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83

공민왕8 - 공민왕시해에 대한 견해차이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83

ㅡ고려말 개혁과 좌절시대 8 ㅡ

(공민왕 8 - 공민왕 시해에 대한 견해차이)


어제 제가 올린 <공민왕 시해 사건>에 대해 어떤 분이 댓글을 남기셨습니다.


그 댓글을 읽고 보니, 저보다 훨씬 깊이있는 역사적통찰이 엿보였고, 제가 추정했던 내용과는 여러 면 에서 차이를 보였습니다.


역사는 단지 기록만으로 확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대의 정치적 이해관계나 권력구도, 그리고 기록자 입장에 따라 과장되거나, 축소되거나, 심지어 왜곡된 채 전해질 가능성도 매우 큽니다.

그래서 ‘기록’만으로 역사실체를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하나의 사건을 다양한 각도에서 비교하고 분석 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주변국 역사서나 외부자료 교차검증은 진실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근현대사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해방 직후, <여순사건, 제주 4·3사건, 그리고 1980년 광주민주항쟁> 같은 역사적 비극 들은 한때 ‘이념’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빨갱이의 난동>쯤으로 왜곡되어 교과서에까지 실린 바 있습니다.


심지어 10·26 사건 이후 전두환 정권이 정리한 '5공비사'는 '국가 공식기록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전두환 신군부 정당성을 부각시키고 찬양하는데만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이런 사례는 훗날 수백 년 후 후대 역사학자들이 '5공비사'만을 근거 로 당시를 해석한다면, 또 다른 역사적 오해나 논란이 생길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역사는 단순히 ‘기록된 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기록 이면에 있는 맥락과 의도>를 함께 살펴보는 비판적 시각이 필요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건일지라도 다양한 정황과 자료를 통해 복수 추정을 시도해보는 것은 오히려 역사적 진실에 다가가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제가 어제 올린 <공민왕 시해 사건>에 대해 또 다른 시각에서 재해석한 추정 을 함께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역사란 단순히 과거 기록이 아닌, 오늘 우리가 고민하고 성찰해야 할 현재 과제이기도 하니까요.


[ 공민왕시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여 미안합니다만


공민왕의 말기행적을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기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겁니다.


(국가의 주인이 왕이었던) 왕조시대의 제일 중요한 사안은 후사문제 입니다.


당시 공민왕이 가장 힘들어한것이 후사문제였고, 대신할 가까운 왕족조차 없었습니다.


후일 창왕을 폐하고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공양왕이 옹립되는데 신종의 7세손입니다.

신종이 20대, 공민왕이 31대, 공양왕이 34대왕이란걸 생각하면 왕족의 씨가 얼마나 말랐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공민왕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후사를 위해서라면 뮈든지 해야만 했을겁니다.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고려사)를 조작했다기 보다는 실제였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명덕태후는 우왕(모니노)을 손자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대책이 없었으니 자신의 슬하에서 길렀습니다.


그러면 기른정이라도 들었을텐데 왕위에 올리는걸 주저했습니다.

대안이 없으면서도...


소설적 상상을 도입한다면 오히려 노국공주가 씨내리를 통해 임신 한것이 더 사실스러울것 입니다.


최종적으로 익비의 임신은 사실이고 실제 딸을 낳았습니다. 공초받으며 실토한 최만생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우왕의 출생시기를 따져보면 노국공주 생전(임신중)에 반야와 합방하였어야 합니다. 우왕은 시기적으로도 공민왕의 혈손으로 믿기 힘듭니다. 더구나 신돈이 처형되기까지는 아무도 모니노 (당시7살)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가정이지만 공민왕의 계획대로 자제위의 인물들을 죽여 입을 막았고, 익비가 아들을 낳았다면 세자로 책봉되었을 겁니다.

혈통을 의심받고 있었던 모니노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겁니다.


고려사 내용에 과장이 있었을 수는 있지만 진실로 보는게 옳습니다.


조선 종묘입구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당이 있습니다.

공민왕을 이은것이 이성계란 의미로 세운것입니다.]


이에 대한 저의 답글입니다.


[좋은 내용 댓글 고맙습니다.


