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02

해상왕 장보고 2- 해상왕 꿈은 좌절되었는가?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02

ㅡ 남북국 시대 13 ㅡ

(해상왕 장보고 2- 해상왕 꿈은 좌절되었는가?)


'장보고'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 <해신>은 장보고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에 허구를 결합하여 장보고라는 인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서사적 틀을 제공한다. 또한, 장보고를 역사 속 인물로만 존재하게 하지 않고 대중적인 인물로 부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제 역사 속 장보고는 9세기 통일신라 하층계급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은 '궁복'(弓福)으로 기록에 따라 '활보', '쿵파' 등으로도 불린다. ‘궁(弓)’이 활을 뜻하는 만큼 활과 관련된 별칭이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이를 '해신'이라는 드라마에 나온 것처럼 곧바로 “활 잘 쏘는 뱃놈”이라는 의미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다만 그가 일찍부터 해상활동과 무력을 익힌 인물이었다는 점은 여러 기록과 정황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궁복'은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성장하다가 청년시절 당나라로 건너가 군인으로 활동했다. 당에서 그는 단순한 용병 수준을 넘어 상당한 군사경험과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인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라로 귀국한 그는 당에서 쌓은 군사적 경험과 국제적 감각을 바탕으로 해상활동을 본격화하며 명성을 쌓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장보고(張保皐)’로 바꾼다. 개명 이유는 사료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장(張)’이 본래 그의 성씨였을 가능성, 그리고 ‘보고(保皐)’가 해상활동이나 광역적 영향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럼 장보고에 대해 좀 더 세밀하게 알아보자


1. 청해진과 해상권력 형성


장보고는 귀국 이후 해상에서 기승을 부리던 해적을 소탕하며 세력을 확대했다.


828년 신라왕실로부터 '청해진' (淸海鎭, 현 완도) 설치허가를 받는다.


당시 청해진은 단순한 군사력이 아니라, 신라·당·일본을 잇는 동아시아 해상무역과 방어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했다.


이로써 장보고는 막대한 부와 독자적 군사력을 동시에 확보하게 되었다. 이는 그를 단순한 지방 유력자를 넘어선 초국경적 해상 세력 수장으로 만들었다.


이 점에서 장보고는 이후 내륙을 기반으로 성장한 호족들과는 성격이 다른, ‘해상기반 호족원형’이라 할 수 있다.


2. 중앙정치 개입과 혼인시도


통일신라 말기에 접어들면서 '골품제'는 점차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중앙진골귀족들은 사치와 권력다툼에 몰두했고, 왕권은 약화 되었으며, 지방에서는 호족 세력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왕위는 안정적이지 못했다. 여러 세력이 중앙귀족들과 연합하여 쿠데타를 통해 왕을 교체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장보고 역시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그는 자신 딸을 신라왕족과 혼인시켜 중앙 귀족사회에 편입하고자 했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야망 이라기보다 해상권력을 제도권 권력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장보고는 신라왕족으로 청해진에 피신 온 '김우징'(金祐徵)과 손을 잡고 쿠데타를 도모했다. 그 결과 김우징은 839년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된다. 신무왕은 장보고 군사력에 힘입어 즉위했으나, 재위기간은 불과 3개월에 불과했다. 이후 왕위는 그의 아들 '문성왕'에게 넘어간다.


3. 약속파기와 권력충돌


문성왕은 장보고 지원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장보고와 신분차이 때문에 약속했던 혼인을 끝내 성사시키지 못한다. 이는 문성왕 개인 선택이라기보다 여전히 강력했던 골품귀족사회 집단적 반발에 따른 것이었다. 이 시점까지도 골품제는 완전히 붕괴되지 않았다. 하층출신인 장보고가 왕실사돈이 되는 것은 당시 골품귀족들에게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문성왕은 동시에 장보고 세력이 지나치게 커졌다는 점을 심각하게 인식했다. 왕권강화를 위해 그를 견제하기 시작한다.


결국 장보고와 중앙권력은 구조적으로 공존이 불가능한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에 장보고는 강한 배신감을 느끼며 반발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실제로 반란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모의단계에 그쳤는지를 두고 사료 간 차이가 존재한다.


'삼국사기'는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하여 장보고를 '반역열전'에 수록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장보고가 원망하여 반란을 모의하려 했다고만 기록하여 실행 여부는 불명확하다.


이 차이는 단순한 사실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유교적·왕권 중심적 시각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4. 장보고 암살과 그 시점 논쟁


문성왕은 장보고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장보고 최측근이었던 '염장'(閻長, 탤런트 송일국)을 회유해 그를 암살하게 한다. 장보고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인물 손에 의해 생을 마감한다.


최측근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은 역사 속에서 드물지 않은 일이다. 고려 공민왕이 그랬고, 현대에 들어서도 박정희 대통령이 그랬다.


장보고 사망시점을 두고도 논쟁이 있다.


'삼국사기'는 846년(문성왕 8년),

'속일본후기'는 841년 11월,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844년 전후에 청해진에 큰 변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삼국사기는 당시 신라 역사서를 보고 기록한 것이라 가장 신뢰성 중시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기록과 엔닌 기록은 거의 장보고 암살 동시대에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완전히 배제하기도 어렵다. 이로 인해 장보고 사망 시점은 여전히 학계쟁점으로 남아 있다.


5. 장보고 이후와 호족세력 본격 성장


장보고 제거는 일시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통일신라 후기 지방분권화 가속했다.


이후 해상무역이나 대규모 농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지방세력들이 속속 등장했고, 이들은 사병을 보유하며 독자적 군사력을 갖추게 된다.


장보고는 이 흐름 출발점에 서 있는 인물 이었다. 그의 활동은 신라 말 호족세력 성장과 지방 자치의 초기단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사례다.


6. 장보고는 실패한 혁명가인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질문할 수 있다. 장보고는 실패한 혁명가였는가?


한편으로 그는 분명 실패했다.

하층민 출신이라는 한계를 넘지 못했고, 중앙귀족사회 편입하려는 시도는 좌절되었으며, 결국 기존 질서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 점에서 장보고는 골품제라는 벽 앞에서 좌절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장보고는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장보고는 혈통이 아니라 경제력· 군사력· 국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권력을 구축했다.


이는 이후 고려건국 세력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권력모델의 선구적 형태였다.


왕건이 성공한 길을 장보고는 너무 이른 시기에 시도했을 뿐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따라서 장보고는 단순한 반역자도 무모한 야심가도 아니다.


그는 기존질서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시점에 등장한 강력했던 변화 징후였다.


장보고 실패는 개인과욕 때문이라기보다는,

시대가 아직 장보고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7. 결론


장보고는 분명히 신라역사에서 중요한 인물 이었다. 그의 해상 무역과 군사력 기반 권력구축은 후에 등장한 고려의 새로운 권력 모델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실패는 단지 시대적 한계뿐만 아니다. 정치적 실수와 불완전한 전략에 기인했다고도 봐야 한다.


장보고 실패한 혁명을 지나치게 "시대가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묘사하는 것은 그의 정치적 접근법 미숙함을 간과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장보고 실패는 단순한 시대적 차이로만 설명될 수 없다. 그의 실행력 부족과 정치적 전략 부재가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냉철히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어서 <진성여왕과 후삼국시대 도래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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