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24

고국천왕과 을파소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24

― 고국천왕과 을파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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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사회적 일은 혼자서 해낼 수 없습니다.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소통’과 ‘협력’이라는 '사회성' 입니다.


특히 정치영역에서는 더욱 그러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라고 해도 훌륭한 조력자 없이는 큰 성과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최고지도자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인재를 알아보고 중용하는 능력, 그리고 그 인재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잘못된 인재 등용은 나라를 망하게 했고, 훌륭한 인재와 만남은 국가명운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잘못된 인사로 나라를 말아먹은 현대 들어서 예를 하나들자면 <'이승만'과 '이기붕'의 관계>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인사'는 국정운영 핵심이며, 그 중요성은 두 말 할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아주 잘 된 인재등용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고국천왕과 을파소>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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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천왕', 인사의 중요성을 통찰하다.>


서기 191년 4월, 고국천왕은 무명이던 '을파소'를 발탁하여 '중외대부'(현재 부총리급 )로 임명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한다.


"과인이 외람되이 선왕의 대업을 이어받아 신하와 백성의 위에 있으나, 덕이 부족하고 재주가 모자라 아직 백성을 다스림에 구제하지 못하였소. 선생은 능력을 숨기고 지혜를 감춘 채 재야에 있은 지 오래 되었소. 이제 나를 버리지 않고 찾아오니, 이는 나의 기쁨일 뿐 아니라 사직과 백성의 복이오. 가르침을 받기를 청하니 공은 마음을 다하기 바라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천왕 편 ㅡ


고국천왕은 왕위에 오른 초기부터 내부귀족 세력 간 갈등에 많이 시달렸다.


특히 왕비족 '연나부' 세력 전횡이 극심했다.


190년 9월, 연나부 출신인 우씨왕후 친척 ‘어비류’와 ‘좌가려’ 등이 권력 장악하고, 자식들까지 남의 재산을 약탈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고국천왕이 이들을 제거 하려 하자, 좌가려는 191년 4월 반란을 일으켜 국내성을 공격 했다.


이 사태를 가까스로 진압한 고국천왕은 혼란의 원인을 부적절한 인사에서 찾고, 귀족들에게 다음 과 같은 명을 내린다.


"요즘 관직이 사사로운 인연으로 주어지고, 덕과 능력으로는 등용되지 못하니 그 피해가 백성에게 미치고 왕실까지 흔들리고 있다. 이는 과인이 현명하지 못한 탓이다. 이제 각 부는 어질고 유능한 인물을 천거하라."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천왕 편 ㅡ


이에 동부에서는 ‘안류’라는 인물이 천거되었으나, 안류는 자신이 부족하다며 대신 농사를 짓고 있던' 을파소'를 추천했다. 을파소는 고국천왕의 총애를 받아 곧 '중외대부'에 이어 '국상'(현 국무총리 급)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왕실과 조정신하들은 신진 세력인 '을파소'를 시기하고 미워 했다. 이에 고국천왕은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멸족시키겠다”는 교서까지 내릴 정도로 그를 신임하며 강력히 뒷받침했다.


을파소는 정치에 임하며 상벌을 공정히 하고 백성의 삶을 돌보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을파소의 재상으로서의 명성은 특히 ‘진대법(賑貸法)’ 실시로 더욱 빛났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진대법을 을파소가 건의했다는 직접 기록은 없다. 다만, 그가 국상의 지위에 있을 때 진대법이 시행되었고, 농사를 짓던 경험을 바탕으로 백성의 어려움을 잘 알았기에 고국천왕에게 건의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고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고국천왕이 194년 사냥 중 한 백성이 “흉년으로 품팔이를 하지 못해 어머니를 봉양할 수 없다”고 하소연하자, 옷과 식량을 하사 하고 백성구제를 위해 '진대법'을 시행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진대법은 고국천왕이 제안했을 수도 있고, 을파소와 함께 논의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고국천왕과 을파소 두 사람 문제의식이 일치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고국천왕은 을파소 발탁 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간략히 살펴 본다.


1. 황건적의 난 등으로 중국에서 유입된 유민들을 수용하여 국가의 인력을 보강했다


2. 요동태수의 침략을 직접 진압하여 군사적 지도력을 입증했다.


3. 중앙집권 강화를 위한 제도 정비와 인사개혁을 단행했다


4. 진대법 등 백성안정 정책시행 등은 고구려가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기록에 따르면 고국천왕 체격 또한 비범했다. 키가 9척(약 207cm)에 달하고, 큰 솥을 들 수 있을 만큼 힘이 셌다고 전한다. 당시 고구려에서 이러한 신체 조건은 ‘장사(壯士)’로 여겨졌다.


그런데 '고국천왕'은 이상하게도 진수가 쓴 <삼국지위서동이전> 에서는 아예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이를 두고 일제 식민사관 학자들은 고국천왕 실존 부정설을 제기했지만, 현재 전혀 인정되지 않는 낭설이다.


고국천왕은 분명 존재했고, 그의 치세는 기록상 고구려 중앙집권화 전환점이었으며, 훌륭한 인재인 '을파소'를 발탁해 국정을 안정 시키고 개혁을 이끈 탁월한 군주 였다.


을파소는 고국천왕 사후에도 국상 으로 남아 '산상왕' 7년(203)에 세상을 떠난다. 그가 죽었을 때

온 백성들이 슬피 울었다고 할 정도로 큰 존경을 받았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을파소'를 이렇게 평가한다.


<지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여 정치와 교화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중앙과 지방이 조용하였다.>


고구려 역사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손꼽히는 명재상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국천왕과 을파소의 만남은 단순한 인사발탁이 아닌, 국가 개혁과 안정, 발전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 두 사람의 통찰과 실행력은 고구려가 단순한 부족연합체에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고, 후대에도 귀감되는 정치적 리더십 사례로 남았다.


이어서 백제 초기의 상황이 계속됩니다.


―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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