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75

삼국통일의 시대 20 ㅡ백제 편 2- '의자왕'은 '암군'였을까? 1)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75

ㅡ 삼국통일의 시대 20 ㅡ

(백제 편 2- '의자왕'은 '암군'였을까? 1)


백제의 마지막 군주 의자왕은 우리에게 ‘폭군’, ‘암군’, 그리고 ‘3000 궁녀’라는 상징적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념은 정작 사료적 근거가 매우 빈약하며, 후대 도덕주의와 정치적 해석이 덧씌워진 결과라는 점에서 역사학적 재검토가 필요한 지점이다.


1. 사료가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의자왕 ‘친위쿠데타’나 ‘서자 41명’ 이야기는 '일본서기'에만 등장한다. 삼천궁녀나 낙화암 이야기는 그 어떤 사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들이 전하는 정황은 극적이지만, 국내사료인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 어디에도 해당 사건을 확인할 수 없다.


'일본서기'는 백제와 동맹 관계였던 왜국 시각을 반영하며, 고대 일본 왕권강화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목적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단독사료로서 신뢰도는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유교적 도덕주의는 군주 타락을 국가 멸망 원인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했으며, 의자왕은 그 서사의 적절한 대상으로 소비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이미지가 근대·현대 교육과 대중문화까지 이어지며 ‘역사적 사실’처럼 굳어진 것이다.


2. 초기 의자왕 통치에 대한 사료의 일관된 긍정 평가


흥미로운 점은 초기 의자왕을 기록한 동아시아 사료들은 거의 모두 호의적이라는 사실이다.


김부식 '삼국사기'를 보면,


[의자왕 청년시절은 성품이 용맹스럽고 담이 크며 결단력이 있었다. 또한 어버이를 효로써 섬기고 형제와 우애롭게 지냈으므로 중국 대표적 효자 '증자'에 빗대 사람들로부터 '해동증자'로 불릴 정도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이야기는 '삼국사기'등 국내 기록뿐 아니라 중국 측 기록인 '구당서'나 '부여융묘지명'에도


[의자왕을 효행이 깊고, 과단성이 있으며, 성품이 고고했다]


며 의자왕에 대해 아주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 기록들은 서로 다른 정치적 배경을 가진 중국·신라 편찬 사서들이 의자왕 인품을 긍정적으로 기술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의자왕 모계는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신라 '선화공주'라는 설이 있다.(서동설화)


이 설화가 사실이라면 의자왕은 자신이 진정한 백제혈통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신라를 더 심하게 공격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의자왕 집권 초·중반에는 신라 서부 40여 성을 함락하고, '대야성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는 등 백제중흥기에 필적할 군사적 성과를 올렸다. 의자왕이 단순한 무능한 군주였다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대규모 전공이다.


3. 의자왕 말기의 변화와 ‘타락’ 서사


문제는 의자왕 말기다.


'삼국사기'는 657년 좌평 성충이 “술과 궁녀를 멀리하라”라고 간한 기록을 남겼고, 이는 말기 의자왕 기강 해이를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직접 사료다.


그러나 여기서 ‘개인적 방탕이 국가멸망’이라는 도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학술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7세기 중반 백제는 한강 유역 상실 이후 만성적 국력저하와 귀족연립체제 구조적 취약성, 나당연합군이라는 압도적 외부세력 등장이라는 삼중 압박 속에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 제약 속에서 의자왕 개인 판단 오류나 내부 숙청이 있었다 하더라도, 백제 멸망 원인을 오로지 군주의 ‘황음무도’로 환원하는 것은 역사적 설명 능력이 떨어지는 서사다.


4. 의자왕 왜곡된 이미지 형성과 지속


의자왕 패배는 곧 국가멸망으로 이어졌고, 조선후기까지 도덕적 교훈을 강조하는 역사기술 전통 속에서 그의 개인적 타락은 극적으로 과장되었다.


특히 ‘3000 궁녀’, ‘낙화암 전설’ 등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후대 문학적 구성물에 가깝다.


삼국통일 당시 7세기 중반, 한반도 전체 인구는 약 300만 ~5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당시 농업생산력과 생활조건 기반으로 한 학자들 추산이다.


백제는 한강유역을 상실한 후 웅진(공주)과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겼다.


당시 백제영토는 한반도 남서부에 국한되었으며 삼국 중 인구와 영토가 가장 적은 편으로 평가된다. 이에 따라 백제 인구는 삼국 전체 약 20~30%, 즉 60만~1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런 인구에서 3000 궁녀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3000은커녕 300도 안 되었을 것이다.


내 고등시절 수학여행 가서 본 3000 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을 보고 느낀 그 실망감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3000명은커녕 30명도 서 있을 수 없는 아주 좁은 공간밖에 없었다. 백제 궁궐터도 3000 궁녀가 살기에는 터무니없이 적다.


3000 궁녀 이야기는 신라중심 역사관이나, 백제가 패망한 후에 백제를 비판하려는 후대 문학적 또는 정치적 의도로 만들어졌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백제멸망 원인을 의자왕 개인 타락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군주에게 도덕적 교훈을 강조하려는 의도와도 맞닿아 있었다. 이후 조선후기 여러 야사에서 만들어낸 낙화암 투신과 삼천궁녀 이야기 등이 구전으로 널리 퍼졌고, 일제강점기에는 부여를 관광 상품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러한 내용이 더욱 고착화시켰던 것이다.


또한 의자왕이 아들만 50여 명이나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기록되지 않은 딸까지 하면 100명 정도일 수 있다고 본다.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진 고려 왕건을 훌쩍 뛰어넘는다.


하지만 이 숫자 또한 과장된 숫자이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서자 41명 기록은 자기를 따르는 신하들을 가족으로 칭하며 친근하게 부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역사학자 대부분 견해이다.


의자왕!


이처럼 의자왕은 3000 궁녀를 데리고 '황음무도'를 일삼았던 조선시대 연산군을 뛰어넘는 <폭군 겸 암군>으로만 우리에게 알려져 왔다.


의자왕은 백제라는 나라를 멸망시킨 패주로서 아주 그럴듯한 인물로 묘사되어 왔고 우리는 그런 의자왕 이미지를 지금까지 고정관념화하고 있다.

이와 달리 백제유민 사회에서는 의자왕에 대한 인식이 매우 달랐다.


의자왕이 죽은 뒤 200년 후, '견훤'이 후백제를 일으키며 "의자왕의 원수를 갚자!" 구호를 내걸었다. 또한 견훤은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하고 "의자왕 한을 갚았다!"라고 외쳤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의자왕의 원수를 갚겠다”라고 외치며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한 것은, 백제계 주민들에게 의자왕이 ‘폭군’보다는 오히려 ‘비운의 마지막 군주’로 기억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서다.


이러한 것만 봐도 의자왕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의자왕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만큼 지금까지 의자왕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역사기록들을 잘 살펴보면서 의자왕에 대해 새롭게 판단해야 한다.


5. 결론


의자왕에 대한 재평가는 단지 한 왕의 명예회복 목적이 아니다.

역사를 단순한 도덕극이나 패자 교훈으로 소비하던 관점에서 벗어나 사료비판과 구조적 분석 통해 역사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시도이며 이는 오늘 우리가 역사로부터 얻어야 할 성찰 방식이기도 하다.


다음 글에서는 의자왕 말기 정치 상황과 백제 멸망과정을 사료 중심으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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