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 시대 10 ㅡ(발해 멸망과 역사적 의미)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99
ㅡ 남북국 시대 10 ㅡ
(발해 멸망과 역사적 의미)
발해는 698년 건국되어 926년 멸망할 때까지 약 230년간 동북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국가였다. 그러나 발해에 대한 기록은 제한적이며, 그 존재가 비교적 빨리 역사 속에서 사라진 이유에 대해 학계에서는 다양한 추정을 내놓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발해 멸망의 원인과 역사적 의미를 함께 살펴본다.
1. 발해 멸망, 무엇이 원인이었나?
1) 거란(요나라)의 침입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발해 멸망 원인은 926년 거란의 침입이다. 당시 거란은 '야율아보기'에 의해 건국된 신흥 강국으로, 만주와 몽골고원을 빠르게 장악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926년, 거란군은 발해 수도 '상경 용천부'를 함락시키고 마지막 발해 왕 '대인선'은 항복했다.
그런데 기록에 따르면 발해는 전쟁다운 싸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거란침략 3일 만에 항복했다고 전해진다.
해동성국이라 불릴 만큼 동쪽에서 번성한 나라 발해였는데 단 3일 만에 멸망한 정확한 이유와 자세한 역사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발해가 멸망한 이유는 거란침략뿐만 아니라 다른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아직도 연구하고 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발해멸망 이후 발해유민 약 10만~20만 명이 요나라로 강제이주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로써 발해는 정치적·군사적으로 완전히 소멸하였다.
2) 고구려인 지배층과 말갈 등 피지배층과 갈등심화
발해멸망 직접적 이유로 종족들 간 분열이 원인이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발해는 고구려 정신을 계승한 대조영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고구려인이 지배층이었다.
그런데 말갈족이 대부분이었던 피지배층과 갈등이 심화되면서 침략당했을 때 이미 국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거란은 발해가 고구려부터 계승해 온 군사적 방어방법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체계마저 한 번에 무너졌다고 보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도 추정일 뿐이다.
3) 백두산 폭발과 자연재해
흥미로운 학설로 10세기 전후 백두산 (장백산)대폭발이 발해 쇠퇴와 관련이 있다는 연구가 있다. 지질학적 분석에 따르면, 백두산은 946년 경 VEI 7급 대형 분화를 일으켜 화산재가 한반도 북부, 만주, 일본 북부까지 확산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백두산 폭발시점은 발해 멸망 이후 20년 정도 후이다. 이 점으로 봐서는 화산 때문에 발해가 멸망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최근 연구에서는 자연재해와 군사적 요인을 복합적으로 보는 관점이 힘을 얻고 있다. 즉, 백두산 폭발 이전, 그로 인한 기후변화가 발해 농업생산력과 국력약화에 일부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상태에서 거란침략이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결국 발해멸망 정확한 원인은 아직 확실치 않으며, 군사적, 자연적, 내부 구조적 요인이 맞물린 복합적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2. 발해멸망 이후 여러 소국들
1) 후발해(後渤海)
발해가 멸망한 직후, 중국 동북부 지역 (흑룡강·길림 일대)에서 발해 유민을 중심으로 형성된 소국이다. 약 926년경부터 존재했으나, 거란(요나라) 공격으로 10여 년 만에 소멸하였다. 발해왕족과 귀족중심 통치가 이어졌으나 군사적 약세로 오래가지 못했다.
2) 정혜후국(鄭惠後國)
러시아 연해주와 함경북도 인근에서 10세기 초 등장한 발해 유민소국이다. 발해 멸망 후 북쪽으로 이동한 유민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내부 정치가 약해 주변 강대국에 흡수되면서 오래 존속하지 못했다.
3) 대위국(大渤國)
발해 옛 영토 일부, 주로 연해주와 함경북도 지역에서 존재한 소국으로, ‘대발해국’이라고도 불렸다. 발해왕족 후손이 명목상 통치했으나, 내부혼란과 외부 압력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였다.
4) 말갈·거란 혼합 소국
발해멸망 이후 동북지역에는 발해 유민과 말갈족, 일부 고구려 유민이 섞여 형성한 소규모 국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발해 정치·문화적 전통을 일부 이어갔으나, 10세기말 거란 팽창과 압박으로 대부분 흡수되며 사라졌다.
3. 발해, 우리 민족사에서의 의미
발해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영토가 넓거나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발해는 고구려 정신과 문화를 계승한 한민족 국가 였다.
건국자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 출신이었다.
발해 왕실과 사회는 스스로를 고구려 후예로 인식했다.
발해의 문화, 제도, 불교, 온돌, 장례 풍습 등은 고구려 전통을 계승하였다.
특히 발해 유적에서 발견된 온돌과 장례 문화는 당시 한민족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발해는 당, 일본, 거란 등과 대등한 외교를 수행하며 광대한 영토와 체계적인 행정제도를 갖추었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지역 국가가 아니라 동북아 국제 질서 속에서 중요한 강국이었음을 보여준다.
발해의 역사적 의미는 고구려 멸망 이후 끊어진 듯한 한민족 북방사의 연속성을 이어주었다는 점이다. 고려는 발해 유민을 수용하며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강화할 수 있었다. 또한 고구려와 발해는 한반도의 북방 방패 역할을 수행했다. 두 국가가 멸망한 이후 한반도는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 민족과 반복적으로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4. 결론
발해는 23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존재했지만, 동북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국가였다. 멸망은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자연재해와 국제 정세, 내부 구조적 한계가 맞물린 복합적 사건이었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한민족 국가로서 북방사 연속성을 유지했으며, 오늘날 한민족 고대사와 동북아 역사 이해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제한된 기록 속에서도 발해 연구는 우리 민족 뿌리와 정체성을 확인하는 핵심 자료로 자리한다.
발해사 연구는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는 작업이 아니라, 현대와 미래를 설계하는 역사적 기반이기도 하다.
발해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한민족 고대사의 뿌리를 확인하고, 동북아 역사 속 우리 위치를 재정립할 수 있다.
다음 편에서는 통일신라 혼란기가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