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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70

삼국통일의 시대 15 ㅡ ('김유신'과 '김춘추' 4 - 김춘추의 목숨을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70

ㅡ 삼국통일의 시대 15 ㅡ ('김유신'과 '김춘추' 4 - 김춘추의 목숨을 건 고구려 외교 활동)


먼저, '김춘추' 외교 활동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알아 두어야 할 점이 있다.


<김부식 삼국사기>가 종종 비난받는 이유 중 하나는 지나치게 신라 중심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는 거의 비슷한 분량으로 기록되어 있다. 각국 역사적 성취와 사건들도 독립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고구려의 웅대한 역사와 백제의 문화적 성취에 관한 기록도 상당하다.


삼국사기가 신라중심으로 보인 이유는 신라가 결국 삼국통일 했기 때문이다. 통일 직전과 이후 기록에서 신라중심 서술이 두드려지며, '김유신' 열전 분량이 다른 인물보다 두세 배 길게 기록된 점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김춘추는 왕이 되었기에 별도의 열전은 없지만,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다. 여기서 ‘본기(本紀)’는 왕 치세와 국가 주요 사건을 기록한 부분이고, ‘열전(列傳)’은 왕 이외 주요 인물 행적을 기록한 부분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김춘추 목숨을 건 고구려 외교>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1. 백제의 공격과 신라의 위기


앞 편에서도 설명했듯이 642년, 백제 의자왕이 신라 '대야성'(현재 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해 점령하고, 성주와 그의 부인인 김춘추 딸을 살해했다. 이는 신라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협공 가능성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에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 사신으로 보내 군사지원을 요청하기로 한다. 삼국사기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춘추가 왕에게 나아가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 군사를 청해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 11년(642년) ㅡ


김춘추는 출발 전 김유신과 혈맹과 같은 맹세를 나누며, 60일 내에 돌아오지 않으면 고구려를 공격하라면서 다시 만날 수도 없음을 각오한다.


2. 고구려에서 담판


고구려에서는 처음 김춘추를 '연개소문'이 직접 영접하는 등 정중하게 맞이했다. 김춘추는 보장왕 앞에서 신라 왕의 말을 전하며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보장왕은 조건을 내걸었다.


"죽령 이북의 땅을 신라가 돌려준다면 구원병을 보내겠다."


이 땅은 신라의 핵심 요충지였기 때문에 신라가 돌려줄 수 없는 요구였다.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고구려 측도 신라가 땅을 내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고, 단지 김춘추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김춘추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감금되었다.


감옥에서 그는 보장왕 신임을 받는 대신 '선도해'에게 뇌물을 보내고, ‘토끼전’ 이야기에서처럼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모면한다.


3. 신라의 구출 시도


김춘추가 60일 내 돌아오지 않자, 김유신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고구려 공격을 준비한다. 그러나 고구려 간첩 '덕창'의 보고와 김춘추의 지혜로운 외교로 고구려는 결국 그를 풀어주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신라와 고구려 외교관계는 사실상 단절되었고, 김춘추 협상은 겉보기에는 실패했지만, 역사학자들은 이를 완전 실패로 보지 않는다.


김춘추는 목숨을 걸고 담판을 벌임으로써, 신라 내에서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영웅임을 각인시켰다.


동시에 외교적 기민함과 전략적 사고를 보여주었다.


4. 김춘추의 외교적 능력


김춘추는 학자풍 왜소한 인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외교활동 기록에 따르면 그의 외모와 화술은 뛰어났다.


당 태종 '이세민'은 김춘추 풍채를 보고 칭찬, 신성한 인물로 평가한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서도 “ 김춘추 용모가 아름답고 담소를 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김춘추가 왕이 되어 하루에 쌀 서말을 먹는 대식가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과장이 섞였겠지만 체격이 우람했음을 암시한다.


5. 고구려가 신라 요청을 거절한 이유


연개소문이 김춘추 요청을 거절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신라-당나라 밀착 우려


신라가 당과 동맹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고구려는 적대적 행위로 인식했다.


2) 백제와의 전략적 관계


고구려는 백제와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려 했고, 신라 지원은 이를 해칠 수 있었다.


3) 고구려 내부 권력 유지


신라를 돕는 것은 연개소문 권력과 고구려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다.


4) 외교적 고립 우려


신라-당 동맹으로 고구려가 외교적 고립에 처할 수 있었다.


만약 연개소문이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면, 김춘추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개소문은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동맹을 미리 확신하고 신라를 배척했다. 만약 그가 국제 정세를 조금만 더 정확히 파악하고 신라를 지원했더라면, 삼국의 역사적 운명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도 고구려 멸망에 대한 연개소문의 책임은 크다.


6. 결론


김춘추의 고구려 외교는 겉으로는 실패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라 내부에서는 김춘추 정치적 위상과 외교적 능력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김춘추는 일본과 당나라를 돌며 외교를 펼치고, 결국 '나당동맹'을 성사시켜 삼국통일 기반을 마련한다.


개인적으로 이 상황에서 아쉬운 점은, 연개소문이 백제와 신라를 같은 민족으로 여기고, 서로 돕자는 신라 요청을 받아들여 백제를 설득하고 삼국이 화합해 당나라 침략에도 대비할 수 있었다면 우리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는 우리가 지금 느끼는 민족적 동일성을 서로 공유하지 못했다.


오늘날 남한과 북한이 같은 민족임을 인식하면서도 힘을 합쳐 외부 위협에 대비하는 것이 꿈같은 이야기인 것처럼, 당시 삼국이 서로 협력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지금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할 뿐이다.


이후 김춘추는 왜국으로 건너가 외교를 펼치고, 마침내 당나라까지 가서 ‘나당동맹’을 성사시킨다.


김춘추의 왜와 당과 외교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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