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시대 (889~936) 2 ㅡ후백제를 건국한 인물, 견훤)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08
ㅡ 후삼국시대 (889~936) 2 ㅡ
(후백제를 건국한 인물, 견훤)
'견훤'(甄萱)은 867년경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는데, 전라도 '완산주' 일대(현 전북 익산·전주·남원) 혹은 경상도 '상주'(현 경북 상주) 지역으로 추정된다.
출신지역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견훤'이 900년 '완산주'를 수도로 삼아 '후백제' 건국하여, '후삼국시대'를 본격적으로 개막시킨 핵심인물이라는 점이다.
이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 성장 배경과 인물적 성격을 차례로 살펴보자.
1. 통일신라 말기와 지방호족의 성장
견훤이 태어나 활동하던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로, 중앙정부 통치력이 급격히 약화되던 시기였다.
왕권은 흔들렸고 조세수취와 군사동원체계 는 붕괴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각 지방에서는 독자적인 군사력과 행정력을 갖춘 '지방호족'(豪族) 들이 급속히 성장했다.
지방호족이란 통일신라 말기 중앙정부 통제에서 벗어나 일정 지역에서 사실상 자치권을 행사하던 세력을 말한다.
이들은 성을 쌓고 사병을 거느리며 일부지역 에서는 중앙정부 대신해 행정·군사기능을 수행했다.
대표적으로 경주일대 김 씨 왕실계 호족, 김해지역 세력, 그리고 충청·전라도 일대
이 씨·유 씨 계열 가문들이 각 지역 유력자로 부상했다.
견훤 아버지로 알려진 '아자개'는 이 씨 성을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견훤 역시 이 씨 였으며, 후에 완산주에 수도를 정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일부 설에서는 견훤이
전주 이 씨, 즉 조선 태조 이성계 조상이라는 주장도 전해진다.
어쨌든 이 시기는 국가보다 먼저 무장한 지역 권력자들이 등장한 시대였다.
2. 견훤의 출신 배경 – 사서 기록의 차이
견훤 출신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이 서로 다르다.
김부식이 편찬한 정사 삼국사기는 견훤을 신라출신 인물로 기록한다. 그의 아버지는 '아자개' (阿慈介)로 상주사람이며, 견훤 역시 상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나 신라군인으로 성장했다고 서술한다. 이후 견훤은 군사적 공로를 쌓아 장군으로 활약하다 마침내 신라에 반기를 들고 후백제를 건국한 인물로 묘사된다.
반면,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는 보다 설화적인 전승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기록에서는 견훤 아버지 '아자개'를 북방에서 남하한 고구려유민 계통으로 전한다. 견훤 역시 고구려계 인물로 인식되는 서술이 나타난다. 또한 견훤 출생지를 '완산주' 인근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사서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가 유교적 가치관과 신라중심 사관에 입각한 정사 라면, '삼국유사'는 불교적 세계관과 민간전승을 폭넓게 수용한 역사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 유민설은 후대 인식과 영웅화 과정이 반영된 설화의 일종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견훤과 아자개는 이후 극심한 원수지간이 되었고, 견훤은 상주를 무력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918년, 아자개가 견훤이 아닌 왕건에게 항복하며 귀의한 사건은 견훤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이로 인해 견훤은 아버지조차 멀리할 정도로 포악하고 거친 인물이라는 인상을 강화했다. 이는 왕건의 포용력과 대비되며 민심이반을 초래했다. 결국 이러한 민심이반은 견훤이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결정적 장애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견훤과 아자개가 실제로는 부자관계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등 여러 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견훤과 아자개를 부자관계로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는 김부식이 견훤을 ‘신라체제 내부 반역자’로 만들기 위해 신라호족 아버지를 설정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결국 견훤의 정확한 출신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가 신라체제 내부에서 성장했고, 신라군인으로서 체계적인 군사 경험을 쌓았다는 점만은 비교적 분명하다.
