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의 시대 10 ―선덕여왕 시기 대외 정세와 업적)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65
― 삼국통일의 시대 10 ―
(선덕여왕 시기 대외 정세와 업적)
삼국시대 군주 가운데 ‘선덕여왕’처럼 널리 알려진 왕은 드물다. 우리나라 최초 여왕이라는 상징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 재위가 신라가 삼국통일 기반을 마련한 핵심 시기와 정확히 겹치기 때문이다. 삼국통일 주역으로 평가되는 '김유신'과 '김춘추'가 본격적으로 정치적 비중을 높여 간 시기도 바로 선덕여왕 때였다.
또한 '삼국사기'는 통일 전후 신라 인물 <특히 김유신>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선덕여왕은 자연스럽게 여러 기록 속에서 빈번히 등장하며, 현대 드라마에서도 김유신·김춘추와 함께 자주 재조명되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선덕여왕은 삼국통일기 전야라 할 수 있는 격동 속에서도 여성 지도자 정치적 역량을 효과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그녀 재위 기간은 외교·전쟁·내부 정치가 복잡하게 얽힌 시기였으며, 신라는 이 속에서 문화·종교적 발전까지 이루어냈다.
1. 대외 정세
1) 고구려
선덕여왕 재위 대부분 동안 고구려는 '영류왕'(618~642)이 다스렸다. 그는 당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며 대외적으로는 온건한 노선을 취했지만,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다. 재위 후반에는 연개소문과의 극심한 갈등 끝에 피살되고, 이후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642~668)이 즉위했다.
신라는 선덕여왕 후반 백제의 강한 공격으로 위기에 몰리자 '김춘추'를 보내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신라는 '당태종'에게 도움을 구해 결국 <신라–당 동맹> 길을 열게 된다.
이러한 외교적 전환은 신라가 진흥왕 때 확보한 한강유역 덕분에 가능했다. 이전에는 신라가 중국과 직접 교류하기 어려워, 백제 사신을 따라가는 방식으로만 왕래가 가능했다.
2) 백제
선덕여왕 초기 백제는 '무왕'(600 ~641) 통치 아래 있었고, 한강유역을 잃게 한 신라에 대해 지속적으로 보복전을 벌였다. 신라와 백제는 이 시기 가장 첨예한 대립 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후 즉위한 '의자왕'(641~660) 은 강대한 국력을 바탕으로 신라를 압박했다. 특히 642년 고구려 '연개소문'과 연합한 뒤, 백제는 '대야성' 등 신라 핵심 요충지를 함락하며 신라를 절체절명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 위기를 외교로 전환한 것이 김춘추였으며, 결국 신라–당 연합이라는 대전략 기초가 선덕여왕 시기 마련되었다.
3) 당(唐)
중국에서는 '당태종'(626~649) 이 집권하고 있었다. 태종은 신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백제·고구려 견제를 위한 전략적 협력자를 필요로 했다.
선덕여왕 말기인 645년, 태종은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침공했으나 신라에 직접 지원을 요청하지는 않았다. 태종이 스스로 고구려를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백제와 고구려는 후방 견제를 위해 일시적 동맹을 맺고 신라를 공격하였다.
백제는 당의 고구려 침입을 직접 지원하지는 않았으나,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당의 전략을 간접적으로 교란했다. 신라는 백제 공격을 방어하느라 당의 고구려원정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지만, 고구려가 당의 압박을 받는 상황은 향후 신라에게 매우 유리한 전략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결과적으로 당태종 고구려 침공은 삼국 간 군사·외교 판도를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이후 신라는 김춘추(태종 무열왕) 시기에 당과 본격 공조하여 백제 멸망(660), 고구려 멸망(668)으로 이어지는 삼국통일 전략을 구상하게 되었다.
2. 문화·종교적 업적
전쟁과 외교가 뒤엉킨 시기였지만, 선덕여왕은 신라 내부적으로는 불교 진흥과 문화 발전을 적극 추진하였다.
1) 황룡사 9층 목탑 건립
자장법사 건의를 받아 국가안녕을 기원하는 상징적 건축물로 세운 것이다. 비록 몽골 침입 때 소실 되었지만, 남아 있었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목탑 유산이 되었을 것이다.
2) 분황사 창건
선덕여왕 시기에 조성된 대표 사찰로, 이후 신라 불교의 핵심 거점이 되었다.
3) 첨성대 건립
천문관측을 통해 농업·정책 운영 체계화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는 선덕여왕 과학적 관심과 행정능력을 보여 준다.
3. 선덕여왕의 예지 – 모란꽃
일화
선덕여왕의 통찰력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널리 전해진다.
당나라가 보낸 모란꽃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다는 이유로 “향기가 없는 꽃일 것”이라 예측했고, 실제로 씨앗을 심어보니 향기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비록 설화적 요소가 강하지만, 민중이 그녀의 지혜와 판단력을 어떻게 기억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4. 비담·염종의 반란과 한계
647년,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여성 통치에 대한 반발로 해석되기도 하며, 선덕여왕 통치가 긍정적인 측면뿐 아니라 정치적 한계도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선덕여왕은 반란 진압 전에 병사했고, 왕위는 조카 '진덕여왕'에게 이어졌다.
5. 결론
선덕여왕 시기는 삼국 간 전쟁이 극도로 빈번하고, 외교가 국가 생존을 좌우하는 복잡한 시대였다. 그 속에서도 선덕여왕은 대외적으로는 <신라–당 동맹> 기반을 다지고, 내부적으로는 불교와 문화 발전을 주도한 지도자였다.
물론 반란 등 부정적 요인도 존재했지만,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군주였음은 분명하다.
이어서 <선덕여왕 시대의 부정적 측면과 화랑제도>가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