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여왕은 과연 ‘망국의 팜므파탈’이었는가?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05
ㅡ 남북국 시대 16 –
(진성여왕과 후삼국 도래 3 -
진성여왕은 과연 ‘망국의 팜므파탈’이었는가?)
'진성여왕'은 흔히 성적으로 문란했고, 음란한 남성편력으로 신라멸망을 재촉한 인물로 기억된다.
이 때문에 신라망국(亡國)을 불러온 ‘팜므파탈’처럼 묘사되곤 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과연 사료에 근거한 역사적 사실일까? 아니면 후대 왜곡된 해석일까?
앞편에서 언급했듯이 진성여왕 즉위에는 직전 왕이자 친오빠였던 '정강왕' 유언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 유언에는 <진성여왕 골격이 남성적이다> 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를 외모가 남성적이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오해에 가깝다. 당시의 표현 맥락에서 이는 왕권을 유지할 만큼 체격과 기질이 강건하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야사나 설화에서는 진성여왕 여성적 미모가 뛰어났다는 전승도 함께 전해진다.
진성여왕 즉위가 특이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 시기에는 진골출신 남성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원래 신라에서 왕위는 성골만이 계승할 수 있었으나, 이 원칙은 '김춘추'(무열왕) 때 깨졌다. 이후 진골출신도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된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김춘추 이전 시기로 성골 남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성여왕 시대는 상황이 달랐다. 진골출신 남성들이 충분히 존재했음에도 여왕으로 즉위한 것이다.
이에 대해 '조범환' 서강대교수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신라하대에 이르면 골품제 내부에서 ‘골(骨)’이 다시 ‘족(族)’과 ‘가(家)’로 분해되며, 특정 ‘가문’이 왕위를 독점하려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로 인해 다른 가계 남성보다 직계 내부인물을 왕으로 세울 필요성이 커졌다.]
'헌강왕'이 사망했을 당시, 그의 아들 '요'(嶢, 훗날의 효공왕)는 서자였고 나이가 어려 즉각적인 즉위가 어려웠다. 이에 왕위는 헌강왕 동생인 정강왕에게 넘어간다.
정강왕이 사망했을 때는 아들도 없었고 남동생도 없었다.
이 시점에서 보면 왕위계승 유력 후보는 분명 존재했다. 정강왕 숙부이자 '경문왕' 친동생, 당시 최고 관직인 상대등에 오른 인물, 바로 '각간위홍'이다.
그는 진성여왕 친숙부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강왕은 이 숙부를 후계자로 지목하지 않았다. 이는 의도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결국 왕위는 ‘다른 가계 유력남성’이 아니라 직계혈통인 진성여왕에게 돌아간다.
진성여왕과 각간위홍 관계를 두고 흔히 불륜으로 규정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당시 기준에서 그것은 결코 낯선 일이 아니었다.
신라왕족과 귀족사회에서는 '근친혼'이 매우 일반적이었다. 이는 혈통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만 보아도 다음과 같다.
'진흥왕' 아들 '동륜태자'는 자기 친고모와 결혼했다.
'김유신'은 '김춘추' 처남이자 사위였다. 김유신은 김춘추와 자기 여동생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딸과 60세가 넘어 결혼했다.
이러한 혼인 관계로 인해 한 인물이 할아버지이자 외삼촌이 되고, 고모이자 외할머니가 되는 촌수 계산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 빈번히 발생했다.
이 모든 혼란의 근본 원인은 단 하나였다. 왕족과 귀족들이 혈통 순수성을 무엇보다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신라만 특수성이 아니다.
고려초중기 역시 유사했으며, 중세 서유럽 왕실에서도 근친혼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결국 진성여왕을 둘러싼 ‘문란한 여왕’, ‘망국의 원흉’이라는 이미지는 당시 사회구조와 혼인관행을 고려하지 않은 채 후대 유교적 도덕관념과 정치적 책임론이 덧씌워진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의 진성여왕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1. ‘성적 문란’ 근거는 어디에서 왔는가?
진성여왕 성생활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주로 정사 '삼국사기' 진성여왕 열전 기록에서 비롯된다.
[진성여왕이 각간 위홍과 통(通)하였다.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젊은 남자 2~3명을 은밀히 불러들여 음란한 행위를 했고, 그들에게 요직을 맡겨 국정이 문란해졌다.]
여기서 핵심은 ‘통(通)’이라는 표현의 해석이다. 이 한자는 분명 사적인 관계, 즉 '사통'(私通) 의미로도 쓰이지만 이를 노골적인 성적난행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는지는 별개 문제다.
더구나 '삼국유사'에서는 '각간위홍'을 진성여왕 배필로 기록하고 있다. ('각간'은 골품제 대아찬급에 해당하는 최고위층 직급이다) 즉, 동일 인물에 대해 사서 간 인식 자체가 다르다.
김부식을 비롯한 고려후기 유학자들은 여성군주 사적관계를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삼국사기' 기록은 객관적 사실 묘사라기보다 유교적 가치관이 개입된 도덕평가로 읽을 필요가 있다.
