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4

고려영토를 다시 그려야 한다?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4

ㅡ '고려영토' 문제와 '환단고기' 논란 2 ㅡ

(고려영토를 다시 그려야 한다?)


1. 문제제기


"고려는 한반도의 역사인가? 아니면 대륙까지 뻗은 동아시아 강국의 역사인가?"


오늘날 우리 역사인식 경계선은 지리보다 사관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그 경계를 의심해 온 이가 있으니, 바로 비주류 역사학자 '이덕일' 교수이다.


나는 전 편 '환단고기' 역사인식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썼다. 그런 류 역사를 추종하시는 분들 민족적 애국심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역사는 민족적 욕망만이 아닌 확실하게 증명된 객관적 증거로 써져야 한다. 객관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환상 역사로만 우리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객관적으로 주류학설로 인정받고 있지는 못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아주 중요한 영토문제가 있다.


<고려영토>에 관한 논쟁이다.


앞으로도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한이 갑자기 붕괴되거나 했을 때 이 영토문제를 기반으로 중국은 북한 일부를 자기들 땅이라 주장할 수도 있다.


반대로 중국이 분열되었을 때, 우리는 현재 중국 땅 일부를 우리 것으로 주장하며 되찾아 올 수도 있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2. 간도·토문강 문제의 역사적 맥락


1712년 숙종 대에 조선과 청은 백두산에 정계비를 설치하였다. 비문에는 “서위압록 동위토문 (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 새겨져 있다. 문제 핵심은 여기서 말하는 ‘토문(土門)’이 오늘날 두만강인지, 아니면 백두산 북쪽 별도 하천인지에 대한 해석차이에 있다. 19세기 후반 간도지역에는 조선인 이주가 증가하였다. 조선 정부는 행정권을 직접 행사하지는 못했으나 일정 부분 관할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909년 일본 통감부는 청과 '간도협약'을 체결하여 간도를 청 영토로 인정하는 대신 '남만주철도부설권'을 확보하였다. 당시 대한제국은 을사늑약 이후 외교권을 상실한 상태였다. 따라서 간도협약의 정당성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논쟁 대상이다. 다만 국제법상 조약 승계와 실효 지배원칙을 고려할 때, 이를 단순히 '자동무효'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은 기존 국경질서를 외교적으로 유지하고 있으며, 간도문제는 학술적 논쟁과 별개로 현실외교에서는 제기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감정적 접근보다 사료와 국제법적 맥락 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3. 이덕일이 주장하는 고려영토에 대한 인식


고려영토 문제는 아주 최근까지 논쟁이 있었다.


이덕일은 조선외교권이 박탈된 상태에서 1909년 일본통감부가 대한제국은 배제한 채 간도영토를 청에 넘긴 '간도협약'은 국제법적 정당성이 부족하고 무효라고 주장한다. 또한 역사적으로 보면 간도뿐만 아니라 만주벌판도 우리 민족 땅임이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단지 신라가 삼국통일하면서 우리 민족영역 은 한반도 그것도 상당히 아래쪽으로 좁아져 버렸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때도 고려영토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천리장성' (현재 함경남도 안변에서 황해도 구월산까지)이 고려 국경선으로 배워왔다. 지금까지 정설이다.


그러나 이덕일은 이 일반정설보다 확장된 고려영토를 주장한다.


이덕일 주장은 특히 고려초기와 발해유민 통합과정, 요나라와 전쟁, 여진족과 관계를 중심으로 고려 실제 영향력과 영토가 과소평가되었다고 보고 있다.


본 글은 '환단고기'류의 비주류 상고사 확대론과는 구별하여, 사료에 근거한 고려 북방인식과 영토범위 문제를 재검토하고자 한다.


아래는 이덕일 주요 주장이다.


1) 고려건국 정당성과 발해계승


이덕일은 고려가 고구려 뿐 아니라 발해를 계승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태조왕건이 국호를 ‘고려’로 삼고, 발해멸망 이후 상당수 발해유민들이 고려에 귀속하자 고려태조 왕건도 같은 민족으로서 그들을 받아들인 것 등에 주목해 보면 고려는 고구려- 발해를 계승한 국가로서 정통성을 주장해도 아무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만주지역까지 고려영토로 간주되는 확실한 객관적 증거라고 말한다.


2) 압록강-두만강을 넘어선 북방 영토


기존정설은 고려 북방경계를 천리장성으로 보지만, 이덕일은 이를 과도축소한 것으로 본다.


서희담판 이후 확보한 강동 6주를 넘어서 고려는 여진을 관리하고 영토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윤관 별무반과 동북 9성축조

이후에 대한 고려사 기록을 분석하며, 고려가 단순히 방어가 아닌, 공세적 북방정책을 펼쳤다고 주장하며 일정기간 만주 남부까지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3) 고려의 요·금과 전쟁은 ‘영토 수호’ 맥락


고려가 요나라와 금나라와 전쟁에서 방어적 위치에만 있지 않고, 주도적 외교 및 군사행동을 했다고 평가한다. 이를 통해 고려 실질적 국경선은 단순한 방어선 아닌,

확장적 국경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4) 사료해석 문제지적


이덕일은 조선후기 실학자들 기록이나 일제강점기 식민사관에 의해 고려영토가 축소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한반도 안’으로 역사를 제한하는 식민사관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고려 북방영토 인식도 크게 왜곡되었다고 비판한다. 이덕일은 '삼국사기' '고려사' 등 우리 역사서뿐만 아니라 '요 사서, ' '금 사서' 등 중국 측 사료도 보조적으로 인용하며,

고려와 교전, 조공관계 등 기록을 통해 고려 실질적 세력권 분석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제작지도들에 나타난 고려영토 축소경향을 비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덕일 주장에 의하면 고려 실질 통치영역은 천리장성 보다 훨씬 윗 쪽인 <한반도 전역 + 강동 6주 + 동북 9성>이다.


