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의 시대 19 ㅡ(백제 편 1)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74
ㅡ 삼국통일의 시대 19 ㅡ
(백제 편 1)
백제는 고구려에서 시작된 기원을 바탕으로 한반도 서남부에서 강력한 왕국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중국과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문화를 꽃피웠으며,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시기에는 최전성기를 누렸다.
그럼 먼저 백제 중, 후반기 왕들에 관해 알아보겠다.
1) 침류왕(재위: 384년 ~385년)
백제 제15대 왕이자 근구수왕 맏아들이다. 왕위에 오른 해 중국 남조 '동진'에서 온 인도출신 승려 '마라난타'를 통해 불교가 전래되어 백제는 공식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침류왕이 재위 2년 만에 죽었으며, 아들은 너무 어려 왕위를 잇지 못하고 동생 진사왕 이 왕위에 올랐다.
2) 진사왕 (재위: 385 ~ 392년)
근구수왕 둘째 아들이자 침류왕을 이어 즉위한 진사왕은 백제 제15대 왕이다. 그의 치세는 고구려와의 갈등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특히 고구려 광개토대왕 (재위:391~413)과 갈등으로 인해 백제는 큰 위협에 직면했다. 진사왕은 이를 방어하기 위해 백제 군사력을 강화하고 방어태세를 구축하려 했으나, 결국 고구려 공격으로 인해 백제는 어려운 상황에 빠진다.
3) 아신왕 (재위: 392 ~ 405년)
진사왕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신왕은 백제 제16대 왕이다. 아신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 공격으로 백제가 크게 쇠퇴하던 시기에 즉위했다. 고구려 지속적 침공에 시달리던 아신왕은 결국 고구려에 항복해 백제는 일시적 고구려 영향을 받게 된다. 아신왕은 나라 자주성을 회복하려 애썼으나, 외세 압박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해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4) 전지왕 (재위: 405 ~ 420년)
아신왕 뒤를 이은 전지왕은 백제 제17대 왕이다. 전지왕은 고구려 압박 속에서도 나라를 회복하려 노력하였으며, 중국 동진과 외교 관계를 강화하며 백제 국제적 위치를 되찾기 위해 힘썼다. 이로 인해 백제는 문화적, 외교적으로 다시 안정된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다. 특히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기회도 마련되었다.
5) 구이신왕(재위: 420 ~427년)
전지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구이신왕(또는 비유왕)은 백제 제18대 왕이다. 구이신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려 했다. 이 동맹은 신라 '눌지왕'(재위: 417~458)과 우호 관계를 통해 형성되었으며, 삼국 간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구이신왕의 이러한 외교 노력은 백제가 고구려 강력한 압박 속에서도 존속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6) 비유왕(재위: 427 ~ 455년)
구이신왕을 이어 즉위한 비유왕도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을 강화했다. 비유왕 재위 기간 동안 백제는 신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 공동방어를 시도했다. 이는 후대의 백제, 신라 동맹관계 기초가 되었다. 비유왕 시기부터는 백제가 외교와 군사 동맹을 통해 생존전략을 모색하는 모습이 더욱 두드러진다.
7) 개로왕(재위: 455 ~ 475년)
비유왕 뒤를 이은 개로왕은 백제 제20대 왕이다. 개로왕은 백제 자존심을 지키며 고구려와 갈등을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펴며 백제를 지속적으로 압박했고, 개로왕은 고구려 침략으로 인해 수도 '한성'을 고구려에 빼앗기며 전사하고 말았다. 개로왕 죽음은 백제에게 큰 위기였으며, 이후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지금 공주)으로 옮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8) 문주왕(재위: 475 ~ 477년)
개로왕 뒤를 이어 즉위한 문주왕 은 백제 제21대 왕으로, 한성을 잃은 후 웅진으로 천도했다. 수도를 옮긴 문주왕은 나라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국가적 혼란이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백제 귀족세력 간 갈등으로 왕권을 온전히 세우지 못했다. 문주왕은 재위 2년 만에 왕위를 빼앗기고 살해되는 불운을 겪는다.
9) 삼근왕(재위: 477 ~ 479년)
문주왕 뒤를 이어 즉위한 삼근왕 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그 또한 재위 기간이 매우 짧았다.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는 백제 왕권이 여전히 혼란 속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10) 동성왕(재위: 479 ~ 501년)
삼근왕을 이어 동성왕이 즉위하며 백제는 다시금 안정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동성왕은 귀족 세력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집중하였으며, 나아가 신라와 '혼인동맹'을 추진해서 동맹관계도 회복한다. 또한 중국 남조의 '제나라'와 교류를 강화하여 백제는 문물과 외교적으로 활발한 발전을 이루어 백제 재부흥 발판을 마련한다.
[백제는 근초고왕 근구수왕 전성기 이후에도 무령왕과 성왕의 시기에 다시 한번 도약 기회를 맞이한다. 이들은 백제의 문화와 대외교류를 강화하며 나라의 중흥을 이끈다.]
