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의 시대 16 ㅡ ('김유신'과 '김춘추' 5 - 김춘추 목숨 건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71
ㅡ 삼국통일의 시대 16 ㅡ ('김유신'과 '김춘추' 5 - 김춘추 목숨 건 외교활동 2)
우리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점 중 하나는 삼국통일이 ‘고구려’가 아닌 ‘신라’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만약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광활한 만주벌판까지 지금의 우리 영토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 부이다. 또한 신라에 의한 ‘반쪽짜리 통일’이었고, 그것도 중국 당나라 외세를 빌린 통일이라는 점 때문에, 삼국통일을 기획한 김춘추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삼국통일 하면 흔히 김춘추보다 김유신을 더 높이 평가한다. 실제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도 김유신 역할이 두드러지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신라 삼국통일 기반은 김춘추가 닦아놓은 것이었다. 김춘추는 김유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삼국통일 완성을 보지는 못했지만, 김유신은 김춘추가 준비한 기반 위에서 그저 마무리만 한 셈이었다. 따라서 신라 삼국통일에서 김춘추 공헌이 김유신보다 훨씬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김춘추는 외교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으며, 자신 목숨 걸고 직접 현장을 누볐다.
1. 김춘추의 왜국 외교
김춘추는 고구려에서 어렵게 탈출한 뒤, 곧바로 ‘왜국(일본)’ 으로 향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서에는 김춘추 왜국 방문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오직 '일본서기'에만, 647년에 김춘추가 왜국을 방문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왜국은 백제와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김춘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춘추는 백제와 왜국 관계가 잠시 소원해진 틈을 이용해, 신라를 돕거나 최소한 신라가 백제와 싸울 때 중립을 지켜 달라는 요청을 하고자 했다.
결국 김춘추 왜국 외교는 군사적 지원을 얻는 데 실패했지만, 이 사건은 신라가 왜국보다는 당나라와 동맹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역사서에는 김춘추 왜국 방문이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신라 역사서가 주로 백제·고구려와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왜국은 백제와 밀접한 동맹을 맺고 있어 신라 입장에서 기록할 가치가 낮았을 수도 있다. 혹은 후대 역사서에서 의도적으로 강조하지 않았거나 누락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 당나라 외교와 삼국통일의 초석
김춘추는 648년(진덕여왕 2년) 마지막 결연한 마음으로 당나라로 향한다. 당시 당나라 황제는 당태종(이세민, 재위 626~649)이었다.
당태종은 645년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지 3년밖에 지나지 않아 분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김춘추는 직접 당태종을 만나 신라가 당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군사적 지원 요청했다.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647~ 654)이 당태종에게 보낸 친서는 당시로서는 다소 굴욕적이지만, 신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친서에는 신라가 당나라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과 당나라 문물을 적극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또한 신라는 한반도 내에서 당나라 이익을 보호하겠단 입장도 명확히 했다.
김춘추와 진덕여왕 외교 전략은 신라가 당나라와 협력하여 국제적 정당성 확보하고, 고구려·백제에 대응해 삼국통일 기반을 마련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당태종은 김춘추 용모와 언변을 칭찬하며 신라와 동맹을 강화했다. 당나라는 김춘추 요청을 받아들여 백제와 고구려 정벌을 지원할 것을 약속했지만, 당태종 사망(649년)으로 인해 직접 시행하지는 못했다. 실제 백제와 고구려 정벌은 후임 황제 당고종과 측천무후가 주도했다.
3. 당이 신라를 도와 백제를 침공한 이유
삼국시대 수백 년 동안 중국이 고구려가 아닌 백제를 직접 침략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으로 기록된다.
이는 한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백제와 신라가 중국 입장에서 전략적·군사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또한, 두 나라를 공격하려면 반드시 해상을 통한 접근이 필요했는데, 육로는 고구려가 방어하고 있어 중국의 육상 진출을 효과적으로 차단하였다. 즉,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를 보호하는 방패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실제로 고구려가 존재하지 않았던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중국이 한반도 남부지역까지 직접 침략한 사례가 확인된다. 이는 고구려 부재가 남부지역 방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7세기에 당나라가 백제를 침략한 사건은 단순한 군사적 욕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 팽창 정책과 전략적 목표, 그리고 신라와 동맹 관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당은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변화시키고 전략적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백제를 정복하였으며, 이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 속에서 군사적·정치적 계산과 맞물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4. 김춘추의 적극적 외교 효과
김춘추는 단순히 군사적 지원을 얻는 데 그치지 않고,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수용해 신라체제를 강화하는 전략을 펼쳤다. 이를 통해 신라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결국 김춘추 당나라 외교는 삼국통일 초석을 다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신라는 당나라 지원을 받아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 를 차례로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영토는 비록 절반도 차지하지 못했지만...
김춘추는 귀국 후 654년 왕위에 올라 태종 무열왕(재위 654~ 661)이 되었으며, 백제 정벌은 직접 수행했지만 고구려 멸망은 보지 못한 채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사위와 딸을 죽인 의자왕에 대한 복수는 보고 죽었다.
김춘추 목숨을 건 외교 노력은 고구려와 왜국에서는 실패를 겪었지만, 당나라와 성공적인 외교를 통해 삼국통일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어서 김유신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