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09

후삼국시대 (889~936) 3 ㅡ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 1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09

ㅡ 후삼국시대 (889~936) 3 ㅡ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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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말씀드립니다.

오늘의 글은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거나 정리하는 데 목적을 두기보다는, 사료를 바탕으로 한 제 개인적 해석과 문제의식이 비교적 많이 스며든 글입니다.


따라서 본 글 내용이 모든 분들께 편안하게 읽히지는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다른 의견이나 반론이 있다면 감정적인 비난 보다는 논리적인 토론 형태로 나눠주신다면 고맙게 읽고 고민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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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요즘 기준으로 보면 다소 낯설게 들리는 이름이지만, 우리 오천 년 역사 속에서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인물이다.


후삼국시대, 후고구려(훗날 태봉)를 건국하고 스스로 미륵을 자처했던 궁예는,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밑바닥에서 출발해 한 나라를 건국해 군주가 된 인물 이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주목받을 가치가 있다.


우리 역사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운 인물은 열 명이 채 되지 않는다.


부족국가 시기 전설적 군주들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대부분은 강력한 가문적·정치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고조선 건국한 단군왕검은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로 묘사되는 신화적 인물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부여 왕실출신 이었다.


백제를 건국한 온조와 비류 역시 주몽의 아들들인 고구려왕자였다.


신라 박혁거세와 가야 김수로 또한 설화의 영역에 있지만, 최소한 유력한 부족 집단 수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후백제 견훤 역시 비록 최상층 귀족은 아니었으나 상주지방 호족 아자개의 아들이었다.


고려 태조왕건은 말할 것도 없이 개경 해상세력을 장악한 유력 호족가문 금수저 출신이었다.


조선의 이성계조차 ‘변방출신’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그의 부친 이자춘은 원나라 지방성주로서 지배자였다.


이처럼 새 왕조 건국자들은 대부분 가문이라는 든든한 뒷배경을 지니고 있었고 당시 기득권층이었다.


그러나 궁예는 달랐다.


궁예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전해진다. 신라왕실 후손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궁예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고, 천민 계층에 의해 길러졌다. 그의 성장 과정은 당시 사회 최하층이었다,


어린 시절을 떠돌며 보낸 궁예는 생존을 위해 도적무리에 몸을 담게 된다. 다만 이 시기의 ‘도적’을 오늘날의 범죄집단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통일신라 말기는 사회 질서가 붕괴된 시기로, '흩어지면 백성이고, 뭉치면 도적이 되던 시대'였다.


이후 궁예는 도적무리 대장 '기훤' 떠나 북부 최대세력이었던 '양길' 휘하로 들어가고, 다시 양길과 결별해 힘없는 농민과 유랑민, 도적집단을 규합한다. 그리고 마침내 기존 군벌세력을 물리치고 ‘고려’라는 나라를 세운다. ('후고구려'는 앞 '고구려'와 구별하기 위해 후세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와 같은 사례는 우리 오천 년 역사 속에서 궁예 외에는 없다.


중국사에서는 한나라 '유방', 명나라 '주원장'처럼 밑바닥 출신 건국자가 존재하지만, 한국사에서는 없었다.


가문이라는 기득권 뒷배경 없이 한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인물이 엄청난 카리스마와 사람을 끌어 들일 수 있는 매력적인 지도력을 지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인물에 대해 현재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어떠한가?


대중에게 '궁예'라는 인물이 각인된 계기는 KBS 대하드라마 <태조왕건> 일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궁예는 미륵을 자처하고, 관심법을 내세우며, 결국 광기에 사로잡힌 폭군으로 묘사된다. '김영철' 배우의 뛰어난 연기 덕분에 그 이미지는 더욱 강렬하게 남았다.


중요한 점은 이 드라마의 묘사가 전적으로 허구는 아니라는 것이다.


