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 시대 17 – 신라 골품제와 6두품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06
ㅡ 남북국 시대 17 –
(신라 골품제와 6두품)
세계사에서 고대사는 물론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사회에는 언제나 일정한 형태의 신분제가 존재해 왔다. 이러한 신분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대체로 혈통, 즉 핏줄이었다.
그런데 세계사적으로 매우 이례적 신분제를 운영한 나라가 있었다. 바로 신라이다. 신라는 신분을 구분하는 명칭으로 ‘뼈’를 뜻하는 골(骨) 자를 사용하여 이를 <골품제>(骨品制)라 불렀다.
물론 명칭은 ‘뼈’였지만 실질적은 혈통에 기반한 신분구분이라는 점에서 다른 고대 사회와 완전히 다르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신분체계 공식명칭과 제도운영 전반에 ‘골’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점은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드문 사례라 할 수 있다.
'골품제'는 단순히 귀족과 평민을 나누는 일반적 신분제가 아니다. 왕족과 귀족은 물론, 평민층 내부 까지도 여러 등급으로 세분화하여 각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활동범위를 엄격하게 규정한 폐쇄적 신분체계였다. 이러한 점에서 골품제는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제도였다.
이처럼 강한 폐쇄성을 지닌 골품제는 신라가 ‘서라벌’ 중심으로 한 소규모 집단에서 출발해 주변지역을 정복하고 그 주민들을 신라사회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즉, 기존 지배층과 새로 편입된 집단을 구분하고 통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던 것이다.
골품제와 6두품 사회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
1. 골품제의 구조 : 성골·진골과 두품제
골품제는 크게 왕족·귀족계층과 평민계층으로 나뉘었다.
왕족과 귀족층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구분되었고,
평민층은 6두품 이하의 '두품제'로 나뉘었다.
먼저 성골(聖骨)은 왕족 중에서도 왕위 계승이 가능한 최고신분을 가리킨다.
진골(眞骨)은 역시 왕족이지만, 성골이 소멸한 이후에야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계층을 의미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여왕조 (654년 3월, 음력)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나라사람들은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여왕까지의 28명을 성골이라 하였고, 무열왕부터 마지막 왕 까지를 진골이라 하였다.]
(國人謂始祖赫居世至眞德二十八王, 謂之聖骨, 自武烈至永校勘王, 謂之眞骨)
이 기록에 따르면 진덕여왕(재위 647~654) 이후 성골 계층이 사라졌고, 태종무열왕 (김춘추)부터 진골출신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기록만으로는 성골과 진골의 구체적 기준을 명확히 알기는 어렵다.
'삼국유사'에는 “성골 남자가 없어 성골 여자가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같은 왕족 내부에서도 왕위계승권 가진 계통과 그렇지 못한 계통이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부모가 모두 왕족일 경우 성골, 부모 중 한쪽만 왕족일 경우 진골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이는 후대 추정에 불과하다. 오늘날까지도 성골과 진골의 정확한 구분 기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명확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다.
일부 견해에서는 성골을 궁정 내부에 거주할 자격을 가진 직계 왕족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 경우, 진지왕이 폐위되면서 그의 후손들이 자연스럽게 진골로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2. 두품제와 골품제의 운영 방식
왕족·귀족층 아래에는 6두품, 5두품, 4두품, 3두품, 2두품, 1두품으로 이어지는 '두품제'가 존재했다. 숫자가 낮아질수록 신분은 낮아졌다.
특이한 점은, '골품제'가 절대적인 직업 배타제도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골품제는 각 신분이 오를 수 있는 최고 한계를 규정한 제도였기 때문에, 상위 골품자가 하위 골품 관직이나 직업을 맡는 것은 가능했다.
즉, 성골·진골이나 6두품 출신이라 하더라도 태어날 때부터 최고 관직을 맡는 것은 아니었으며, 반대로 골품이 높은 사람이 신분이 낮은 사람이 주로 담당하던 직업을 갖는 것 또한 제도적으로 금지되지는 않았다.
골품제는 신라 건국초기부터 왕족과 귀족 간 신분 차이가 존재했던 데서 기원했으나, 제도적으로 정비된 것은 '법흥왕'(재위 514~540) 시기로 추정된다.
