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11

궁예 3 - 왕건의 등장, ‘배신자’가 아니라, 체제 속에서 자라난 인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11

ㅡ 후삼국시대 (889~936) 5 ㅡ

(궁예 4 - 왕건의 등장, ‘배신자’가 아니라, 체제 속에서 자라난 인물)


오늘 올리는 이야기는 정사 '삼국사기'에 실린 기록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정사가 아닌 다른 야사나 최근에 발견된 비석 등 내용은 오늘 다룰 이야기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다음 편에서 자세히 살펴보고, 오늘은 정사에 기록된 내용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901년, 궁예는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국호를 ‘고려’라 선포한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궁예세력은 단순한 군벌연합 넘어 국가체제로 진입한다. 문제는 국가가 되었단 사실보다 그 국가를 실제 굴리는 사람이 누구였느냐는 점이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왕건'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왕건을 ‘최종 승자’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 시기 '왕건'은 아직 왕좌를 넘보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궁예체제 안에서 성장 중인 핵심 실무자,

즉 체제를 떠받치는 이인자에 가까웠다.


왕건 등장은 쿠데타 예고편이 아니라 국가화 과정에서 필연적 드러난 인물의 부상이었다.


그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 궁예는 왜 왕건을 중용했는가?


궁예가 왕건을 중용한 이유를

'사람을 잘못 봤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


왕건은 패서지역 유력 호족가문 출신이었다. 부친 '왕륭' 대부터 경제력과 지역기반을 갖춘 집안이었지만, 궁예 휘하에는 그런 조건을 가진 인물들이 이미 여럿 있었다.


왕건이 특별했던 이유는 가문이 아니라 능력의 방향이었다.


왕건은 <해상활동을 통한 교통· 요했경험, 안정적 물자조달과 군수운영, 항복한 지역을 무리 없이 흡수하는 조정능력,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는 온건한 지휘방식> 등 왕건은 싸움을 잘하는 장수라기보다 싸움 이후를 책임지는 인물이었다.


<영토를 넓히는 데는 칼이 필요했지만, 영토를 유지하는 데는 사람이 필요했다.>


궁예에게 왕건은 경계 대상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운영자였다.


2. 이 시기 왕건은 ‘야심가’였을까?


결말을 알고 보면 왕건은 처음부터 왕위를 노린 인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초기기록 속 왕건은 그런 인물과 거리가 멀다. 왕건은 궁예를 공개적으로 부정한 적이 없었고, 궁예체제에 반기 든 흔적도 없다.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고, 전투와 행정에서 모두 성과 냈다.


이 시점의 왕건은 반궁예가 아니라 친궁예 인물이었다.


물론 이것이 왕건이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왕건은 이때까지는 별 야심을 드러내거나 행동하지 않았다

야심은 선택으로 드러날 때 비로소 야심이 된다.


그리고 그 선택을 요구한 것은 왕건 개인이 아니라 궁예의 변화였다.


3. 왕이 된 궁예, 달라진 통치 방식


궁예가 왕이 된 이후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군사력도, 영토도 아니었다.


궁예왕권 권위의 성격이었다.


초기 궁예는 '공평무사한 지도자'로 민심을 얻었다. 그러나 왕이 된 이후, 그는 자신 권위를 정치에서 종교로 확장하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미륵불’, 혹은 ‘미륵의 대리자’로 인식하며 불교 권위를 통치 근거로 삼았다.


이 선택은 단순한 폭주가 아니었다. 급격히 커진 영토를 하나로 묶기 위한 강력한 통합 장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방식이 현장에서 민심을 다루던 방식과 충돌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드라마 <태조왕건>에서는 궁예가 ‘관심법’을 사용하여 죄 없는 신하들을 처형하고, 자신 왕비와 자녀들까지 살해하는 등 횡포를 저질렀다고 묘사된다. 드라마에서는 극적 효과를 위해 과장된 장면이 많다. 물론 이러한 사건은 정사인 '삼국사기'에도 언급되어 있으나, 앞 편에서 지적한 여러 근거로 미루어 보아 이를 사실로 단정하기에는 다소 신중할 필요가 있다.


4. 궁예와 왕건, 충돌의 본질


궁예와 왕건 갈등을 개인적 불신이나 배신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부족하다.


두 사람은 권력을 바라보는 방향 자체가 달랐다.


궁예는 중앙에 권위를 집중시키고, 종교적 정당성으로 국가를 묶어 골품제 없는 평등한 세상 만들기 원했다.


그러나 왕건은 달랐다. 그는 지역호족과 협력하며,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골품제는 서서히 변화시켜 안정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다음 편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는 점잖은 표현일 뿐이며 기득권층이 궁예 개혁에 반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쨌든 궁예 개혁정치는 영토가 작을 때는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국가규모로 커질수록 부담이 커졌다.


그리고 그 부담은 전선에서 행정을 맡고 있던 왕건에게 가장 먼저 체감되었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이 시점까지는 왕건은 움직이지 않았다.


갈등은 있었지만, 그것은 대립이 아니라 긴장이었다. 궁예는 여전히 왕건을 중용했고,

왕건 역시 궁예 명령을 수행했다.


다만 왕건은 누구보다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체제가 계속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궁예는 폭군이 되기 위해 왕이 된 것이 아니었다. 왕건 역시 처음부터 왕좌를 노린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체제의 방향이 어긋날 때,

역사는 개인들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인다.


다음 편 <왕건의 쿠데타, 배신이었을까, 선택이었을까>에서 그 선택 순간을 다룹니다.


— 초롱박철홍 —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이전 18화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