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의 시대 18 ㅡ ('김유신'과 '김춘추' 7 - 김유신 2)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73
ㅡ 삼국통일의 시대 18 ㅡ ('김유신'과 '김춘추' 7 - 김유신 2)
젊은 화랑 출신이었던 '김유신'은 군인으로 성장하며 크고 작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입지를 다져 갔다. 그러나 그는 비주류 진골출신이었기에 초기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김유신은 '강감찬'처럼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기만성형’ 인물이었다.
김유신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친 것은 34세 되던 629년(진평왕 51) 고구려와의 전투에서였다. '낭비성' 함락 전투에서 신라가 불리한 상황에서도 홀로 적진에 세 번이나 들어가 적장을 베고 깃대를 가져오며 승리를 이끌었다. 이 일화는 이후 신라 백성과 정치계에 전해지며 그의 존재를 크게 부각했다.
김유신은 혼맥을 통해 '김춘추'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를 김춘추에게 시집보내고, 이후 김춘추의 딸을 김유신에게 시집보내며 두 사람의 인연은 정치적 동반자로 이어졌다. 이 결혼 일화는 우리 학창 시절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유명하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로써 두 사람은 젊은 시절 비주류 진골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넘어 삼국통일 기반을 다졌다.
1. 김유신 군사적 업적과 신라 내 권력
644년(선덕여왕 13) 김유신은 상장군에 임명되어 백제와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군사적 명성을 쌓았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군을 이끌어 백제군을 격퇴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으며, 이런 이유로 그는 백성과 군인들 모두의 존경을 받았다.
647년(선덕여왕 16) 진골 상대등 '비담과 염종의 난'을 진압하며 김유신은 대장군에 올랐다. 당시 신라 실제권력은 상대등 김춘추와 대장군 김유신 에게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648년 김춘추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은 뒤, 김유신은 백제 '대야성'을 탈환하고 12성을 함락시키는 등 큰 전공을 세워 '상주행 군대총관'으로 승진했다. 이후 신라 방어와 공세를 주도하며 군권을 장악했다.
2. 김유신의 삼국통일 전쟁
654년 진덕여왕 사망 후,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면서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는 김유신과 긴밀히 협력했다.
660년 '나당연합군'을 이끌고 백제정벌에 나선 김유신은 '황산벌'에서 '계백장군'과 맞서 싸웠다. 어린 화랑 그 유명한 '관창'을 희생시키며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사비성'을 함락시키며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 공로로 김유신은 '대각 간' 직위를 얻었다.
고구려 정벌에서는 고령으로 직접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군사와 군량 지원을 주도했다. 고구려 멸망(668년) 후 삼국통일 기반을 다진 공로로 그는 신라 최초로 ‘태대각간’에 봉해졌다.
3. 김유신의 당나라 견제와 신라 자존심
김유신은 나당연합군 과정에서 당나라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며 당의 회유를 단호히 거절했다. 심지어 백제인을 가장한 신라군으로 당을 공격하는 것을 제안하는 등 신라군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려 했다. 이는 삼국통일 후에도 당나라가 신라를 지배하려는 시도를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4. 김유신 생애와 사후
김유신(595~673)은 79세로 사망하며 신라의 최고 군사권자 이자 정치가로서 생을 마감했다. 문무왕은 그의 업적을 기리며 국장을 치르고 흥덕사에 장례를 지냈다. 김유신은 사후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어 삼국통일과 민족 통일의 상징적 인물로 기억되었다.
김유신은 역사 속 기록으로만 보았을 때 '이순신' 장군과 같이 무패의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서 삼국통일 시대 백제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