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초기 역사와 ‘고이왕’ 2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26
― 백제초기 역사와 ‘고이왕’ 2 ㅡ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왕'에 의해 한반도 중남서부 지역에서 건국된 고대왕국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고대국가’ 체계 갖추게 된 것은 건국 후 약 300년 지나 8대 '고이왕' (234~286년) 시기부터이다.
이 때문에 '삼국지위서동이전' 이나 '일본서기' 같은 사서들에서 백제건국 시점을 서기3~4세기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완성된 고대국가로서의 백제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일 뿐, 건국 자체는 기원전 18년이 정확하다.
실제로 고이왕 시기를 기점으로 백제는 제도, 정치, 외교 등 여러 측면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 하며 고대국가로 도약하게 된다.
그 중심에는 다음과 같은 고이왕 업적들이 있다.
1. 율령 반포: 법과 제도로 국가 체제 정비
고이왕은 백제 역사상 최초로 '율령'(법률과 제도)을 반포했다. 이는 국가의 정치체제를 정비하고 통치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조치 였다. 이로 인해 백제는 체계적인 관료조직을 갖추었고, 중앙집권 체제가 강화되면서 왕권이 대폭 강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정치· 사회적 안정에도 크게 기여했다.
2. 관등제와 관복제 도입: 귀족 통제와 위계 확립
고이왕은 '관등제'를 도입하여 관리들 계급을 구분하고, 관직 체계를 정비했다. 이를 통해 중앙 권력을 강화하고 귀족들을 효율적 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관등제는 귀족들을 일정한 서열에 따라 정렬시키고,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하게 했다.
즉위 초기에는 ‘좌장’(현 총리급) 설치하여 지방 족장들 군사력을 약화시키며 왕권을 강화했다.
서기 260년 에는 기존 좌·우보 체제를 개혁하여 6좌평 제도를 마련하고, 관등을 16품계로 세분화하였다.
또한, 관등에 따라 '공복'(관복 색상)을 자색·비색·청색으로 나누고, 왕과 귀족 복식규정을 정하는 등 시각적으로 위계질서를 체계화했다. 이러한 제도개혁은 백제가 부족연맹체를 벗어나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3. 영토확장과 외교전략
고이왕은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영토를 확장하며, 고구려와 중국세력 영향을 차단하였다. 이로 인해 백제는 경제적으로도 성장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특히, 충청남도 천안 일대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마한 중심국가 '목지국'(目支國)을 압도하고, 마한 전체에 대한 실질적인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또한 남옥저 일부를 점령하고, 동예와는 우호 관계를 조성했다.
더불어 낙랑군·대방군과 혼인동맹 체결하며 정치적 관계를 구축했다 중국 '서진'(西晉)과 외교관계를 맺는 등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했다.
4. 중앙집권체제 강화
고이왕은 정치·군사개혁을 통해 지방세력 힘을 약화시키고, 중앙정부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지방분권적 성격이 강했던 초기 백제는 이 시기를 거치며 정치적 안정과 체계화를 이룰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과 체제 정비를 바탕 으로, 백제는 고대국가로서 토대 마련하였고, 이후 발전과 번영을 이어갈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고고학적 시각에 따르면, 백제 한성시대의 핵심유적 풍납토성도 고이왕 재위시기에 최초로 축조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고이왕 생애에 대해 '삼국사기'에 기록된 연표는 현실적으로 신빙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이왕은 5대 '개루왕'(128~166년)아들 이며, 234년에 즉위하여 286년 사망했다. 그렇다면, 개루왕 사망 직후 태어났다고 해도 67세 즉위, 재위 52년, 사망시점은 120세를 넘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는 고구려 '장수왕' 보다도 더 긴 수명으로, 현재도 세계최고 고령 으로 드물게 보이는데, 당시로서 도저히 인정받기 어려운 연령대 이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고이왕이 '개루왕' 직계 아들이 아니라,
6대 '초고왕' 조카나 초고왕 아들 이라는 설도 제기된다. 이 경우 고이왕 연령이 약 40세가량 줄어 들게 되어, 52년 재위도 충분히 현실적인 수명 범위 안에 들어 오게 된다.
이처럼 '삼국사기' 기록이 부정확 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연대 오류가 생긴 원인으로는, 백제 자국 역사서 '서기'(書記) 존재와 그것 영향이 거론된다.
백제는 13대 근초고왕 (346~ 375년) 시기에 전성기 맞이하며, 고구려 '고국원왕' 전사시킬 만큼 강대해졌다. 이 시기 백제는 자국 역사서인 '서기'를 '고흥'에게 편찬 하게 하였다.
