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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67

삼국통일의 시대 12 ㅡ(김유신과 김춘추 1)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67

― 삼국통일의 시대 12 ㅡ

(김유신과 김춘추 1)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통틀어 '김유신'과 '김춘추'처럼 평생을 긴밀하게 함께한 인물도 드물다. 두 사람은 각기 독보적 존재감을 지니며,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위인들이다.


2012년 KBS 대하드라마 '대왕의 꿈'은 바로 이 두 인물 주인공으로 삼았다. 당시 ‘최수종’이 김춘추, ‘김유석’이 김유신을 연기했는데, 주연 배치만 보더라도 드라마가 김춘추의 비중을 더 크게 그렸음 을 알 수 있다. 해당 작품은 KBS 대하사극답게 비교적 역사적 고증을 따랐다는 평가를 받지만, 어디까지나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1. 실제 역사에서의 존재감


오늘날 한국사 인물 평가에서 김유신의 위상은 거의 '이순신' 장군에 비견될 정도로 높다. 반면 김춘추는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적 행적만 놓고 보면 김춘추가 훨씬 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진골출신이지만, 둘의 출신 배경은 크게 달랐다.


김춘추는 신라 정통 왕족 출신의 주류진골이고, 김유신은 가야왕족 혈통이 섞인 비(非) 주류진골이다.

즉, 같은 진골이라도 신분적 위계는 김춘추가 월등히 높았다.


2. 두 사람의 만남


김유신(595년생)과 김춘추(603 년생)는 나이 차이가 약 8세다. 김유신이 화랑에 입문한 것이 10대 후반이므로 둘이 같은 시기 화랑 생활을 했을 가능성은 낮다. 역사서에도 두 사람이 10대 시절 친밀하게 지냈다는 기록은 없다.


‘문희설화’가 등장하는 시점에서 김춘추는 20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당시 상황을 봐도 두 사람이 이미 마음을 터놓고 지낸 사이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두 사람 모두 어려서부터 신라 최고 지배층 환경에서 자라났고, 궁중행사나 귀족연결망 통해 자연스럽게 접점을 가졌을 가능성은 크다. 이를 이해하려면 신라왕실 특유의 복잡한 근친혼 구조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김춘추 가계도 복잡성


먼저 신라왕실 전체 계보를 보면 무슨 세포분열 그려 논 모습처럼 복잡하다.(아래 마지막사진)


김춘추는 머리가 혼란스러울 정도로 근친혼으로 출생했다.


'진흥왕' 적자인 '동륜태자'는 일찍 사망하고, (아버지후궁 미실 저택 담을 넘다가 개에 물려 죽었다는 야사가 전해짐) 그 아들 '진평왕'이 어린 탓에 왕위는 동륜 동생 '진지왕'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진지왕은 음주와 여색을 밝힌다는 이유로 폐위되며, 진평왕이 즉위했다.


진평왕은 아들이 없이 죽자 딸인 '선덕여왕' 이 왕위에 올랐고, 진평왕 동생 국반 '갈문왕' 과 혼인했다. 삼촌–조카의 결혼이었다.


한편 폐위된 진지왕에게는 아들 '김용춘'이 있었는데, 그는 진평왕 사촌형제이었는데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와 결혼해 장인·사위 관계가 되었다. 이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 바로 김춘추이다.


즉 김춘추 혈통은 왕족내부에서 수차례 교차된 근친혼 산물로, 가계도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4. 김유신 가계 배경


김유신은 금관가야 최후의 왕 '구형왕' 증손자로, 가야계 비주류 진골이었다.


그러나 김유신 어머니 '만명부인'은 진흥왕 친동생 '숙흘종' 딸로, 김유신도 외가를 통해 신라 왕실혈통도 이어받는다.


만명부인은 비주류진골 '김서현'과 관계를 집안에서 반대해 가출하듯 도망쳐 혼인을 이루고, 이후 김유신을 낳았다.


김유신의 전설 속 ‘20달 태기’도 실제로는 출생 인정이 늦어졌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야기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결국 김춘추와 김유신은 먼 친척 관계이기도 하며, 둘 다 왕족 혈통을 지닌 귀족출신 이었다.


5. '문희설화'와 가족관계 결합


김유신-김춘추 두 사람 인연을 확고히 만든 것은 잘 알려진 우리 학창 시절 교과서에도 나온 ‘문희 설화’이다.


술에 만취한 김춘추가 김유신 집에 들렀다가 김유신 둘째 여동생 문희와 관계를 맺어 혼전 임신이 발생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삼국사기'에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 등 야사에서는 김유신의 '화형소동' 등이 첨가돼 극적으로 전해진다.


어찌 되었든 김춘추는 김유신 여동생 문희와 혼인하여 매제· 처남 관계가 되었고, 이는 두 사람의 정치적 결속력을 한층 강화했다.


6. 정치적 협력과 긴장


<설계자 김춘추, 실천자 김유신>

삼국통일 과정에서 김춘추는 신라외교 모든 퍼즐을 맞춘 인물이었다.

특히 고구려에 맞서기 위한 당나라와 동맹은 신라판 ‘대전략’이었다. 김유신이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는 야사도 있는데, 실제로 비판적인 시각이 있었을 법하다. 그만큼 당 의존은 위험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정치적 균열을 극복하고 결국 하나의 목표, ‘삼국통일’로 움직였다.


이 대전략이 성공하면서 김춘추는 29대 왕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이때 벌어진 일은 지금 기준으로는 기묘하다 못해 충격적이다.


김춘추는 김유신에게 은혜를 갚겠다며 자기 딸을 김유신에게 시집보낸다. 그 순간 김유신은 자기 매제를 장인으로 모시는 특이한 관계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그러나 당시 신분제 사회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귀족 결혼 방식이었다.


7. 신라·고려 왕실 결혼 관습


신라왕실 계보를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정말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의 도덕 기준일 뿐이다. 그 시대 질서는 왕권과 귀족권 유지, 정통성 관리, 권력집중이라는 현실적 요구 위에서 만들어졌다. 고려왕실도 같은 전통을 이어받아 복잡한 가계도를 남겼다.


8. 결론


대중문화는 김유신을 더 강렬하게 그려내지만, 역사 속에서는 김춘추 정치적 무게감이 훨씬 컸다. 그렇다고 김유신 역할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은 방향을 세웠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방향으로 나라를 움직였다.


결국 김춘추와 김유신의 관계는 그 시대의 정치·사회적 구조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둘 사이가 단순히 ‘우정이야기’를 넘어, 그 당시 권력이 어떻게 움직이고, 역사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는가를 읽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또 그 결합이야말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가능하게 한 핵심 동력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어서 〈김춘추·김유신 2편〉에서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두 번째 사진 김춘추 상상화

세 번째 사진 김유신 상상화

네 번째 사진 신라왕실 혼인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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