궁예의 폭정과 광기는 실제정사인 '삼국사기', '고려사' 등에 비교적 정확하게 상당량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과연 무(無)에서 출발해 한 나라 건국할 정도 인물이, 처음부터 기록에 남을 만큼 미치광이 폭군이었을까?


만약 그가 그러한 인물이었다면, 수많은 민중과 세력이 왜 그를 따랐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보다 합리적인 추정은 그가 초기에 강력한 지도자였으나 집권 이후 변화했거나 혹은 정사 기록이 특정인들에 의해 특정 방향으로 과장되었을 가능성이다.

내 개인적 추정은 후자라고 본다.


궁예는 ‘미치광이 폭군이기보다, 신라 말 혼란 속에서 새로운 질서 만들려다 정치적으로 실패한 실험적 군주에 가깝다고 본다.


그렇다면 정사들은 왜 궁예를 그토록 부정적으로 묘사했을까?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과 그 동료들은 철저한 유교적 가치관을 지닌 관료 집단이었다. 김부식 자신도 신라계 경주 김 씨 출신의 6두품이었다. 궁예는 생전에 신라를 강하게 부정했고, 신라 귀족세력과 대립했다. 이러한 인물은 유교적 질서와 신분 체계를 중시한 사관의 눈에 결코 긍정적으로 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시대 관료들은 김부식보다 숭유억불에

더 철저한 유학자였다. 그들은 천민출신 승려에 불과한 궁예를 좋게 써줄 수 없었다.


또한 고려를 건국한 태도왕건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궁예는 실패한 폭군으로 묘사될 필요가 있었다. 새 왕조 정통성을 세우는 과정에서 직전군주는 종종 과장되게 부정적으로 기록되곤 한다.


궁예가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며, 기존 질서와 다른 나라를 구상하려 했던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것이 곧바로 ‘완전한 신분 해방국가’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궁예는 기존 골품질서와 귀족중심 체제에 균열을 내려했다는 시도 자체는 분명히 이례적 이었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 위협받았다고 느낀 호족세력과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왕건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호족연합세력이 궁예를 무력 쿠데타로 제거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선악 문제가 아니라, 이념중심 급진적 개혁과 현실정치 연합사이 충돌로 볼여지가 크다.


이러한 구조는 현대사에서도 반복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례를 살펴보면 그렇다.


상고출신 고졸학력, 독학으로 사법시험 합격해 인권변호사로 활동했고, 마침내 대통령에까지 오른 인물. 그러나 그는 집권 내내 기존 기득권 세력 강한 반발과 공격에 직면했다.


특히 검찰과 조중동 보수언론 공격은 집요했다.


물론 궁예와 노무현은 시대도, 제도도 전혀 다르다. 다만 기존 질서 바깥에서 등장한 개혁적 인물이 구조적 고립 속에 놓인 점에서는 일정 부분 겹쳐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 직전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나는 봉화산 같은 존재야.

산맥이 없어.

딱 홀로 서 있는 돌출된 산이야.

어릴 때는 끊임없이 희망이 있었는데 지금은 희망이 없어져 버렸어.”


그가 말한 ‘산맥’은 무엇이었을까.


궁예가 끝내 넘지 못했던 산맥,

시대를 앞서려 했던 이들이 반복해서 부딪혀 온, 기득권 구조라는 거대한 산맥이 아니었을까.


새로운 나라를 세워도,

민주적 절차로 대통령이 되어도,

그 산맥은 여전히 높고 두터웠다.


그래서 우리 역사에서 개혁을 꿈꾼 이들은 종종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한 그리고 그 좌절은 사회전체에 깊은 반동으로 돌아온다.


궁예, 묘청, 만적, 정여립, 광해군, 소현세자, 전봉준, 김옥균, 그리고 노무현...


궁예에 대한 재평가는 단순한 인물복권 문제가 아니다.


그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우리가 역사 속 ‘패자’와 ‘개혁’을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 문제이기도 하다.


궁예 2편에서는 그의 태생부터 내부붕괴까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ㅡ 초롱박철홍 ㅡ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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