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 2 - 궁예 생애, 버려진 왕족? 도적무리 지도자?)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10
ㅡ 후삼국시대 (889~936) 4 ㅡ
(궁예 2 - 궁예 생애, 버려진 왕족? 도적무리 지도자?)
전편에서는 역사 속에서 '궁예'가 어떤 평가를 받아왔는지를 살펴보았다. 이번 편에서는 그 평가 바탕이 되는 궁예 생애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궁예(弓裔, 869~918)는 후삼국 시대 등장한 후고구려(훗날 태봉) 초대국왕으로 당시 정국을 뒤흔든 핵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 이다.
1. 출생설화와 왕족설
궁예 출생에 대해서 여러 설화가 전해진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서는 궁예가 신라왕족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음모 속에서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고 한다.
설화에 따르면 궁예는 태어날 때부터 불길한 징조를 지녔다고 여겨졌다. 신라왕실에서는 그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을 두려워해
어린 궁예 눈을 찔러 애꾸눈으로 만든 뒤 버렸다는 이야기다.
일부 족보기록도 이러한 왕족설을 뒷받침하는 듯 보인다. 순천김씨 세보에는 궁예를 '신문왕' 아들로, 광산이씨 세보에는 '경문왕' 서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공식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에는 궁예가 신라왕족이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궁예가 신라를 강하게 적대했고, 자신 왕권에 대해 유난히 강한 정통성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신라왕실과 연관성 암시할 여지는 남아 있다.
2. 애꾸눈 설화의 여러 갈래
궁예가 애꾸눈이었다는 사실 자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기록되어 있어 역사적 사실 가능성이 높다.
다만, 눈을 잃게 된 경위에 대해서 여러 설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우리 초등시절 교과서에도 나왔다.
궁예는 태어날 때부터 치아가 나 있었고, 집 위로 흰 빛이 하늘로 뻗치는 등 불길한 징조가 이어졌다. 이에 왕실에서 성벽 아래로 던져 죽이려 했으나, 그걸 미리 안 유모가 숨어 있다가 아이를 받아 도망쳤고 그 과정 에서 실수로 궁예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궁예는 유모아들로 자라며 천민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3. 문제 많은 소년기와 승려생활
'삼국사기' 속 기록에는 궁예를 어린 시절부터 성격이 괄괄하고 말썽이 잦은 인물로 묘사한다. 그가 저지른 여러 사건 역시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궁예가 어느 정도 성장한 뒤, 유모로부터 자신 출생비밀을 전해 들은 궁예는 출가하여 '세달사' (世達寺) 절로 들어가 승려가 된다. 이때 스스로를 ‘선종(善宗)’이라 불렀으며, ‘궁예’라는 이름 자체가 이 시기 법명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세달사는 현재의 강원도 영월 일대로 추정된다. 궁예는 절에서 장성할 때까지 지냈는데, 삼국사기에는 '그가 계율을 엄격히 지키지 않았고 담력이 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승려인데도 육식을 하고 계율을 어겼다는 일화들도 전해지는데,
요컨대 모범적인 승려와는 거리가 멀었다.
4. 난세 도래와 군벌로 전환
진성여왕 대에 일어난 '원종·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신라말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반란과 군벌 할 거가 이어졌다.
중앙 통제력이 급격히 약화된 시기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궁예는 891년 세달사를 나와 당시 '죽주'일대에서 세력을 떨치던 군벌 '기훤' 휘하로 들어간다. 이 시기에 궁예는 무술과 군사경험을 본격적으로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궁예는 더 이상 승려가 아니라, 난세형 군벌로 완전히 변모하고 있었다.
세달사에서 비교적 가까운 북원(원주) '양길'이 아니라 굳이 먼 기훤을 찾아간 점을 보면, 당시 기훤 세력이 양길 못지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기훤은 궁예 재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궁예는 더 이상 기훤 아래에 머물러서는 앞날이 없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892년, 궁예는 <청길·원회· 신훤> 등과 친분을 맺은 뒤 기훤을 떠나 북원 군벌 양길에게 투항한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이 과정을 각색해 기훤 제거 후 양길에게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기훤 부하였던 신훤이 훗날 양길 휘하에 등장하는 점을 보면 실제 역사에서도 양길이 기훤 세력 흡수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 지도자로서의 궁예
'삼국사기'는 이 시기 궁예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사졸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
궁예를 전반적으로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삼국사기'조차 궁예 초기 지도력만큼은 긍정적으로 기록한 셈이다.
삼국사기가 궁예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이유는 앞 편에서 자세히 정리했다.
당시 귀족수탈에 심하게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이러한 궁예행보는 환영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양길부하가 된 궁예는 892년까지 치악산 '석남사' 머물며 신라 여러 성을 차례로 함락시킨다.
6. 궁예독립과 세력확장
892년, 궁예는 견훤이 왕을 자칭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실제로 견훤이 공식적으로 후백제 왕을 칭한 것은 900년이다.)
이 소식은 궁예에게 독립시기가 왔음을 인식시키는 계기였을 가능성이 크다.
894년, 궁예는 대관령을 넘어
'명주'(강릉)귀부를 받아내며 세력을 키운다.
이때 그를 따르던 무리는 약 3,500명으로, 양길휘하 일부 병력이 함께 이탈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궁예는 장군을 자칭하며
양길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세력을 구축한다.
패서지역 호족들, 특히 왕건가문 포함한 세력은 이미 강원도 일대 장악한 궁예에게 대부분 순순히 항복했다.
897년, 궁예는 '송악'을 수도로 삼고 <왕륭 아들 왕건>을 이인자 격으로 중용하기 시작한다.
7. 궁예, 왕의 자리에 오르다
양길은 이에 반발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으나 궁예는 이를 예견하고 선제공격을 감행한다.
결국 '비뇌성전투'에서 양길을 격파하고, 900년에는 왕건을 앞세워 잔여세력까지 정리하며 소백산맥 이북을 거의 장악한다.
마침내 901년, 궁예는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한다.
오늘날 사용하는 ‘후고구려’라는 명칭은 후대의 구분을 위한 것이며,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고구려 시절에도 중기 이후부터는 '고려'라 칭했다.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를 선택한 것은 패서지역 호족과 백성들이 고구려 계승의식 강하게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쪽에서 '견훤'이 백제계승 내세운 점 역시 이 결정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약 250년이 지났음에도 당시까지 고구려와 백제 영향력 상당히 강하게 지속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이 시기, 사실상 고구려계 호족 대표 격이던 '왕건'은 눈에 띄는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부터
<궁예와 왕건 사이 균열>이 서서히 시작된다.
다음 편에서는
<궁예 3 - 왕건의 등장>을 통해
두 인물 관계가 어떻게 권력투쟁으로 변해 가는지를 자세히 정리하겠습니다.
— 초롱박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