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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69

삼국통일의 시대 14 ㅡ ('김유신'과 '김춘추' 3)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69

ㅡ 삼국통일의 시대 14 ㅡ ('김유신'과 '김춘추' 3)


우리는 신라에 의해서 이루어진 삼국통일이 반쪽짜리 불완전한 통일이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함으로써 지금 한반도가 하나의 국가로서 한민족 정체성이 생기게 되었다고 큰 의미를 두기도 했다.


그리고 삼국통일 영웅하면 ‘김유신’을 첫 번째로 꼽았다.

‘김춘추’는 김유신을 도와서 삼국통일을 이룩한 보조자 역할 정도로만 보았다. 또한 김춘추는 외세 당나라를 한반도 삼국전쟁에 끌어들인 사대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다.


당나라를 삼국통일 전쟁 속으로 끌어 들인 사람은 김춘추가 맞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라가 백제 공격에 절체절명 위기에 빠져있었을 때 김춘추가 처음부터 당나라를 끌어들이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먼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고구려 연개소문은 김춘추 요청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김춘추를 감금하고 목숨까지 노렸다. 어렵게 고구려를 탈출한 김춘추는 어쩔 수 없이 당나라로 향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자세히 정리할 것이다.


김춘추가 당을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거꾸로 신라는 백제에게 먼저 멸망당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신라상황이 그만큼 절체절명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처럼 신라 쪽 입장에서 보면 김춘추 역할은 김유신보다 훨씬 더 컸고 강력했다. 김유신은 단지 김춘추 보조자 역할에 불과했다. 김춘추가 죽어가는 신라를 살리고 삼국통일 기반을 닦았던 것이다.


김춘추는 앞 편에서 설명했듯이 신라 왕족 출신으로 ‘진지왕’ 손자였다. 나중에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한다.


사실 진지왕이 ‘진평왕’에게 폐위 비슷하게 당하고 나서 김춘추 가문은 ‘비주류 진골’이 되었다.


진평왕은 왕을 53년간이나 했으므로 그 긴 시기 동안 김춘추 가문은 비주류 진골로 어렵게 보냈다.


김춘추는 진평왕 시절인 603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비주류 진골 출신으로 젊은 시절을 조용히 보냈다. 그러다 김춘추가 30이

다 되어 갈 때 진평왕이 죽었다. 그리고 ‘선덕여왕’이 즉위했다.


선덕여왕은 즉위 후 왕권 강화를 위해 진평왕과는 달리 사촌 조카 뻘 김춘추를 중용했다. 여왕으로 즉위해 약해진 왕실 내에서 강한 정치적 역할을 맡길 사람이 필요했고 김춘추를 선택했다.


김춘추 나이 30이 되어서야 드디어 빛을 보았다.


이때쯤 김유신 여동생 ‘문희’와도 결혼하는 일이 벌어졌다. 신라에서 막 떠오르는 무장이자 가야왕족 비주류 진골 출신으로 진평왕 시절 자기처럼 홀대받았던 김유신과도 처남매제지간 ‘혼인 동맹’을 맺었다.


김춘추와 김유신 혼인동맹은 두 사람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되었다.


김춘추는 외교와 정치 문제를 해결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선덕여왕 큰 신뢰를 얻었다.


선덕여왕 시기는 백제 ‘의자왕’이 즉위한 후 백제가 신라를 강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나제동맹’ 등으로 신라 최고 전성기를 연 ‘진흥왕’이 백제 뒤통수를 치며 한강 유역을 백제로부터 빼앗아 갔다.


이에 분노한 백제 ‘성왕’은 신라를 공격하다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함으로써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백제는 ‘위덕왕’, ‘혜왕’, ‘법왕’ 등 짧은 재위 기간을 가진 왕들이 정치적 안정을 찾지 못하고 혼란 속으로 빠졌다. 이 시기 백제는 나라 밖 일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법왕'을 이어 즉위한 백제 ‘무왕’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신라에 대한 압박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무왕도 신라에 제대로 된 복수를 이루지 못하고 641년에 죽었다. 무왕 사후 즉위한 왕이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이었다.


