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의 시대 11 ―(선덕여왕 부정적 측면과 화랑제도 실상)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66
― 삼국통일의 시대 11 ―
(선덕여왕 부정적 측면과 화랑제도 실상)
역사 속 그 어떤 인물도 장점과 한계가 공존한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조차 인간적 약점을 보인 사례가 있다. 그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세종대왕은 며느리들한테 유독 심하게 대하였다. 별 이유를 다 대 쫓아낸 며느리가 둘이나 된다. 당시 세자였던 문종이 세종이 반강제로 맺어준 세자비가 못 생겼다고 세자비를 전혀 안 찾자 세자비가 궁녀와 동성애를 하다 쫓겨나기도 했다.
선덕여왕 역시 기록이 주로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왕의 공적을 중심으로 한 사서에 의존하기 때문에 긍정적 모습이 강조되었을 뿐, 약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기록이 제한적이므로 평가에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아래는 선덕여왕의 부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측면을 역사적 맥락과 함께 정리한다.
1. 결단력 부족 논란
선덕여왕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품으로 평가되지만, 이러한 태도가 때로는 소극적이거나 우유부단한 리더십으로 비치기도 한다.
1) 고구려와의 갈등 대응 미흡
642년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한 뒤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신라는 적극적 대응에 실패했다. 고구려·백제 연합의 위협에 비해 신라의 군사 행동은 소극적이었고, 이는 전반적인 주도권 상실로 이어졌다.
2) 백제의 대야성 함락(642년)
백제 '의자왕'이 '대야성'을 급습해 함락시키고 성주 '김품석'(김춘추 사위) 일가(김춘추 딸)가 전멸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대야성은 전략적으로도 중요했으나 신라는 이를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했다. 이 패배는 신라 내부 위기를 크게 심화시켰다.
3) 당나라 의존 외교
신라는 고구려·백제 양면 압박 속에서 독자적 군사력 확보보다는 당의 지원을 기대하는 외교에 집중했다. 그러나 실질적 도움을 즉시 얻지 못해 외교적 성과는 제한적이었다. 이는 국가적 역량 강화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물론 이러한 소극성은 선덕여왕 개인 한계라기보다 정치갈등· 군사력 열세·삼국 간 역학관계라는 구조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귀족세력과의 과도한 타협
선덕여왕은 내부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귀족과 협력하는 노선을 택했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강력한 지도자로서 통솔력 부족’이라는 평가를 낳기도 한다. 귀족 의존도 증가는 당시 신라 정치의 구조적 한계이기도 했다.
3. 후계 문제의 불명확성과 비담의 난
선덕여왕은 후계 구도를 명확히 정리하지 못했고, 이는 647년 '비담의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혼란의 한 요인이 되었다.
비담이 미실의 아들이라는 설은 확증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신분적 자신감과 정치적 야심을 설명하는 요소로 자주 언급된다.
4. 상징적 업적 중심의 통치
선덕여왕 시대의 대표적 업적인 첨성대, 황룡사 구 층 목탑, 분황사 등은 국가 위엄과 왕권 정당성을 강화하는 의미가 크다. 그러나 이러한 건축사업이 국가 실질적 군사·경제 문제 해결에 직접 기여했는지는 논란이 있다. 상징성에 비해 실효적 업적은 제한적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5. 정치적 인간관계 한계
선덕여왕은 왕권 유지를 위해 복잡한 귀족 관계를 조율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특히 김춘추·김유신을 핵심 지지세력으로 중용한 점은 다른 세력 시기와 반발을 촉발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정치적 긴장은 비담의 난과 같은 사건과도 연관될 수 있다.
< 화랑제도: 이상과 현실>
김유신·김춘추의 성장 기반은 화랑도였다. 오늘날 '화랑제도'는 삼국통일 인재양성이란 긍정적 평가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역사에서는 긍정과 부정 양면이 공존한다.
1. 기원과 제도적 정비
초기 여성집단 '원화'가 남모·준정 사건으로 해체된 후 남성중심 조직인 '화랑'이 등장했다.
1) 법흥왕대: 화랑제도의 초기 형태 확립, 불교 공인과 더불어 사상적 기반 강화
2) 진흥왕대: 제도를 국가적 차원에서 체계화하고 군사적·사회적 역할 확대
3) 화랑들은 무예·국토순례·사상교육 등을 통해 지도자로 성장했으며, '원광법사' 세속오계로 대표되는 윤리 규범에 따라 활동했다.
2.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타나는 부정적 모습
필사본이 위서라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화랑제도 이면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다. 기록이 사실 여부와 별개로, 조직이 장기간 유지될 때 나타날 수 있는 일반적 부작용과 맞닿아 있다.
1) 도덕적 일탈
일부 화랑들은 술·향락 등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는 기록이 있다. 남녀관계·성적 관계의 혼란도 자주 언급된다.
2) 정치적 악용
화랑 출신들이 귀족 권력 투쟁에 동원되거나 정치적 세력형성의 도구가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3) 계급 갈등과 파벌
귀족 중심 체제였기에 계급 갈등이나 파벌 형성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4) 과도한 공격성
군사적 기강을 강조하다 보니 폭력성·경쟁심이 지나치게 고조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교과서에 실렸던 ‘관창’ 이야기도 이와 연결된다.
5) 윤리와의 충돌
일부 행태는 후대 유교 윤리 기준과 충돌했을 가능성이 있다. 동성 간 유대나 애정 표현도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필사본이 위서라는 주장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내용이 현대에 긍정적으로 재해석된 ‘화랑도 정신’과 충돌한다는 데 있다. 일부 학자는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의 조작 가능성까지 제기하지만, 필사본의 내용 자체가 모두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직이 수백 년 지속되면 부작용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일부 부정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화랑도 정신—충성, 단결, 무장 수련, 사상교육—의 핵심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실제로 기여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3. 결론
선덕여왕과 화랑제도는 신라사의 중심축이지만, 이들 역시 장점만으로 구성된 이상적 존재는 아니었다. 긍정·부정을 균형 있게 바라볼 때, 선덕여왕 정책적 한계와 화랑제도 역동성을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어지는 편에서는 김유신과 김춘추 두 인물이 어떻게 화랑도 경험을 기반으로 신라 통일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는지 살펴본다
— 초롱박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