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 시대 15– 진성여왕과 후삼국 도래 2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04
ㅡ 남북국 시대 15–
(진성여왕과 후삼국 도래 2)
“진성여왕” 편으로 글을 시작했을 때, 많은 댓글과 관심이 쏟아졌다.
왜 사람들은 이 편에 특별히 호기심을 가졌을까?
조금 야릇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기대는 아니었을까? ^^
중국사에서 여성 절대권력자는 흔히 두 명이 떠오른다. '측천무후'와 '서태후'다.
'측천무후'는 남성편력이 있었다 전해지지만, 중국 역사상 최초 이자 유일한 여성황제로서 통치 능력은 뛰어났다. 영토를 넓혔고, 백성들을 위한 정책도 탁월했다.
'서태후'는 남성편력뿐만 아니라 엄청난 사치 등으로 청나라 멸망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역사적 이미지를 단순 비교하면, '진성여왕'은 측천무후보다는 서태후에 가까운 평가를 받는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진성여왕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는 천년역사를 마감했기 때문이다.
1. 진성여왕과 성적문란 이미지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진성여왕 남성편력에 대한 직접 기록은 없지만 간접적 해석 여지가 있다. 반면 '삼국유사' 등 야사에는 음탕한 남성편력 이야기가 더 강하게 전해진다.
진성여왕이 정말 성적문란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역사적 기록보다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와 시대적 편견이 결합된 결과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 이야기들은 다음 편에서 상세히 정리하겠다.
2. 진성여왕 이전 왕들 상황
진성여왕 아버지 '당나귀 귀, 경문왕'은 어렵게 왕위에 올랐고, 네 명 자녀가 있었다.
진성여왕에게는 오빠가 둘 있었고, 둘 다 왕위를 이어받았다.
1) 헌강왕 (49대, 재위 875~886)
경문왕 첫째 아들로 신라 제49대 왕이다.
대규모 연회와 사치에 집중했고, 지방호족 성장을 방치했다.
이 시기에 조세제도 붕괴 조짐이 보였고, 중앙귀족 분열이 악화된다.
헌강왕은 이런 문제를 덮어둔 채 시간만 소비했다.
2) 정강왕 (50대, 재위 886~887)
헌강왕의 동생으로 재위 기간은 1년 미만이었다. 그러다 보니 실질적 정책기록은 거의 없다.
헌강왕시절 이미 약화된 왕권 그대로 계승했고 곧바로 사망했다.
이어 진성여왕 (51대, 재위 887~897)이 등극했다.
신라 제51대 왕, 마지막 여왕이다. 진성여왕 이후에도 다섯 왕이 즉위하지만 모두 껍데기만 왕이었다.
그래도 그 왕들도 대략 살펴보자.
3. 진성여왕 이후 왕들
1) 효공왕 (52대, 재위 897~912)
진성여왕이 선위 한 왕이다.
이유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진성여왕이 평화적으로 선위 왕실 내 분열은 최소화했다.
이때부터 신라 왕들은 수도 경주 일대만 실질 통제했다.
지방은 이미 호족 자치구역이 되었고, 이미 견훤(후백제)· 궁예(후고구려) 세력이 성장 중이었다
군사력은 거의 없었고 중앙군은 유명무실 해졌다
신라 왕권이 ‘명목상 존재’만 하게 된 첫 왕 으로 평가받는다.
2) 신덕왕 (53대, 재위 912~917)
특이하게 '김 씨 왕족'이 아닌 '박 씨 귀족'이 왕위에 올랐다.
그만큼 왕통 자체가 불안정해졌음을 뜻한다.
귀족연합 추대로 왕위에 오르다 보니 독자적 권력기반이 전혀 없었다.
이때 지방호족은 완전히 독립했고
후백제 지속적 압박이 자행된다.
신라왕실은 더 이상 권력 중심 아니었고 왕위가 ‘귀족조정용 직책’으로 전락했다.
3) 경명왕 (54대, 재위 917~924)
신덕왕 아들로 왕위세습이 형식적으로만 유지되었다.
왕은 외교적 상징에 가까웠고
군사·재정 통제력 없었다.
이 때는 후백제·후고구려가 전국을 분할하여 후삼국시대가 완전하게 시작되었다.
신라는 완전한 경주 부근 지역국가로 축소된다.
외교적 중재조차 불가능했다.
이 당시 신라는 ‘후삼국 중 하나’가 아닌 ‘잔존 세력’이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4) 경애왕 (55대, 재위 924~927)
귀족합의로 다시 김 씨 왕이 추대되었다. 왕은 상징에 불과했다.
927년, 후백제 견훤이 경주 침입하여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연회 중 자결(혹은 피살)했다.
신라수도 경주가 외적에게 유린되었고, 왕 안전조차 보장되지 않아 왕권붕괴가 공개적으로 드러났다.
신라왕권 실질적 ‘사망선언’이었다
6) 경순왕 (56대, 재위 927~935)
신라 마지막 왕이다.
후백제 견훤에 의해 사실상 옹립되었고, 왕권은 후백제 보호 대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935년, 견훤의 오만함에 질려 고려태조 왕건에게 항복한다
서러운 마의태자 전설만 남기고 이로써 천년신라는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진성여왕 이후 신라왕들 공통점은 나라를 다스린 군주가 아니라 사라져 가는 국가를 정리해 간 ‘관리자’였다는 것이다
진성여왕 시대는 지방통제 상실, 농민봉기 발생, 귀족권력분열에 직면해 있었다. 진성여왕도 나름 개혁을 시도했다. 실행수단 부족으로 결과를 얻지는 못 했다.
사실 통일신라 말기 붕괴는 진성여왕 이전부터 이미 누적된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됐다.
그럼에도 진성여왕에게 신라멸망 비난이 집중된 이유는 여성 통치자라는 이유로 유교적 사관에서 비판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멸망직전 왕이라는 이유로 책임전가도 있다. 사실 진성여왕 이후 왕들이 다섯 명이나 더 존재했음에도 진성여왕만 부각시킨 것이다.
게다가 역사기록을 간접적으로 해석해서 성적문란과 음탕설화까지 덧 붙였다.
진성여왕은 통일신라 몰락 원인이 아니라 누적된 붕괴를 정면으로 맞은 첫 왕이었다.
다음 편에서는 진성여왕 성적문란 논란과 개혁정책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녀가 통일신라 말기를 어떻게 관리하려 했는지를 정리하겠습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인터넷에서 찾은 진성여왕 초상화인데 어떤 초상화가 더 진성여왕에 가깝게 느껴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