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다툼과 광종개혁 6 ㅡ광종개혁 후유증과 경종시대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10
ㅡ 왕위다툼과 광종개혁 6 ㅡ
(광종개혁 후유증과 경종시대)
'광종의 개혁'은 고려 왕권강화를 위해 강력하게 추진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후유증도 남겼다.
광종 사후 고려사회는 일정한 긴장과 혼란 속에 놓이게 되었다. 강력한 숙청과 급격한 제도변화로 왕실내부와 지방호족세력 모두 광종체제에 대해 불안과 반발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려운 것이 개혁이다.
어쩌면 혁명보다 더 어렵다.
혁명은 폭발적인 힘으로 반대 세력을 일시적으로 억누를 수 있지만, 개혁은 기존질서를 유지한 채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추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광종의 개혁은 단기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급격하고 강압적인 개혁방식은 호족과 귀족세력 불만을 키웠고, 결국 광종 사후 왕권이 흔들리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특히 '노비안검법'과 공신세력 정리는 고려사회 전반에 깊은 긴장과 변화를 가져왔다.
노비안검법은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민으로 돌려보내는 제도였다. 이로 인해 국가병역과 조세대상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왕권기반이 강화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반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호족세력은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중앙권력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또한 해방된 노비들 가운데 일부는 생계기반을 잃고 떠돌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고려사회 질서에는 일정한 균열과 불안정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광종의 공신세력 정리 역시 강력하게 진행되었다. 광종은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세력을 제거하며 중앙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미 '왕규의 난' 이후 건국공신 세력에 대한 경계심은 커져 있었고, 광종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공신과 유력 귀족세력을 점차 정리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왕족 인물들까지 정치적 견제를 받게 되었으며, 광종은 자신이 신뢰하는 세력위주로 정치를 운영했다.
이러한 강력한 정치는 단기적으로 왕권강화에 효과를 보았지만, 왕실내부와 귀족사회에는 깊은 불신과 긴장감을 남겼다.
광종 사후, 아들인 '경종'이 즉위하면서 정치 분위기는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귀족세력이 다시 정치 전면에 등장하며 왕권과 귀족 권력사이 균형을 모색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광종이 구축한 중앙집권체제는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지만 아직 완전히 뿌리내린 상태는 아니었다.
광종 개혁은 분명 고려발전을 위한 중요한 계기였다. 불법적인 신분질서를 바로잡고 능력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하려 했다는 점에서 매우 선구적인 시도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추진 방식이었다.
광종은 강력한 정치력과 숙청을 통해 개혁을 밀어붙였고, 그 결과 고려사회는 개혁성과를 안정적으로 이어가는 데 일정한 어려움 겪게 되었다.
역사적으로도 지나치게 급격한 개혁은 종종 강한 반동을 불러왔다.
광종개혁 역시 개혁이 단지 올바른 방향이라는 명분만으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개혁이 안정적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와 질서 있는 이행과정이 중요하다는 점도 함께 시사한다.
그럼에도 광종이 고려역사에서 보기 드문 혁신적 군주였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결국 광종은 시대를 앞서간 지도자였지만, 사회적 기반과 제도적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던 고려초기 상황 속에서 급격한 변화를 시도했고, 이로 인해 일정한 반동과 긴장이 나타났다는 것이 오늘날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평가이다.
975년 광종은 향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 뒤를 이어 광종의 맏아들 '경종'(975~981)이 스무 살의 나이로 즉위한다. 경종은 후삼국 통일 이후 태어난 첫 번째 고려 국왕으로 알려져 있다.
경종은 아버지 광종의 강력한 통치방식 속에서 성장했다. 광종은 호족세력이 태자(경종) 중심으로 정치적 움직임을 일으킬 가능성을 경계했고, 이 때문에 태자를 엄격하게 관리하고 때로는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종은 광종의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숙청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또한 어머니인 '대목왕후' 가문 역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시기 고려왕실에서는 왕실 내부혼인인 '근친혼'이 매우 복잡하게 이루어지기도 했다. 경종 역시 여러 왕후와 혼인했는데 대부분 왕실 친족관계였다.
경종의 아들인 목종 역시 이러한 왕실 근친혼 구조 속에서 태어나게 된다.
왕실 혈통관계를 자세히 따지기 시작하면 머리가 복잡해질 정도라 여기서는 이 정도로 넘어가겠다.
경종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가까이 지내지 못하고 궁중에서 성장했다.
유학자 '최승로'는 <시무 28조>에서 경종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경종께서는 깊은 궁궐에서 태어나 궁녀들의 손에서 자랐으므로 궁궐 밖의 일을 일찍이 알지 못하였으나,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여 큰 과실 없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록은 경종이 주로 어머니와 외가세력 보호 속에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광종시대 강력한 정치와 숙청으로 사회분위기가 크게 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종은 즉위 후 귀족세력과 관계를 완화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호족출신 인물인 '왕선'을 재상으로 등용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이전 정치 과정에서 생긴 원한관계가 사회 곳곳에서 표출되면서 '사적복수'와 갈등이 증가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이러한 분위기는 정치적 갈등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경종은 광종 핵심개혁 제도였던 '과거제'나 '노비안검법' 자체를 폐지하지는 않았다.
대신 제도 틀은 유지하면서 시행 강도를 완화하여 귀족세력을 달래는 방향을 선택했다.
귀족과 공신세력을 다시 정치에 참여시키고, 중앙 관료운영에서도 귀 출신 인물들 역할을 확대했다. 또한 유교적 통치 이념을 강조하며 비교적 온건한 왕도정치 모습을 보였다.
경종의 대표적인 정책 가운데 하나는 976년에 실시된 '시정전시과'였다.
광종 시기를 거치며 중앙관료 체계가 정비되자 관리들에게 안정적인 경제기반을 제공할 필요성이 커졌다.
시정전시과는 관리관직과 인품을 기준으로 토지를 차등 지급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귀족과 관료층의 경제 기반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고 동시에 왕이 관료를 통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다만 토지세습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세력 토지집중 현상이 점차 나타나게 된다.
경종의 통치초반까지는 비교적 안정적 정치운영이 이루어졌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재위기간은 매우 짧았다. 스무 살에 즉위해 스물여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젊은 군주였다.
경종은 광종과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지는 못했고 건강문제로 국정운영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재위 후반으로 갈수록 음주와 향락에 빠졌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그럼에도 경종의 짧은 통치는 고려사회 긴장을 완화하고 정치적 균형을 회복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가 있다.
광종이 시작한 개혁 틀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사회가 숨을 고를 시간을 마련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경종시대는 개혁과 반동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한 과도기 성격을 지닌다.
경종이 26세 젊은 나이로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 목종은 겨우 다섯 살에 불과했다.
결국 고려왕실과 대신들은 왕실 다른 인물 경종 삼촌 '성종'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게 된다.
이후 고려는 성종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적 국가체제를 바탕으로 중앙집권국가로 본격적인 정비를 이루게 된다.
우리 역사 교과서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고려 국가체제정비 시기가 바로 성종시대이다.
다음 글에서는 성종시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