우리는 의자왕을 삼천궁녀나 데리고 놀면서 백제를 멸망으로 이끈 암군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의자왕에 대한 그런 고정관념은 잘못됐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였기 때문에 나라를 패망으로 이끈 군왕으로서는 할 말이 없을지 몰라도 백제 멸망 책임 가장 큰 부분은 의자왕이 아니라 김춘추에게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의자왕은 즉위 후 아버지 무왕 정책을 유지하며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그리고 즉위한 지 2년 만인 642년 7월에 친정하여 신라를 침공했고 40여 성을 빼앗는 성과를 거두었다.


1달 뒤 8월, 의자왕은 장군 ‘윤충’에게 1만 병사를 주어 신라 남쪽 주요 요충지인 ‘대야성’ 공격을 지시했고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대야성은 신라 수도 서라벌의 관문이나 다름없었다. 대야성 함락은 신라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실제로 의자왕 시절 백제군은 대야성을 포함해 40여 개 성을 함락했고, 신라는 옛 가야 지역 낙동강 서안 지역에서 축출될 위기에 처했다.


게다가 백제는 고구려와 연합해 서해 ‘당항성’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약 신라가 당항성을 빼앗기면 당나라와 교통로가 끊기고, 한강 유역도 위태로워졌다. 고구려도 한강 유역을 지속적으로 공격해 신라는 한강 이북지역에서 축출될 위기에 있었다.


대야성 전투는 단순한 성 하나 함락이 아니라 신라 국가위기가 절체절명으로 다가온 사건이었다.


김춘추가 발 빠르게 고구려, 왜, 친선 관계인 당으로 외교길에 나선 것도 대야성 전투 패배로 절체절명 신라난국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대야성 전투는 김춘추에게 정치적 타격을 준 것뿐 아니라 뼈에 사무치는 개인적 원한까지 남겼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642년 8월, 백제 장군 '윤충'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했다. 대야성 성주 '품석'은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했지만, 윤충은 모두 죽이고 품석 목을 신라에 보냈다. 남녀 1천여 명은 사로잡아 서쪽 지방 주와 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병사를 남겨 성을 지켰다.


대야성 성주는 품석은 김춘추 사위이었다. 평소 품행이 좋지 않았던 김품석은 부하 ‘검일’의 부인을 강제로 빼앗았다.


마침 백제가 공격해 오자 신라에서 백제로 투항한 '모척'이란 사람이 검일을 찾아온다. 이후 검일은 백제군과 내통해 군량창고에 불을 질렀고, 이를 본 성안 백성들과 군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모척과 검일은 백제군과 함께 앞장서게 되었고 그리고 대야성은 함락당한 것이다.


문제는 백제가 김품석과 그의 아내 ‘고소타’(김춘추 딸이자 김유신 외종질)까지 죽였다는 점이다.


백제는 성왕이 신라 진흥왕에게 배신을 당하고 비참하게 죽은 원수를 갚으려는 의도였겠지만, 아녀자, 그것도 김춘추 딸이자 김유신의외조카를 죽인 것은 지나친 무리수였다.


김춘추는 딸 죽음을 듣고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고 기록됐다.


대야성 전투 후 김춘추는 모척과 검일을 잡아 처형했다.


대야성 전투는 삼국시대의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 결과로 김춘추 딸이 죽은 사건은 백제에게 자충수가 되었고, 김춘추는 국가적 위기에 더해 개인적인 원한까지 겹치면서 이후 고구려, 당, 왜 등 외부세력 도움까지 요청하며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대야성 전투는 백제 의자왕 승리였지만, 이후 백제멸망과 삼국통일과 관련해 중요한 사건의 계기가 되었다.


이어서 김유신과 김춘추 4편, <김춘추 고구려로 향하다>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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