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41

백제최고전성기 근초고왕 2 ㅡ‘일본서기’ 기록과 관련하여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41

ㅡ 백제최고전성기 근초고왕 2 ㅡ (‘일본서기’ 기록과 관련하여)


“근초고왕은 비류왕 둘째 아들이다. 체격이 크고 용모가 비범하였으며 식견이 넓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조 첫머리 ㅡ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백제 제13대 왕으로 출생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346년에 즉위하여 375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백제 최전성기를 이끈 정복군주로 평가받는다.


1. 백제의 정복군주, 그러나 다른 길


백제 근초고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 신라 진흥왕과 함께 삼국 영토 확장기 군주로 꼽힌다. 그러나 그 치세 양상은 사뭇 다르다.


광개토대왕은 즉위 직후인 18세 때부터 정복 전쟁에 나서 백제 10성을 점령하는 등,

전 생애를 전쟁으로 보낸 정복군주였다.


진흥왕 역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이르러 영토를 즉위 당시 두세 배로 넓혔다.


반면 근초고왕은 즉위 후 약 20년 간은 내실 다지며 힘을 비축했다. 이후 재위 후반에 이르러서야 정복에 나서는데, 이 점에서 그의 통치는 매우 계획적이고 전략적이었다. '삼국사기'에서 “식견이 넓었다”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근초고왕은 치밀한 국제 정세분석과 외교 조율을 통해 최소한 전력 소모로 백제 패권을 단숨에 확립한 군주였던 것이다. 그는 실로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전략가였다.


2. 침묵의 20년, 일본서기에 남은 기록


특이하게도 '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 재위 2년부터 21년까지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그의 치세 초중기 국정 운영을 직접 알 수는 없다. 그 시기 백제에 관한 기록은 오히려 일본 측 사서 '일본서기' (日本書紀)에 다수 남아 있다.


3. '일본서기' 성격과 한계


'일본서기'는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로 720년 '도넬리친왕'이 '덴무천황' 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중국식 한문체로 쓰였지만 일본식 표현이 섞여 있다.


이 사서 특징은 제15대 '오진천황' 어머니 ‘진구황후'(神功皇后, 신공황후) 시기부터 제29대 '긴 메이천황 '시기까지 기사에 다량의 백제사료가 인용되어 있다는 점이다.


‘백제삼서'(百濟三書)라 불리는 '백제기'(百濟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백제본기'(百濟本記)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따라 근초고왕 시대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 등 백제인물이나 가야 관련 기록이 오히려 '일본서기'에 더 자세히 남아 있다.


실제로 '일본서기' 531년 기사 에는 일본 내 사건임에도 '백제본기'를 직접 인용한 대목이 있다. 이는 당시 일본이 백제사료에 상당히 의존했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일본은 5~6세기에 이르러서야 한자를 본격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그 이전 기록은 대부분 구전에 의한 전승이다.

즉, 문자 기록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 사건을 신화나 전설처럼 기록한 셈이다. 따라서 '일본서기' 초기 기사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신화적·선전적 성격이 강하다.


또한 이 사서는 8세기 일본왕실 권위를 높이기 위한 정치적 목적 아래 편찬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과장과 조작이 들어갔다.


삼국과 관계 역시 왜곡되어 일본 중심으로 서술된 부분이 많다.컨대 실제로 백제가 주도한 외교나 전쟁을 일본의 공적처럼 서술하거나 한반도 왕국들을 일본 속국으로 묘사하는 ‘주체변조' (主體變造) 사례가 다수 확인 된다.


요컨대 '일본서기'는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동시대 중국 사서 및 고고학 자료와 '교차검증'을 통해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4. ‘임나일본부설’과 '근초고왕'


'일본서기' 진구황후 49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탁순국에 군대를 모아 신라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비자발, 남가라,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등 7국을 평정하였다.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회합하였다. 다섯 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 '일본서기' 진구황후 49년 3 월조 ㅡ


이 기사는 일본 측 ‘임나일본부설’ 핵심 근거로 오랫동안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한국 사학자 천관우, 이도학, 이희진, 김현구 등은 이 정벌 주체가 일본이 아니라 백제 근초고왕 이었다는 ‘주체교체론’을 제시했다. 즉, '진구황후' 업적이기보다 실제로 '근초고왕' 남방원정을 왜곡하여 옮겨 적은 것이라는 해석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근초고왕은 369년 사백·개로를 대표로 '탁순국'에 보내고 장군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에게 군사를 이끌게 했다. 이는 신라와 가야 지역 7국을 연합시켜 백제 중심 '남방 연합체'를 형성한 사건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의 “신라를 격파했다”는 표현은 백제가 한 일을 빗댄 것으로 과장된 것이다.


이후 중국 남조의 '양직공도' (梁職貢圖)에도 가야 소국들이 백제 부용국으로 기록되어 있어 백제 영향력이 확인된다.


5. '칠지도'(七支刀)와 백제–왜 관계


‘진구황후' 52년조에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칠지도'(七支刀)와 '칠자경'(七子鏡)을 바쳤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 칠지도 명문에는 '일본서기' 내용과 전혀 다른 문장이 새겨져 있다.


〈앞면〉


“태△ 4년 5월 16일 병오일, 한낮에 백 번 단련한 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백 병을 물리칠 만하니 제후국 왕에게 하사할 만하다.”


〈뒷면〉


“이전에는 이런 칼이 없었다.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특별히 왜왕 지(旨)를 위하여 만들어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즉, 칠지도는 백제가 왜에 ‘조공’ 한 것이 아니라 백제 왕세자가 주도적으로 만들어 왜에 ‘하사’ 한 것이다. 명문의 문체는 백제가 상위, 왜가 하위 관계임을 분명히 암시한다.


따라서 '일본서기' 해당 기사는 역사적 사실을 뒤집은 기록으로 평가된다. 이 점에서 근초고왕 업적이 ‘진구황후’라는 가공인물 이름으로 대체되었다는 의심이 유력하다.


다만 근초고왕 재위 연대와 칠지도 제작 시점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일부 연구자(연민수, 홍성화, 조경철 등)는 칠지도가 근초고왕 사후인 408년(전지왕 4년)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제시한다.

결국 이는 여전히 추정의 영역에 머문다.


6. 교류, 그러나 불확실한 '정복설'


근초고왕 규슈 진출설은 한때 ‘임나일본부설’ 반론으로 제시되었으나 현재로선 근거가 부족한 가설로 평가된다. 다만 4세기 후반 일본 북부 규슈지역에서 백제계 유물(호壺 등)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양국 간 교류 가 활발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 외교적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근초고왕 역할은 분명 작지 않다.


7. '일본서기' 해석 이중성


한국에서는 한편으로 '일본서기' 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안 ‘왕인' 박사 일본 건너감 이나 ‘불교전래’ 기록 은 사실로 받아들이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왕인에 대한 기록 역시 국내사서에는 존재하지 않고,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만 등장한다. 이에 따라 현대 '한국고대사학회' 는 ‘일본서기’에 대한 한국 이중적 해석 문제를 학문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다.


8. 맺음말


결국 '일본서기' 속 ‘진구황후' 남정(南征) 기사와 ‘칠지도’ 기록 은 모두 근초고왕과 백제 실제 외교·군사 활동을 왜곡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속에 남아 있는 단편적 기록들은 백제가 동아시아 외교무대의 주역으로 활약했음을 반증한다.


다음 편에서는 근초고왕의 또 다른 업적, ‘근초고왕 주요 업적’을 다룬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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