법흥왕은 불교공인(527년)과 율령반포(520년경)를 통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으며, 이 과정에서 골품제 역시 제도적 틀을 갖추게 되었다. 골품제 존재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기록은 '진흥왕'(재위 540~576)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이후 신라 사회의 정치·사회 구조를 규정하는 핵심제도로 자리 잡았다.
3. 통일신라와 6두품의 등장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에도 골품제를 유지·강화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진골 귀족층 사치와 향락, 정치적 무능 심화되었고, 9세기 이후 통일신라는 점차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지방호족 세력이 성장하면서 골품제 권위는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6두품(六頭品) 출신 인물들이 있었다.
6두품은 골품제 내에서 비교적 높은 신분 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으로는 분명한 한계를 지녔다. 이들은 유학자, 행정 관리, 학자 등으로 활동하며 국가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최고 관직인 '상대등'(上大等) 비롯한 1~2품 관직에는 오를 수 없었다.
결국 6두품은 지식인 계층으로서 사회적 역할은 컸으나 신분적 한계로 인해 정치적 불만을 누적시킬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골품제는 계층별로 의복색깔, 주거규모, 수레사용 여부까지 엄격히 규제하며 일상생활 전반을 통제했다. 이러한 불평등에 대한 불만은 통일신라 후기로 갈수록 점점 커졌다.
4. 6두품의 좌절과 새로운 모색
당나라에서까지 명성을 떨친 6두품 출신 학자 '최치원'은 진성여왕에게 골품제 개혁을 포함한 '시무 10조'를 건의했다. 진성여왕은 이를 받아들이려 했으나, 진골귀족들 강력한 반대로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6두품 계층이 신라 체제 자체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일부 6두품 출신 인물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호족세력과 연합하거나, 중앙정치에서 물러나 유교·불교·도교 등 사상과 종교 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대표적인 6두품 출신 인물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있다.
-원효 : 불교 사상가
-설총 : 유학자, 이두 정리
-최치원 : 문신이자 사상가
이들은 신라말기 혼란 속에서도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6두품 출신 인물들은 신라멸망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골품제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모색하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5. 고려로 이어진 6두품의 역사적 의미
통일신라는 결국 쇠퇴하여 후삼국 시대로 접어들었고, 이 과정에서 6두품 출신 인재들은 고려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통일신라 6두품 출신 '최치원' 손자(혹은 아들로 전해지기도 함)로 알려진 '최승로'이다. 그는 고려 성종 때 '시무 28조'를 올려 고려 국가체제 정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고려는 신라의 골품제를 폐지하고, '광종' 대에 과거제를 도입함으로써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로 나아가게 된다.
결과적으로 6두품 출신 인물들은 신라 멸망과정에서 중요한 역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신라체제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시대인 고려 출현에 사상적·제도적으로 기여한 집단이었다.
6. 대표적 6두품 인물
1) 원효(元曉, 617~686)
신라를 대표하는 불교 사상가로, '대승기신론'을 해석하고 '화쟁사상'(和諍思想)을 주장했다. 그는 귀족중심 불교가 아닌 민중불교를 강조하며 신라 사회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원효는 6두품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관직에 나아가기보다는 수행과 연구에 집중했다. 진골 출신으로 화엄종을 개창한 '의상'과는 자주 비교된다.
그의 '무애사상'(無碍思想)은 불교를 평민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으며 그 영향은 고려시대 이후까지도 이어졌다.
2) 설총(薛聰, 8세기 초 활동)
신라 대표적인 유학자로, 한문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신문왕'에게 유교 정치이념을 제시했으며, '이두'(吏讀) 체계를 정리해 향가전승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설총'은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이야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와 오늘날까지도 널리 전해진다.
3) 최치원(崔致遠)
신라말기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개혁가로 앞 편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4) 기타 6두품 출신 인물
-강수(强首) : 외교 문서 작성에 능했던 문장가
-공복(孔福) : 신라 말기 고려에 협력한 문신
-최승우(崔承祐) : 후백제에서 활동한 학자
(일부 인물의 경우 6두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지만 6두품 출신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 이다)
이처럼 6두품 출신 인물들은 정치적 제약 속에서도 학문·사상·종교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신라멸망 이후 고려사회 정치·사상적 기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어서 <호족세력 성장과 후삼국 시대의 개막>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