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여인 '우씨', 두 번 왕후되다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23
― 고구려 여인 '우씨', 두 번 왕후되다 ―
“형사취수”(兄死取嫂).
"형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를 아내로 맞는다"는 이 제도를 처음 들은 건 중학교 국사 시간이었다. 국사 선생님의 설명에 반 아이들 웃고 떠들며 왁자지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형사취수제'는 고대 부여와 고구려 등 북방계 유목문화권 전통적인 풍습으로, 고대 부족국가들 혼인제도와 함께 시험에도 자주 등장했다.
옥저의 '민며느리제', 고구려의 '데릴사위제' 등과 함께 기억했던 사람도 많을 것이다.
형사취수제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불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가문혈통을 유지하고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형이 죽었을 때, 그 아우가 형수를 아내로 맞아 형이 남긴 가족과 자녀를 보호하고, 가문을 잇는 도덕적·사회적책임을 다하는 관습이었다.
이러한 형사취수제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부여 등 유목민족 사회와 여러 고대 국가에서도 발견된다. 그런데 이 제도를 이용해, 그것도 아주 주체적이고 전략적으로 두 번이나 왕후 자리에 오른 여인이 있었다. 바로 고국천왕과 산상왕 왕비였던 <우씨왕후>다.
최근 TV에서 우연히 우씨 왕후에 관한 이야기를 접했다.
흥미롭게도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가 tv드라마로 방영 되었다. 솔직히 말해 이 드라마를 접하기 전까지는 나도 ‘우씨왕후’ 라는 인물을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고구려 시기 기록이 많지도 않은데 어떻게 드라마를 만들었을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삼국사기'에 우씨왕후에 대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 덕분에,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왕을 선택 하고 권력을 쥔 우씨왕후라는 독특한 여성 캐릭터가 역사 속 에서 재조명되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서기 197년, 9대 고국천왕이 후사 없이 승하한다. 그런데 우씨는 왕의 죽음을 즉시 알리지 않고 조용히 왕의 아우 '발기'를 찾아 간다.(이름 때문에 웃었지만, 그 이름 너머의 역사적 맥락이 더 흥미롭다.)
하지만 '고발기'는 야심이 있었던 듯, 야밤에 찾아온 형수를 무시 하고 문전박대한다. 이에 우씨는 또 다른 왕제인 '연우'를 찾아간다. '고연우'는 예를 갖춰 우씨를 맞이 했고, 우씨는 그에 대한 호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그를 후계자로 지목하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이 장면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이 와중에 우씨를 대접하던 연우가 고기를 썰다가 칼에 베이자, 우씨가 치마끈을 풀어 상처를 감싸주었고,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이 장면은 상징적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동침을 암시하는 표현이 아니냐는 해석도 가능 하지만, 중요한 건 여기서 우씨가 주도권을 쥐고 왕위를 설계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발기에게 끝까지 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점이다. 당시 왕의 서거를 함부로 언급하는 것은 곧 자신과 집안 전체 목숨을 거는 일이었기에, 발기에 대한 경계는 오히려 정당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적 계산이 앞선 우씨 선택은 결국 연우를 왕위에 올리는 데 성공 했고, 그가 바로 고구려 제10대 왕 '산상왕'이다.
왕위를 빼앗긴 '고발기'는 분노해 중국 동북방의 군벌 '공손도'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공손도는 3만 병력을 보내주고, 발기는 이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한다.
이 사건이 바로 ‘고발기의 난’ 이다.
당시 중국은 조조, 유비, 손권이 활약하던 삼국시대였고, 고구려는 외세와의 접경에서 긴장감을 유지 해야 하던 시기였다. 발기의 난은 고구려를 큰 위기에 빠뜨렸지만, 산상왕의 동생 '고계수'가 이를 진압하고 발기는 자결한다.
후일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해 고구려를 공격 했던 사건과도 맥을 같이한다.
고발기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른 '산상왕'은 그를 왕으로 만든 우씨 공을 인정해 다시 왕후로 맞이 한다.
이렇게 우씨는 두 왕의 왕비, 그것도 한 명은 직접 선택하고 즉위시킨 왕의 왕후가 된 독보적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산상왕과도 자식이 없었던 우씨는 결국 후비를 들이게 했고, 이 후비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제11대 '동천왕'이다.
우씨왕후는 동천왕 7년(추정나이 약 70세)에 사망했다.
고대 기준으로 상당한 장수였다.
'삼국사기'는 우씨왕후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씨왕후는 고국천왕 사망 이후 에도 정사를 돌보고, 자선사업과 빈민구제 활동을 펼쳤다.
'진대법' 같은 사회복지 제도에도 앞장섰고, '을파소'와 함께 이를 주도한 인물로 평가된다.
하지만 조선시대, 성리학적 질서 가 강조되던 시기에는 우씨왕후 에 대한 비난이 심했다.
'동국통감'에서는 우씨왕후 행동 을 인륜을 저버린 악행으로 간주 하며 모욕적인 표현을 쓰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삼국사기'에도 우씨왕후 심경이 담긴 유언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내가 행실이 바르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왕'(고국천왕)을 보겠는가.
만약 신하들이 차마 내 시신을 도랑에 버리지 못하겠거든, 산상왕릉 곁에 묻어달라.”
이는 당시에도 정절이나 도덕적 비난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무당을 통한 국양왕의 '현몽' 이야기도 있다.
고국천왕이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 분노해 싸웠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그 시대의 민간 신앙과 문화가 왕실의 정통성 담론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우씨 왕후는 한국사에서 유일하게 두 명의 왕을 남편으로 둔 왕비 였고, 그중 한 명은 자신이 왕위에 올린 인물이었다. 고구려사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아니 세계사를 살펴봐도 매우 독특하고도 인상적인 여성 인물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씨왕후가 오늘날까지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조선시대 들어와서 성리학적 세계관에서는 전혀 맞지않는 여성이어서 였을 것이다.
'우씨왕후'가 TV드라마로도 제작 되는 것을 보니 이제야 제대로 조명받을 시점이 온 것일지도 모른다.
―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