3. 견훤의 젊은 시절과 군사적 성장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젊은 시절부터 무예에 뛰어나 신라 지방 군에 복무했다. 그는 각지 반란진압과 국경방어 임무에 참여해 실전경험을 축적했다. 특히 기마전투에 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일부 기록에 따르면 견훤은 신라가 북방에서 거란세력과 충돌하던 전투에도 참여한 바 있다. 이는 견훤이 단순히 지방 무력가에 그친 인물이 아니라, 국가단위 전쟁을 경험한 군사지휘관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견훤이 대규모 군사세력 조직하고 장기간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견훤 출생과 성장 과정에 비범함을 강조하는 늑대나 호랑이와 관련된 설화도 전해진다. 이는 견훤을 난세를 구할 영웅으로 인식하려는 후대 상상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견훤은 당시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비범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4. ‘전형적인 호족’과는 다른 견훤
통일신라 말기 대부분 호족은 자신이 지배한 지역만 만족했다. 신라왕실에 조공을 바치고 관직을 받는 대신 실질적인 자치권을 인정받는 것이 일반적인 행태였다.
그러나 견훤은 이러한 방식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특정지역 토착명문출신 호족이 아니었다. 신라군사 조직에서 성장한 전문 군사지휘관에 가까웠다. 이후 견훤은 독립적인 군사세력으로 발전한다. 주변호족을 연합대상으로 보기보다 정복과 통합대상으로 인식했다.
이 점에서 견훤은 단순한 지방 반란세력이 아니라 중앙집권적 국가건설을 지향한 정치·군사 지도자로 평가할 수 있다.
5. 신라이탈과 세력확장
889년을 전후해 신라 전역에서는 '원종·애노의 난'을 비롯한 대규모 농민봉기가 발생한다. 사회혼란이 극에 달했다. 이 시기를 계기로 견훤은 신라를 이탈해 독자적인 군사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기록에서는 견훤 아버지 아자개가 기반을 두고 있던 상주지역에서 초기세력을 다졌다는 설도 전해진다. 이후 견훤은 경상도 서남부와 전라도 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며 세력을 점차 확장해 나갔다.
892년, 그는 전라도 장악을 위한 첫 주요 거점으로 '무진주'(현 광주광역시)를 공략했다. 당시 무진주는 신라조정 통제력이 약화된 지역이었다. 견훤은 이곳을 장악함으로써 본격적인 세력확장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그는 ‘백제부흥’을 내세우며 완산주로 진출했다.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를 사실상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6. 후백제건국과 후삼국시대 개막
마침내 900년, 견훤은 완산주를 수도로 삼아 '후백제'를 건국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는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신라체제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국가질서를 선언한 정치적 행위였다.
이듬해인 901년, 신라북부에서 '궁예'가 '후고구려'(후일 고려)를 건국하며 독립을 선언한다.
이로써 한반도에는 신라·후백제·후고구려가 대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7. 결론
견훤은 통일신라 말기 혼란을 기회로 등장한 수많은 호족 가운데서도 가장 적극적이고 급진적인 인물이었다.
견훤은 기존 질서에 편입되기를 거부했다. 군사력을 기반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 점에서 견훤은 단순한 지방 반란자가 아니라 후삼국 시대를 실질적으로 열어젖힌 창업군주라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견훤 한계 역시 분명했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후백제 내부에서 귀족·호족세력을 안정적으로 통합하는 데는 실패했다.
신라 군사조직 출신답게 군공과 충성을 중시한 인사운영은 단기적으로 효율적 이었다. 하지만 각 지역 호족 이해관계를 제도적으로 조정하지 못하면서 내부 결속은 취약해졌다. 특히 왕위 계승문제에서 이러한 한계는 치명적으로 드러났다. 견훤은 장자중심 계승원칙을 명확히 정립하지 못했다. 후계구도를 둘러싼 갈등은 결국 아들들 간 내분과 쿠데타로 이어졌다. 이는 후백제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반면 왕건은 혼인정책과 관용적 포섭을 통해 지방호족을 국가체제 안으로 흡수했다. 명확한 왕위 계승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성을 확보했다.
이 차이는 두 인물이 단순한 무력가를 넘어 ‘국가운영자’로서 어떤 시야를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대비라 할 수 있다.
이어서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 편>이 계속됩니다.
— 초롱박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