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최고전성기 근초고왕 1 (근초고왕 직전 왕들)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40
ㅡ 백제최고전성기 근초고왕 1 ㅡ
(근초고왕 직전 왕들)
삼국 각 나라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는 모두 한강유역을 차지했을 때였다. 따라서 한강유역을 가장 먼저 확보한 '백제'가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백제는 건국 후 약 300년이 지난 제8대 고이왕(재위 234~286) 때에 이르러서야 고대국가로서의 체계를 완비하였다.
(이는 앞서 다룬 백제초기 편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그 뒤로 제9대 책계왕 → 제10대 분서왕 → 제11대 비류왕 → 제12대 계왕, 그리고 오늘 주인공 제13대 '근초고왕'으로 이어진다.
근초고왕 때 백제는 최고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고이왕 이후 근초고왕 이전의 네 왕, 즉 <책계왕·분서왕·비류왕·계왕> 중 ‘비류왕’ 이름은 들어봤을지라도, 나머지 세 왕 이름은 낯설 것이다. 나 역시 이번 글을 쓰며 처음 접한 왕들이 많다. '삼국사기'에는 이들에 대한 기록이 있긴 하지만, 후대에 기억될 만큼의 대사(大事) 남기지 못했다.
그래도 간략히 나마 살펴보고 넘어가자.
1. 제9대 책계왕 — 대방군과의 인연
“대방은 우리 장인의 나라이다. 그 요청을 돕지 않을 수 없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ㅡ
이 기록은 제9대 '책계왕'과 관련된 것이다. 책계왕은 '고이왕'의 장남으로, 체격이 크고 의지가 굳세었다고 전한다.
‘장인의 나라’라 한 이유는, 대방군 왕의 딸 ‘보과’를 왕비로 맞이했기 때문이다. 대방군이 고구려 침략받자 책계왕은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고,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와 백제가 처음으로 맞붙은 기록이다.
이 사건 이후 양국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7년 후인 315년,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과 대방군 멸망시키며 두 나라는 국경을 맞대게 된다. 이때부터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는 더욱 험악 해졌다.
한편, 고이왕과 책계왕 시대에 백제가 요동·요서 등 중국 대륙을 경영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남은 책계왕 기록은 고작 5 줄뿐이다.
'비류백제 대륙경영설'을 믿는 일부학자들은 '책계왕'이 대륙에 머무르며 전쟁을 치렀다는 삼국사기 이전 일부 다른 기록이 있음에도 '비류백제대륙경영설'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김부식과 삼국사기 저자들은 '삼국사기' 기록에서는 이런 기록을 아예 뺐다고 주장한다
2. 제10대 분서왕 — 낙랑 자객에게 피살되다
책계왕 장남인 분서왕은 총명하고 아버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재위 기간 6년 남짓 동안의 기록은 다음 한 줄에 불과하다.
“분서왕 7년(304) 봄 2월, 몰래 병사를 보내 낙랑의 서현을 습격해 빼앗았다. 겨울 10월,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사망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ㅡ
왕이 자객에게 피살당한 중대한 사건임에도 그 이후 대응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이 때문에 ‘분서왕 피살 배후설’, 즉 비류왕 측의 암살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3. 제11대 비류왕 — 수수께끼의 왕
분서왕이 죽자 아들 '계'(契)가 어렸기 때문에 신하들 추대로 비류가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는 '비류왕'이 활을 잘 쏘고 성품이 너그러웠다고 전한다.
문제는 그의 출신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비류왕은 '구수왕' 둘째 아들이자 '사반왕' 동생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구수왕이 234년에 죽었고, 비류왕은 304년에 즉위하여 344년에 죽었다.
이 계산대로 라면 비류왕이 110세까지 살았다는 뜻이 되며 형 사반왕과 나이 차도 70년이 넘는다.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기록이다.
결국 '삼국사기'는 단순한 계산 착오가 아니라 당시 백제사 자료 혼선을 그대로 옮긴 결과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또한 고이왕 → 책계왕 → 분서왕으로 이어지던 고이왕계 왕통이 비류왕 때 돌연 구수왕계로 바뀌었다는 점도 특이하다.
그러나 비류왕이 죽은 뒤에는 다시 분서왕 아들 '계왕'이 즉위하면서 왕통이 다시 고이왕계로 돌아간다.
이처럼 백제 왕위계승은 복잡하고 상식적이지 않다. 겉보기엔 평화로운 계승 같지만, 그 이면에 왕위쟁탈 피바람이 있었을 가능성 높다.
원삼국시대 때 이러한 상식밖의 기록들은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 신라 삼국이 거의 다 마찬가지였다.
특히 현존하는 백제기록이 얼마나 부실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는 곧 정리할 백제 최고전성기를 이끈 명군임에도 재위기간 2/3에 가까운 시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는 '근초고왕'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근초고왕 업적은 삼국사기 보다 중국기록과 일본기록에 더 자세히 나오고 있다. 백제멸망 이후 수 백 년 이후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 한계를 볼 수 있다.
우리가 '비류'란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백제 시조 중 한 명 '비류'와 '비류백제대륙경영설' 때문이다.
앞서 말한 '비류백제대륙경영설'은 백제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대륙까지 세력을 확장하고 경영했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비류백제대륙경영설'은 역사적 증거가 부족하여 학계에서는 신중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다수설은 백제와 중국 동부지역 간 교류는 인정되나 그것이 백제가 대륙을 직접 경영했다는 증거는 충분하지 않으며, 고고학적 증거도 거의 없고 여러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론적인 가설로만 남아 있다.
'환단고기' 같은 류 역사서를 철썩같이 믿는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하는 주류 역사학자들을 일제식민사관에 철처히 물든 사람들로 몰아치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주관적 주장이 아닌 사료와 고고학적 유적 등 실질적 증거가 필요한 학문이어야 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왕 호칭은 '비류왕'으로 해놓고 비류왕 시기에 대륙과 관련된 기록은
물론 분서왕까지 혼인관계를 맺던
대방에 대한 기록도 없다는 것이다.
굳이 대륙뿐만아니라 비류왕 시기 40년 간이나 전쟁, 외교와 관련된 기록이 거의 없다. 천재지변, 반란, 사냥, 선정에 대한기록만이 전해진다.
비류왕 시기 비교적 큰 사건은 '우복의 반란' 정도이다.
그 마저도 토벌 되었다.
당시 동아시아는 격변기로 중국은 '오호십육국'시대 극심한 혼란기에
접어들었고 고구려는 미천왕이 낙랑군을
313년에 멸망 시켰다.
314년에 대방군도 고구려에 의해 축출 당하면서 고구려가 백제 북부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4. 제12대 계왕 — 의문 속의 짧은 재위
비류왕 사후, 분서왕 장남 '계왕'이 즉위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단 두 줄만이 전한다.
“1년 겨울 10월 계왕이 즉위하다.
3년 가을 9월 계왕이 죽다.”
계왕의 재위는 2년 남짓이었다.
이에 따라 ‘계왕가공설’(존재하지 않는 인물로 끼워 넣었다는 설)이나 ‘비류계에 의한 시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어쨌든 계왕이 죽고 비류왕 둘째 아들 '근초고왕'이 즉위함으로써 고이왕계는 완전히 단절되고 이후 백제 왕위는 근초고왕 후손 들로 이어지게 된다.
제13대 근초고왕의 등장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체격이 크고 용모가 뛰어나며, 식견이 넓었다.”
ㅡ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조 ㅡ
이 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근초고왕 기록은 이후 백제 전성기를 이끌 군주의 업적으로 이어진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루겠다.
– 초롱박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