고려가 영향력 미친 영역은

만주남부 (예: 압록강 이북 ~ 한강 일대, 길림성 남부 포함)및 발해유민 거주지 및 고려 유민촌 여진족 통제지역 (부여·거란 인근 일부)이다. (아래지도 참고)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강동 6주'는 현재 중국 단둥 인근지역이고, '동북 9성'은 현재 지린성남부일대, (흑룡강과 퉁화 사이 추정) '발해유민정착지'는 현재 평양· 황해도, 여진통제구역은 함경도 및 두만강 이북의 일부 거점을 말한다.


5. 이덕일 주장에 대한 반론


교과서 서술에서 고려 북방경계는 흔히 천리장성으로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천리장성 은 군사 방어선 성격이 강하다. 방어선과 국가 법적·행정적 영토를 동일시하는 것은 개념상 구분이 필요하다.


중세국가 영토개념은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다.


-직할행정 지배지역

-군사점유 또는 주둔지역

-조공·복속 관계에 있는 세력권


이 세 영역을 동일한 ‘영토’로 간주하는 것은 학술적으로 맞지 않다. 따라서 고려의 북방영토 문제도 실효지배 정도와 기간을 기준으로 분석해야 한다.


고려 북방정책과 확장성을 살펴보자.


1) 강동 6주 확보


서희 외교담판 이후 고려는 강동 6주를 확보하였다. 이는 압록강 동쪽 일부지역에 대한 실질적 통치권 확대를 의미한다.

이 지역은 고려 행정체계 안에 편입되었으므로 영토로 보는 데 무리가 없다.


2) 동북 9성 축조


1107년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1년여 만에 반환되었다. 동북 9성 축조 성격은 일시적 군사점유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이를 지속적 영토로 해석하기에는 사료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다만 고려가 북방에 대해 방어적 태도만을 취한 것이 아닌 적극적 군사정책을 전개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3) 요·금과 관계


고려는 거란의 요, 여진의 금과 외교·군사 관계를 맺었다. 이는 단순한 수동적 방어국가가 아닌, 동북아 국제질서 속에서 능동적 외교를 수행한 국가임을 보여 준다. 다만 이러한 외교활동을 곧 영토확장으로 해석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4) 발해계승 문제


이덕일은 고려가 고구려 뿐 아니라 발해를 계승한 국가임을 강조한다. 실제로 태조왕건은 발해 유민을 적극 수용했다. 그러나 국가계승은 단순한 민족적 연속성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왕통·관제·제도·영토의 직접승계 여부가 종합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현재 사료상 발해 왕족이 고려 정치체제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했다는 근거는 제한적이다.

따라서 고려가 발해유민을 포용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이를 곧바로 만주전역에 대한 영토승계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학술적으로 보완이 필요하다.


5) 식민사관과 영토인식 문제


일제강점기 연구가 한반도 중심적 역사 틀을 강화한 측면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모든 축소 해석을 식민사관 산물로 단정하는 것은 또 다른 단순화일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사학계는 다양한 사료와 고고학 자료를 활용하여 고려 북방정책을 재검토하고 있다. 문제는 ‘확장’과 ‘축소’의 이분법이 아니라, 사료해석의 엄밀성이다.


6. 종합평가


고려는 한반도에 갇힌 소극적 국가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강동 6주 확보, 여진정벌, 동북 9성 축조 등은 북방에 대한 적극적 정책을 보여준다. 그러나 만주 남부전역을 안정적·지속적으로 통치한 제국이었다고 보기에도 사료상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고려는 한반도 중심국가 이면서도 북방에 대해 군사· 외교 적으로 능동적으로 개입한 중견 강국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균형 잡힌 해석이라 할 수 있다.


8. 결론


고려영토 문제는 단순히 지도를 다시 그리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우리가 중세국가 공간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현대적 영토개념을 과거에 투사하고 있지는 않은가?

를 묻는 작업이다.


영향력과 영토를 구분하고,

군사점유와 행정지배를 구분하며, 민족적 정서와 사료 해석을 구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역사인식 확장은 가능하되, 그것은 사료와 실증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처럼 주류 역사학자들은 사료를 기반으로 실증을 원칙으로 삼아야 하며, 민족주의적 확대해석은 또 다른 왜곡을 낳을 수 있다며 이덕일 지나친 민족주의 역사관을 비난한다.


내 개인적 견해는 역사해석은 실증적 사료해석이자 시대인식도 반영한다고 본다.


이덕일 주장은 단지 고려영토를 다시 그리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사인식 경계선이 어떻게 설정되었는가를 묻는 도전으로 보고 싶다.


우리는 고려를 단지 거란, 요, 몽골 침략에 대한 ‘방어의 나라’로 기억할 것인가, 아니면 발해를 품고, 여진과 맞서며, 동북아의 균형을 설계한 나라로 재해석할 것인가?


이처럼 '고려영토'를 다시 그리는 일은 곧 오늘의 시선을 다시 정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어서 광종쿠데타와 개혁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이전 03화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