11) 무령왕(재위:501년~523년)
무령왕은 백제를 문화적으로 크게 성장시킨 왕으로, 중국 남조 '양나라'와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힘썼다. 무령왕 무덤은 1971년에 발견되어 당시 백제 찬란한 문화를 오늘날까지 전해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남아 있다.
12) 성왕(재위: 523년~554년)
무령왕 아들로 이름은 명농.
백제의 제26대 왕이다.
즉위 후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겨 안팎의 제도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국호를 '남부여'라 개칭하여 부여족 전통을 강조했다.
중국 양나라 및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일본에는 '노리사치계'를
통해 불교를 전파했으며, 기술 전문가를
파견하여 선진 문물을 전수해 주었다.
그리고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강화하여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유역을 회복했으나
553년 신라의 배반으로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고 백제는 한강유역을 다시 잃고 만다. 성왕 죽음은 백제 중흥이 한계에 부딪혔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이후 백제는 귀족연합체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고 다시 적대관계가 된 신라와의 전쟁에 국력을 낭비하게 되었다.
13) 위덕왕(재위: 554~598년)
성왕 뒤를 이어 즉위한 위덕왕은 백제의 제27대 왕이다. 성왕이 신라와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이후 백제는 큰 혼란에 빠졌으며, 위덕왕은 이러한 위기 속에서 왕권을 유지하며 백제를 재정비하고자 노력했다. 위덕왕은 일본과 외교를 통해 지원을 받으며 백제 국력을 회복하려 하였다. 특히 불교를 장려하며 백성들 결속을 다졌다. 하지만 그의 치세 동안 신라와 전쟁은 지속되었고, 백제는 한강유역을 완전히 잃어버리며 국토가 점점 남쪽으로 밀려나는 상황을 겪게 된다.
14) 혜왕(재위: 598~599년)
위덕왕 뒤를 이은 혜왕은 백제 제28대 왕 이다. 혜왕은 위덕왕 아들이었으나, 그의 치세는 매우 짧았으며, 구체적인 업적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혜왕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사망하였기에, 그의 통치 기간에는 백제에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15) 법왕(재위: 599~600년)
법왕은 백제의 제29대 왕으로, 불교를 장려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즉위 후 백제 사회에 불교를 더욱 널리 퍼뜨리고자 하였으며, 내적으로 불교 중심 통합을 이루려 하였다. 하지만 법왕 치세도 매우 짧아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개혁 의지도 충분히 실현되지 못한 채 끝났다.
[성왕 사후, 백제는 이처럼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시기 백제는 신라와 전쟁에서 밀리며, 고구려와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는다.]
16) 무왕(재위: 600년~641년)
법왕의 뒤를 이어 무왕이 즉위하면서 백제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무왕은 백제 수도를 웅진에서 익산으로 옮기려는 계획을 세웠고, 그 일환으로 익산에 '미륵사'를 건립하며 국력을 과시한다. 무왕은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신라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고,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국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익산 미륵사 건립으로 유명한 무왕은 백제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들 결속을 다지려 했다. 그러나 신라와 전쟁에서는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고, 백제 쇠퇴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무왕은 신라 '선화공주'와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다는 '서동설화'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서동설화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선화공주는 신라 제26대 진평왕 셋째 공주로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서동은 백제 무왕이 즉위하기 전에 마[薯]를 캐어 팔아 이름을 서동이라 했는데, 선화공주 미모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신라 수도로 찾아갔다. 마를 가지고 아이들을 꾀어, 선화공주가 자신과 몰래 정을 통하고 있다는 노래를 지어 부르게 했더니 공주는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길에 서동이 나타나 서로 알게 되고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함께 백제로 가서 서동이 알고 있던 장소에서 황금을 캐어 용화산 사자사에 있던 지명법사(知命法師)의 신통력을 빌어 하룻밤 사이에 신라 왕궁으로 날아갔다. 진평왕은 그 신통력을 이상히 여겨 항상 안부를 물었고, 서동은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백제 무왕이 된다. 무왕이 왕위에 오른 뒤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 (현재의 미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 이에 감동한 무왕 부부는 그 자리에 미륵사를 창건했다]
고 '삼국유사' 등에 전해져 왔다.
미륵사는 동원, 중원, 서원에 각각 하나씩의 탑과 금당이 자리한 독특한 3 원식 가람 구조로 건설되었다. 이는 동아시아에서도 매우 특이한 건축 양식이었으며,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그런데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 서탑의 해체복원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발견이 이루어졌다. 가로 15.5㎝, 세로 10.5㎝, 두께 1.3㎝ 금판에 총 193자 새겨진 '금제사리봉안기' 발견된 것이다.
이 사리봉안기에는 놀랍게도 미륵사 창건주체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왕후 좌평 사택적덕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사리를 봉안한 시기는 기해년 (639년) 정월 29일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 발견은 역사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1400년 동안 믿어왔던 '서동설화'와 '선화공주' 이야기가 허구일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서동이 백제 무왕이 아니고 선화공주도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이 논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무왕은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이어서 의자왕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