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다툼과 광종개혁 5 ㅡ피로 쌓은 왕권인가 체제전환 결단인가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9
ㅡ 왕위다툼과 광종개혁 5 ㅡ
(피로 쌓은 왕권인가 체제전환 결단인가)
앞서 여러 차례 언급했듯, '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는 겉으로는 후삼국을 통일한 국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지방호족들이 강한 영향력을 유지하던 연합적 성격의 국가였다.
왕건은 혼인정책과 포용적 리더십으로 호족들을 아우르며 균형을 유지했다. 그러나 왕건 사후 10년도 지나지 않아 왕위계승 분쟁이 벌어졌다. 2대 왕 '혜종'은 왕위를 둘러싼 다툼으로 재위 2년 만에 죽고, 3대 왕 '정종'은 호족들에게 시달리다 재위 3년 만에 죽는다.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인물이 태조의 넷째 아들 '왕소', 고려 제4대 왕 '광종'(재위 949~ 975)이다.
1. 양면성을 지닌 군주
광종은 고려사에서 가장 평가가 엇갈리는 군주다. 즉위 초·중기 에는 강력한 개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체제를 정비했다. 그러나 말기에는 숙청이 잦아지며 ‘피의 군주’라는 이미지도 남겼다.
다만 오늘날 일부 연구자들은, 광종 말기 ‘피바다’ 이미지가 후대 유학자들 평가 속에서 다소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광종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대표적 사료는 성종 대 유학자 '최승로'의 <시무 28조>이다. 여기에는 광종의 사치, 불교숭상, 숙청정치에 대한 강한 비판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성리학적 정치 이념에 기반한 시각이라는 점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2. 왜 개혁이 필요했는가?
광종 즉위 당시 고려왕실이 처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호족들은 여전히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고, 공신세력은 막강했다. 왕권은 제약을 받았고, 국가재정 기반도 불안정했다.
광종에게 개혁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전략이었다.
광종은 중국의 관료제 국가체제를 참고해, 고려를 보다 중앙집권적 국가로 재편하려 했다.
광종의 개혁정책들을 자세히 살펴보자.
1) 노비안검법(956)
956년 실시된 '노비안검법'은 호족들이 불법적으로 노비로 만든 자들을 조사해 원래의 양인신분으로 되돌리는 정책이었다.
이는 모든 노비를 해방한 제도는 아니었으며, 국가재정과 군역기반을 확충하려는 목적도 분명했다.
그럼에도 국가가 대규모로 신분을 재조사해 일부를 해방시킨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19세기 미국 'Abraham Lincoln'의 <노예해방선언>보다 약 900년 앞선 시기에 신분 재조사를 단행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미국처럼 노비 완전한 해방은 아니지만 중세사회에서 국가가 신분을 재조사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노비안검법은 결과적으로
-호족의 경제·군사 기반약화
-왕실재정 확충
-군역자원 확대
라는 효과를 가져왔다.
2) 과거제 도입(958)
958년, 광종은 중국 후주출신 귀화인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시행했다.
이는 한반도 역사상 최초 '과거시험'이었다.
물론 초기 과거제는 완전한 능력주의 제도는 아니었다. '음서제'(5품 이상 고위관리자제를 나이가 차면 자동 등용)가 병존했고, 상층귀족들에게 여전히 유리했다.
그럼에도 관직 세습구조에 균열을 내고, 왕에게 충성하는 신진관료층을 육성했다는 점에서 결정적 의미를 가진다.
이 제도는 이후 1894년 갑오개혁까지 이어지며 한국관료제 전통의 뿌리가 되었다.
3) 호족숙청과 사병혁파
광종은 사심관 제도를 축소하고, 지방호족 사병을 정리했다.
공신세력과 왕족까지 숙청대상이 되었으며, 이는 왕권강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숙청 규모와 성격에 대해서는 오늘날 학계에서도 평가가 갈린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광종의 강경 조치가 없었다면 고려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로 전환되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4) 관제·법제정비
광종은 관제와 지방행정 체계를 정비해 통치구조를 정돈했다.
이는 후대 고려 관료제 틀을 마련했고, 조선 행정체계 형성 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다.
5. 공복제정
고려는 건국 이후에도 신라 의복 제도를 부분적으로 유지했다.
광종은 새 왕조에 맞는 공복을 제정함으로써 신분질서를 정비하고 사치풍조를 억제하려 했다.
겉으로는 복식정비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권위와 질서를 재정립하는 상징적 조치였다.
6) 독자연호 사용과 황제적 요소
광종은 독자적 연호 ‘준풍’을 사용하고, 개경을 황도라 칭하는 등 황제국적 요소를 일부 도입 했다.
다만 대외적으로는 송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실리외교를 병행했다.
이는 내부 자주성강화와 외교적 현실주의가 병존한 사례라 할 수 있다.
7) 불교정책
광종은 불교세력을 후원하면서도 이를 왕권강화 기반으로 활용했다.
교종 중심 통합을 시도하고 승려 세력을 중앙권력과 밀접하게 연결했다.
이는 단순한 종교정책을 넘어 정치전략의 성격을 지녔다.
4. 광종은 누구인가
광종은 성군인가, 폭군인가.
아마도 둘 중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는 체제 전환기의 군주였다.
호족 연합적국가를 중앙집권적 왕조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그는 타협보다 결단을 택했다.
그 결과 고려는 보다 강한 왕권 국가로 재편되었다.
광종개혁은 분명 고려체제 방향을 바꾸었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어서 광종개혁의 역풍과 경종 시대를 살펴보겠습니다.
― 초롱박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