고려말 역사에 대해서 고려사에 자세히 나옵니다. 그러나 원 글에 밝혔듯이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 조선을 건국한 자 들이 쓴 역사이기때문에 조작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역사서가 '고려사'만 쓰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 순서나 내용들을 다르게 하기는 힘 들었겠지요.


님이 제기한 문제는 공민왕이 '씨없는 남자'였느냐 아니였느냐 인데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 이유는 노국공주 임신은 역사적 사실이고, 애를 낳다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 입니다.


아무리 후손이 귀하다고 해도 당시 상황에서 원나라 노국공주를 씨내리로 임신을 시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왕(모니노)도 명덕태후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것은 맞지만 그래도 곧 바로 왕위에 오릅니다.


특히 원직주의자 최영이 우왕을 반대하지 않고 잘 보필 합니다.

우왕이 신돈아들이라고 조금 이라도 의심했음 그러지 못 했을 것입니다.


노국공주 임신 중에 반야를 임신 시켰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하셨는데 왕조시대 왕들은 아무리 사랑하는 정비가 있어도 후사를 위해서 후궁이나 다른 여성들과 의무적이라도 합궁을 합니다. 정비가 임신을 하고 있었더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익비 문제도 공민왕의 변태 짓 거리 보다는 홍윤과 사적으로 불륜을 하다 들켰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쨌든 고려말 역사는 여러가지로 추측이 가능합니다.]


이 답 글에 대한 그 분의 답 글 입니다.


[燭籠(초롱)박철홍전남담양60


공민왕 관련 연표

1330년 공민왕 탄생

1349년 노국공주 혼인

1351년 공민왕 즉위

----후사없음-----

1359년 혜비이씨 혼인


1364년 노국공주 임신

1365년2월 노국공주 사망

1365년7월 모니노 출생


1366년 익비,정비 혼인

1371년 신비 혼인

1371년7월 신돈 처형및 모니노 입궁


1372년 자제위 설치

1374년9월 공민왕 사망


ㅡ 역사기록의 해부 ㅡ


노국공주와 혼인후 10년이 지나도 후사가 없으니 왕실의 근심은 깊어지고 간택을 통해 혜비이씨를 들임


혜비 역시 소식없는 와중에 노국공주가 혼인 14년만에 임신했으나 난산끝에 사망


그동안 다른 여자들은 거들떠보지않던 공민왕이 신돈의 비첩을 가까이하여 그해 7월에 모니노가 탄생하였으나 왕실과 조정에서 전혀 모름 (공민왕과 신돈 반야 모두 이사실을 함구함)


공민왕의 자식이 생긴걸 모르는 왕실에서는 다급하게 익비와 정비를 입궁시켜 후사를 얻으려는 노력을 기울임


모니노가 커서 6돌이 지난후에 신돈을 처형하고야 비로소 자식이 있었음을 밝히고 태후전에 입궁시킴. 당연히 태후는 의심 하여 손자로 인정하지 않음


고민끝에 의심을 없애기 위해 죽은 궁녀 한씨의 자식으로 공표함


다음해 자제위를 설치하여 젊은 남자들을 궁중에 들였고, 왕비들과 어울리도록 방치,유인,강요함


왕위계승의 정통성이 왕의 권위를 세워주는 왕조시대에 왕이 자신의 자식으로 주장했지만 혈통이 의심스런 왕자(우왕)와 왕의 16촌 형제 (공양왕)중 누가 더 정통성이 높을지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 댓글에는 따로 답글을 달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공민왕 시해는 지금으로 부터 650여 년 전 일입니다.

그 누구도 그 날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기록은 남았지만, 그 기록조차 누가, 어떤 의도로 썼는지에 따라

진실은 얼마든지 왜곡되거나 누락 될 수 있기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공민왕 시해 둘러싸고는 다양한 해석과 추정, 설(說)들이 존재합니다.


불과 50년도 안 된 10.26 사태, 박정희 대통령 시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건의 본질을 단 하나 정답으로 규정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저는 앞서 소개한 댓글의 관점과, 제가 제시한 또 다른 해석을 함께 참고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독자 여러분께서도,


<스스로 그 시대의 맥락과 흐름을 상상하며 공민왕 시해 사건 배경 과 진실에 대해 한 번쯤 추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그 과거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와 내일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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