2. ‘남성편력’ 서사의 형성과정
조선 이후 야사와 설화로 내려오면서 이야기는 점점 과장된다.
진성여왕이 한 명의 남자로는 만족하지 못해 여러 남자와 난교를 벌였다는 식의 서술은 사료적 근거가 전혀 없다.
실제로 당시 제도상 여왕은 공식적으로 최대 세 명의 남편을 둘 수 있었다. 또한 어느 시대든 군주가 측근이나 후궁을 거느리는 일은 일반적이었다.
그럼에도 진성여왕만 유독 신라 멸망의 원흉처럼 묘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진성여왕 시대 근접하여 신라가 멸망하고 마는 정치적 실패를 성적 도덕문제로 치환한 후대 사관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위홍은 진성여왕 친숙부이자 실권귀족이었다. 그와 관계는 단순한 사생활이 아니라 왕권유지 위한 정치적 연대로 볼 여지도 충분하다. 이를 반대하던 귀족 세력이 여왕을 공격하기 위해 ‘음란한 여왕’ 프레임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 진성여왕 시대의 실상: 이미 무너진 국가
진성여왕이 즉위했을 무렵, 통일신라는 이미 회복불가능한 상태였다.
왕권은 약화되었고 귀족들은 사치와 권력남용에 빠졌으며 조세와 부역부담으로 농민불만이 폭발했다
그 결과 889년 '원종·애노의 난'이라는 대규모 농민봉기가 발생했고 이후 지방통제력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이후에도 '적고적'(赤袴賊) 같은 도적집단 횡행했고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독자세력을 형성했다.
이 과정에서 '양길, 궁예'와 '견훤' 같은 인물이 등장하며 후삼국 시대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즉, 진성여왕은 몰락을 초래한 군주라기보다 몰락이 이미 진행 중인 국가를 맡은 통치자 였다.
4. 진성여왕 실질적 업적: '삼대목'과 개혁의지
그럼에도 진성여왕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군주는 아니었다.
1) '삼대목'(三代目) 편찬
888년, 여왕은 '각각위홍'과 '대구화상'에게 명해 향가를 수집·정리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삼대목'이다.
비록 원본은 전하지 않지만,
'삼국유사'와 '균여전'에 남아 있는 향가들 <서동요, 제망매가, 찬기파랑가,보현십원가>
등은 모두 '삼대목' 계통으로 추정된다.
'삼대목'은 향가를 최초 체계화한 문헌이며 신라인 언어·정서·사상을 기록으로 남긴 문화사적 업적이다
이는 단순한 문학사업이 아니라
왕권 신성화와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한 시도로도 해석할 수 있다.
2) 최치원 '시무 10조' 수용
894년, 최치원이 개혁안인 '시무 10조'를 올리자 진성여왕은 이를 받아들여 그를 아찬(6등급)으로 등용했다. 최치원은 골품제상 진골귀족이 아니었고 6두품 출신이었다.
시무 10조 내용은 전하지 않지만,
골품제 개혁, 호족 억제, 왕권강화
조세·인사제도 개편 등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비록 귀족반발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지만 진성여왕 개혁의지 자체는 분명히 존재했다.
만약 진성여왕이 단순히 향락에 빠진 무능한 군주였다면 최치원이 시무 10조를 올릴 이유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5. 자진퇴위와 요절, 그리고 의문
진성여왕은 재위 11년째인 897년, 모든 혼란을 자신 부덕으로 돌리며 자진퇴위했다.
이후 반년 만에 30대 초반 나이로 사망한다.
신라역사에서 유례없는 이 사건은 단순한 양위라기보다 정치적 압박 또는 쿠데타 가능성을 시사한다. '신덕왕'(김요)과 '박예겸' 중심으로 한 세력 개입설이 나오는 이유다.
6. 결론: ‘음란한 여왕’은 역사적 인물이 아니다
어떤 사료에도 진성여왕 구체적 성행위, 난교, 방탕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녀가 그렇게 기억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통일신라 말기 여성군주로서 국가 멸망에 가장 근접한 시대에 재위했다는 것이다. 즉 통일신라 말기 정치실패를 성적 도덕문제로 환원한 유교사관 영향이 크다.
진성여왕은 통일신라를 멸망시킨 인물이 아니라 이미 무너지고 있던 통일신라 마지막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다.
신라가 진성여왕 때문에 망했다는 주장은 조선이 '이완용' 한 사람 때문에 망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어서 통일신라 몰락 구조적 원인 <골품제와 6두품 사회>에 대해 정리하겠습니다.
― 초롱박철홍 ―
아래 시험문제 진짜 어렵습니다.
이 글을 몇 번 읽어도 답을 맞히기 어려울 것입니다. 힌트는 진성여왕 때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난 7년 뒤'라는 것입니다.
그냥 비슷한 시기라 생각하면 됩니다.
좀 깊이 아는 분들이 더 헷갈릴 것입니다. 궁예가 태봉을 건국할 때는 진성여왕시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라 진성여왕 때를 배경으로 한 신상옥 감독의 영화 '천년호'(1969)의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