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의 시대 8 ―(진흥왕 직후 신라의 전성기와 ‘미실’, ‘비담’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63
― 삼국통일의 시대 8 ―
(진흥왕 직후 신라의 전성기와 ‘미실’, ‘비담’ 이야기)
오늘부터 다룰 진흥왕 이후 신라 이야기는 대중에게 매우 익숙하다. 그 이유는 MBC 드라마〈선덕여왕〉이 방영 당시 5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할 만큼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이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가 늘 강조하듯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역사 드라마와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지만 80% 이상이 창작된 허구라는 점을 전제하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격적인 신라 말기 사실 역사로 들어가기 전에, 이미 드라마를 통해 고착된 독자들 인식을 풀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먼저 〈화랑세기〉와 미실·비담의 진위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겠다.
1. 〈화랑세기〉와 미실의 진위 문제
〈화랑세기〉 진위 여부는 이미 *〈고대사는 흐른다 – 진흥왕 편>에서 다루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중요한 점은 다음 두 가지다.
- 필사본〈화랑세기〉는 위서 논란이 있으나
- 신라 시대에 실제로 〈화랑세기〉라는 책은 존재했다는 점이다. (현전 하지 않을 뿐이다)
실제로 삼국사기에는 김대문이 저술한 여러 책과 함께〈화랑세기〉가 명확하게 언급된다.
“김대문(金大問)이 화랑세기에서 말하기를,
[어진 보좌와 충성스러운 신하는 이로부터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은 이로부터 생겼다.’ 하였다.]
— 삼국사기 진흥왕 37년조ㅡ
또한 김부식은 김대문이 지은 여러 저서—〈고승전〉, 〈화랑세기〉, 〈악본〉, 〈한산기>가 당대까지 남아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즉 〈화랑세기〉라는 문헌 자체는 실재했고, 신라 역사·문화 이해에 중요한 자료였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보는 필사본 〈화랑세기>의 신빙성에는 논란이 있으니, 그 기록을 곧이곧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설화적 요소가 섞인 자료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2. 드라마 〈선덕여왕〉과 실제 기록의 차이
1) 쌍둥이 설정(덕만·천명)은 순수한 드라마적 장치
선덕여왕이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삼국유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2) 미실의 실존 여부
드라마에서 절대적 권력자로 활약한 ‘미실’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필사본 〈화랑세기〉에만 자세히 등장한다. 즉, 미실은 정사(正史)에 실명이 남지 않았으며, 후대 설화·야사·〈화랑세기〉 기록을 통해 형상화된 반(半) 전설적 인물이라 보아야 한다.
3. 〈화랑세기〉에 나타난 미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은 다음과 같은 인물로 묘사된다. 귀족 '지귀'와 '정희' 사이에서 태어난 미모·지혜 뛰어난 여성으로서 진흥왕 후궁으로 들어가 총애를 받아 정치적 영향력 확대하고 진흥왕 둘째 아들 '진지왕'과도 관계를 맺으며 왕실 권력구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진지왕이 단명하고 폐위된 배경에도 미실의 정치적 행보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전승이 있다.
미실은 화랑들과의 교류를 통해 정치적 기반을 다졌으며, 화랑제도를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한 것으로 알려진다. 드라마에서처럼 '김유신'과 '김춘추'를 포함한 여러 화랑과 관련성도 전해지지만, 이는 사료와 설화가 뒤섞인 부분이다.
<화랑세기>에는 진흥왕과 미실이 처음 서로에게 마음을 품었을 때, 서라벌의 남녀를 불러 모아 예절과 체면을 벗어던지고 함께 정을 나누었다는 파격적인 기록까지 등장 한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사실 여부가 명확하지 않고,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다.
또한 <화랑세기>에는 미실이 신라 내부뿐 아니라 외교적인 영역에서도 뛰어난 역할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미실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으며, 현대 드라마 나 문학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강렬한 권력자로 재탄생하며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흥미로운 점은 김부식이나 일연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편찬할 때 <화랑세기>를 알고 있었고 일부 참고했다고 전해지지만, 정작 미실에 대한 내용은 거의 다루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유교적 가치관으로는 미실과 관련된 여러 행적을 정사(正史)에 기록하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진흥왕과 미실의 일화는 파격적이니 말이다.
한편, 드라마에서 선덕여왕 못지않게 인기를 끈 '비담' 역시 실제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 이다.
'삼국사기'에도 그 활동이 기록돼 있다.
그는 선덕여왕(재위 632~ 647) 말기에 여왕통치를 반대한 세력을 이끌어 647년 반란을 일으켰다. 10일간 경주를 공격했으나 김유신과 김춘추 연합군에 진압되어 실패 하고, 결국 처형되었다. 이후 선덕여왕 서거 하고 '진덕여왕'이 즉위한다.
드라마에서는 미실이 비담의 어머니로 등장하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이 아니며 두 사람 관계 역시 사료적 근거가 없다. 실제로 미실의 실존 여부 자체도 여전히 논쟁 대상이다.
<화랑세기>의 사료적 신빙성이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다룬 내용은 사실로 단정하기보다는 설화적 요소를 함께 고려해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
이제 선덕여왕의 업적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진흥왕 이후의 왕들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다.
1. 제25대 진지왕(재위 576~579)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다. 첫째 아들 동륜태자는 <화랑세기>에 따르면 지소태후 담을 넘다가 개에게 물려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다. 어쨌든 동륜태자가 일찍 죽으면서 둘째인 진지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진지왕의 재위 기간은 4년으로 매우 짧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치세는 방탕한 생활과 부도덕한 행동으로 인해 신하들의 불만을 샀고, 결국 신하들의 강요로 폐위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여성 문제로 비판이 심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진지왕 음란함을 이유로 화백회의를 거쳐 폐위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반면 정사인 '삼국사기' 본기에서는 백제공격에 대비해 노리부를 기용하고, 성을 쌓으며 제사를 지내는 등 비교적 평온하게 지내다 죽은 것으로 묘사된다. <화랑세기>에는 그가 백제 중심지(현 익산)까지 공격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반드시 무능한 군주만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당시 어린 '진평왕'(동륜태자아들) 이 즉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삼촌인 '진지왕'이 잠시 왕위에 올랐다가 다시 진평왕에게 왕위를 넘겼거나, 진평왕 측 쿠데타로 밀려났다는 해석이 있다. 진지왕에 관한 부정적 기록이 많은 것을 보면 쿠데타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견해도 있다.
2.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
진평왕은 진흥왕의 손자이자 동륜태자 아들로, 선덕여왕 아버지이다.
진평왕 시기는 진흥왕 시대 전성기를 지나 외적 침략과 내부 왕권 약화로 신라가 위기에 처했던 때였다. 그는 이러한 위기를 외교전략으로 극복하고, 진흥왕 때 급격히 확장된 영토와 인구를 기반으로 국가 체제를 재정비했다. 또한 유능한 신하들을 중용하여 신라 발전 기틀을 다진 명군으로 평가된다.
고구려와 백제의 지속적인 침략 속에서도 국가를 안정시켰다는 점에서, 결국 신라가 삼국 최종 승자가 되는 기반을 놓았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진평왕은 체구가 매우 컸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그의 키가 11척(약 253cm)에 달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흥미로운 일화다.
드라마 '선덕여왕' 상당 부분은 사실 진평왕 시대의 이야기로, 김유신·김춘추 등 삼국통일기 주요 인물이 대부분 이 시기에 등장한다. 덕만공주(선덕여왕)를 통해 왕권 계승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다.
이어서 선덕여왕 시대 이야기를 계속 진행됩니다.
— 초롱박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