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 시대 9 ㅡ('발해' 정체성과 문화, 생활상)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98
ㅡ 남북국 시대 9 ㅡ
('발해' 정체성과 문화, 생활상)
우리 민족에게 발해는 여전히 꿈처럼 남아 있다.
잃어버린 땅, 만주 벌판을 마지막으로 호령했던 나라 발해.
그러나 그 상실은 영토에만 그치지 않았다.
발해는 오랜 세월 우리 한민족 역사 속 국가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한 채, 존재 자체마저 흐릿해지는 설움을 견뎌야 했다.
잃어버린 땅의 기억 위에, 잊힌 나라라는 상처가 겹쳐지며 발해는 우리에게 더욱 애달픈 이름이 되었다.
그렇다면 꿈이 아닌 현실로서의 발해는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
막연한 향수와 민족적 감정 너머에서, 역사 속 발해 실체를 마주할 필요가 있다.
오늘은 이상화된 발해 기억이 아닌, 사실과 기록을 바탕으로 발해라는 나라에 한 걸음 더 현실적으로 다가가 보고자 한다.
1. 발해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자처했지만, 당시의 발해인들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민족’이라는 개념을 어느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는 근대 이후 형성된 민족 개념을 고대 국가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본격화하기 이전부터 발해를 중국의 변방 정권으로 간주해 왔으며, 발해의 옛 영토 상당 부분이 현재 러시아 땅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 역시 발해를 한민족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일본은 비교적 일관되게 발해를 한반도 계통 국가로 인식해 왔다.
2. 일본사서에 나타난 발해 정체성 인식
발해가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스스로를 ‘고려(高麗)’라 칭한 기록은 일본의 관찬 사서인 '속일본기(續日本紀)'에 등장한다. 특히 762년(문왕 20년), 발해 사신이 일본에 도착해 자신들을 고구려의 후계 국가라 소개한 기록은 발해의 외교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3. 발해 국가성격
발해는 698년 대조영이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건국한 국가였다.
발해 지배층, 특히 왕실인 대씨(大氏) 가문은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강하게 드러냈고, 정치·군사·문화 제도 전반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발해는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었다. 피지배층 다수를 차지한 말갈족과의 융합을 통해 형성된 다민족 국가였으며, 이로 인해 발해는 고구려계승 의식과 함께 포용적인 국가정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발해를 오늘날 ‘한민족 국가’ 개념과 완전히 동일시하기보다는, 고구려 전통을 기반으로 한 독자적 다민족 국가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역사적으로 타당하다.
4. 발해와 한국사 인식 변화
발해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남북국시대론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발해에 대한 언급이 매우 제한적인데, 이는 고려·조선 초기의 사학자들이 통일신라 계승 의식과 대중국 사대관계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발해는 오랫동안 한국사 서술에서 소홀히 다루어졌으며, 이는 후대사학 한계로 평가할 수 있다.
다행히 최근에 이르러서야 남북국시대론이 점차 정착되며 발해의 위상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5. 상경성과 발해의 도시구조
발해의 도읍지인 '상경성' (상경용천부)은 발해 문화유적 연구 핵심지역이었다. 현재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에 위치한 상경성 터는 한때 훼손되었으나, 20세기 이후 발굴과 인공위성 조사로 전체 구조가 드러났다.
상경성은 조선시대 '한성'과 비슷한 규모였으며, 성벽 내부는 돌, 외부는 흙으로 축조되었다.
성 내부는 체계적인 도시 계획에 따라 남북으로 110m 폭, '주작대로'가 성을 2 등분했고,
총 81개 거주 구역이 배치되었다. 각 구역은 세로 30m, 가로 500m 정도였으며, 황성에는 궁전과 관청이 모여 있었다.
황성에는 5개 궁전이 있었으며, 제1·2궁 전은 국사집행 공간, 제4궁 전은 침전이었다.
동쪽에는 정원과 호수, 정자가 조성되어 있어 통일신라 안압지와 유사한 도시풍경을 형성했다.
성 둘레는 수천 미터에 달했으며, 성 내에는 다양한 관청, 사찰, 주거지가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도시규모로 미루어 당시 상경성 인구는 약 20만 명 수준으로 추정되나, 이는 확정된 수치가 아니라 도시면적과 정주환경을 바탕으로 한 학술적 추정이다.
상경성 내부 벽을 따라 온돌 시설도 발견되어, 발해가 한민족 전통 주거문화를 계승했음을 보여 주었다.
상경성 도시구조는 고구려와 당나라 영향을 받은 장안성· 낙양성 형태를 따랐으며, 평야 지대에 자리해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다.
궁전과 관청이 집중된 황성배치는 정치적 중심지 특성을 분명히 드러냈다.
6. 발해의 생활상과 문화
발해는 활발한 대외교류와 해상 무역을 수행했다. 연구에 따르면, 발해는 최대 300t 규모 선박을 운용했으며 당나라와 일본에 수십 차례 외교사절단을 파견했다.
이러한 기록은 발해가 동북아시아에서 중요한 외교·무역국가였음을 보여 준다.
발해 유적 중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 절터'에서는 구들이 있는 건물터, 발해식 기와가 발견되었다.
중국에서 재발굴된 서고성 '중경' 유적에서는 붉은색 손끝무늬 기와 나와 발해가 고구려 양식을 계승했음을 보여 주었다.
일부유적에서는 지배층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자 기와'가 발견되어, 당시 언어문화 일부도 엿볼 수 있었다. 발해 지배층은 고구려 언어를 사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니콜라 예쁘까 성'에서는 15만 평 규모의 토성이 발굴되었으며, 내부유물도 고구려 양상을 띠었다.
발해 고분벽화에는 무사, 악사, 시중 등이 그려졌으며 모두 고구려 양식을 따랐다.
연해주 '읍자부리' 지역에서도 발해 전초기지로 추정되는 유적이 확인되었다.
발해는 불교문화도 발달했다. 흑룡강성 '닝안시' 발해진에서는 높이 6m의 '대형석등'이 발견되었으며, 금화로 추정되는 유물도 출토되었다.
'정효공주묘' 벽화에는 무사, 시위, 내시, 악사 등 인물들이 그려져 당시 사회풍속을 보여 주었다.
7. 결론
발해는 동북아시아에서 거대한 영토와 독자적인 정치·문화체계를 가진 국가였으며, 고구려 문화를 계승한 한민족 국가였다는 점이 여러 유적과 유물에서 확인되었다.
상경성의 도시구조, 온돌과 기와, 벽화, 불교유물 등은 발해 독자적 문화를 보여 주는 중요한 근거였다.
따라서 우리 역사에서 발해는 단순한 주변국가가 아니라, 통일신라와 병존한 남북국시대 핵심국가로 인식되어야 한다.
발해 유적 발굴과 체계적 학술 연구는 앞으로도 능동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
ㅡ 초롱박철홍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