐이다.
그것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반복되어선 안 될 비극적 사건들
재현을 막는 작은 지혜이자 노력일 것이다.
이어서 <이인임시대와 권력재편 편>이 계속됩니다.
초롱박철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