이 고흥이 저술한 백제역사서인 '서기'는 고대국가로서 체제를 갖춘 시점을 고구려와 맞추기 위해 고이왕 생몰년을 무리하게 조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당시 남아 있던 '서기' 기록을 임의로 수정하지 못하고 그대로 옮겼을 것이라는 것이 현재 학계 에서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다.
김부식이 고이왕 생몰년도가 비현실적이란 사실을 몰랐을 리 없지만, 당시 백제 공식기록을 존중하고자 그대로 기술했을 것 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같이 역사기록이 반드시 진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고려사'는 조선건국 이후에 편찬되었기에 고려말기 역사가 이성계 집권세력에 유리 하게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왕조실록' 역시 반정이나 정권교체가 있을 때 수정실록이 작성되었다는 점에 기록 객관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현대사에서도 '이승만' 평가는 시대와 정치상황에 따라 엇갈리고 있으며, 박정희의 5·16은 ‘혁명’ 에서 ‘쿠데타’로, 전두환 정권 ‘5공비사’는 자기합리화로 가득 차 있다가 결국 쿠데타 세력으로 단죄되고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역사는 승리자 기록’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삼국시대 각국 역사서인 <고구려 유기·신집>, <백제 서기>, <신라 국사> 역시 삼국 각국이 전성기에 자국 위상을 높이기 위해 편찬 되었다. 당연히 자국중심 서술 이었을 것이다.
고이왕 생몰년을 두고 보면, 단순한 연대기보다도 그 시대으 맥락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해가 된다.
역사서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살피고, 기록 간 교차검증, 그리고 기록의 '틈' 까지도 주의 깊게 고려해 추정해 나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글이 길어지긴 하지만, 참고용으로 <삼국사기 고이왕 본기> 원문기록을 아래에 정리해 본다.
<삼국사기 고이왕 본기 편 원문 요약>
1년: 고이왕이 즉위하다.
3년 겨울 10월: 서해에서 사냥하다.
5년 봄 1월: 악기를 사용하여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다.
5년 봄 2월: 부산에서 사냥하다.
5년 여름 4월: 왕궁 문기둥에 벼락이 치다.
6년 봄 1월~5월: 가뭄이 이어지다 5월에 비가 내리다.
7년: 군사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다.
7년 여름 4월: 진충을 좌장으로 임명하다.
7년 가을 7월: 석천에서 군사를 사열하다.
9년 봄 2월: 남쪽의 소택지에 논을 개간하다.
9년 여름 4월: 숙부 질을 우보에 임명하다.
9년 가을 7월: 서문 밖에서 활쏘기를 구경하다.
10년 봄 1월: 큰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다.
13년 여름: 심한 가뭄으로 보리가 죽다.
13년 가을 8월: 낙랑의 변방을 공격해 주민들을 포로로 잡다.
14년 봄 1월: 남쪽 제단에서 제사지내다.
14년 봄 2월: 진물을 좌장으로 임명하다.
15년: 봄과 여름 가뭄이 들어 창고를 풀어 백성을 구제하다.
16년 봄 1월: 태백성이 달을 덮다.
22년 가을 9월: 신라와 괴곡의 서쪽에서 싸워 승리하다.
22년 겨울 10월: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다.
24년 봄 1월: 큰 가뭄이 들다.
25년: 말갈 추장 나갈이 말을 헌상하다.
26년 가을 9월: 길조로 여겨지는 구름이 왕궁 동쪽 하늘에 나타나다.
27년 봄: 육좌평 제도를 설치하고 관직을 나누다. 품계에 따른 관복을 제정하다.
27년 봄 3월: 동생 우수를 내신좌평에 임명하다.
28년 봄 1월 1일: 남당에 앉아 정무를 집행하다.
28년 봄 2~3월: 진가를 내두좌평에 임명하고 다른 좌평들도 함께 임명.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 요청.
29년 봄 1월: 부정부패 관리들을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리다.
33년 가을 8월: 신라의 봉산성을 다시 공격하다.
36년 가을 9월: 혜성이 자미궁 성좌에 나타나다.
39년 겨울 11월: 신라를 공격하다.
45년 겨울 10월: 신라의 괴곡성을 포위하다.
50년 가을 9월: 신라 변경을 공격하다.
53년 봄 1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다.
53년 겨울 11월: 고이왕이 붕어하다.
고이왕의 재위 기간 동안 나타난 사건들을 보면,
정치·외교·군사·자연현상 등 다양한 측면에서의 변화가 매우 뚜렷하다.
이처럼 원문기록은 단순히 나열된 연표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시대 상황을 해석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어서 <신라초기 상황 편>이 계속됩니다.
– 초롱박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