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11

왕위다툼과 광종개혁 7 ㅡ성종업적과 목종즉위 그리고 천추태후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11

ㅡ 왕위다툼과 광종개혁 7 ㅡ

(성종업적과 목종즉위 그리고 천추태후)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한 지 약 50년 가까이 지난 뒤, 고려 제6대 왕인 '성종'(재위 981~997) 시대에 이르러서야 고려는 비로소 국가다운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중앙 정부 제도가 정비되고, 고려 역사상 처음으로 지방에 정식으로 관리를 파견하게 된다.


고려초기 국가는 강력한 왕권을 가진 중앙집권국가라기보다는 각 지역 호족세력들이 연합한 형태에 가까웠다. 이를 바꾸기 위한 첫 시도는 '광종' 때 이루어졌다. 광종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실시 등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며 호족세력을 억누르려 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광종개혁은 광종 뒤를 이은 경종 시기에 들어 주춤하게 된다. 경종은 전시과 제도를 시행하는 등 나름 정책을 펼치기도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광종개혁을 일부 되돌리며 개혁 흐름을 약화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경종 말년에 이르러서는 음주와 색정에 빠져 정사에서 멀어졌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경종은 26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쓰러지게 되는데, 당시 그의 아들 왕송(훗날 목종)은 아직 다섯 살 정도 어린아이였다. 어린 왕이 즉위할 경우 정치적 혼란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경종은 사촌동생이자, 누이 문덕왕후 남편이며 부인 천추태후 아들에게는 외삼촌 겸, 고모부 겸 당숙이 되는 성종에게 선위를 하고 붕어했다.


내가 쓰고 몇 번 읽어봐도 경종과 성종이 사촌이라는 것 외에는 나머지 촌수는 헷갈린다. 하여튼 고려왕실 근친혼 혼인관계는 성골끼리만 결혼했다는 신라왕실 보다 더 복잡하다. 신라는 성골 순수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근친혼 했지만 고려 근친혼은 왕실권력을 내부에서 유지하려는 목적였기에 더욱 복잡했다.


1. 성종과 후계문제


그런데 성종이 17년 가까이 재위를 하면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성종에게는 아들이 생기지 않았다. 성종이 자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고, 기록에 따르면 성종에게 딸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성종이 병약하거나 불임이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왕실에서는 후사를 얻기 위해 여러 후궁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성종이 아들을 두지 못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성종이 유교 정치이념을 강조하면서 왕실 역시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보이려 했던 점이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 언급하기도 한다. 다만 이것 역시 확정된 사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해석에 가깝다.


어쨌든 성종은 자신이 즉위할 때 어린아이였던 경종 아들 '왕송'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정하고, 훗날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 이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많았던 역사 속에서 비교적 아름다운 계승사례로 평가되기도 한다.


비슷한 상황이었던 조선 세조와 비교하면 확실히 다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성종은 왕송 친어머니인 그 유명한 '천추태후'와 정치적 긴장관계가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천추태후는 성종 친여동생 이기도 했으며 목종 즉위 후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TV드라마로도 방영되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천추태후에 대해서는 뒤 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2. 성종 주요 업적


성종 재위기간 동안 이루어진 정책들은 고려 국가체제를 완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 유교정치 이념도입


성종은 불교중심 사회였던 고려에 유교정치 이념을 적극 도입했다. 특히 학자관료였던 최승로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국가운영 전반을 개혁하려 했다.


2) 중앙관제 정비


당나라 제도를 참고하여 중앙관제 정비하고 '2성 6부' 체제를 갖추었다. 또한 중추원 등 기구를 정비하여 행정구조를 다변화하고 체계화하였다.


3) 지방행정 정비와 지방관 파견


성종시대 가장 잘 알려진 치적이다. 전국을 12목으로 나누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는 중앙 정부가 지방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 전환점이었다. 이전까지 지방은 사실상 토호세력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 교육제도 정비


국가 최고교육기관인 '국자감'을 정비하여 유학교육을 강화하였다. 또한 지방에도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파견하여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다.


5) 법과 감찰제도 강화


'어사대'를 통해 관리들 비리를 감찰하고 '간관제도'를 강화하여 왕에게 직언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또한 지나치게 가혹한 형벌을 줄이려는 정책도 시행하였다.


6) 토지제도 정비


관리들에게 '전지'와 '시지'를 지급하여 관료체제를 안정시키려 했다. 이는 관리들이 국가에 의존하도록 만들어 중앙집권체제 강화하려는 정책이었다.


7) 불교억제와 유교장려


성종은 고려사회에서 지나치게 강력했던 사원경제와 불교행사를 일정 부분 억제하고 유교적 국가 의례를 강화하였다.


8) 거란과 외교


성종 재위 후반기에는 북방에서 세력을 키운 거란의 위협이 커지고 있었다. 결국 993년 거란이 고려를 '1차 침입'하게 되는데, 이때 고려 외교관이었던 '서희'가 거란 장수와 담판을 벌여 전쟁을 확대하지 않고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이 담판 결과 고려는 압록강 동쪽 지역인 '강동 6주'를 확보하게 된다.


이 사건은 흔히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불리며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서희 개인활약만 아니라, 성종시대에 이루어진 중요한 외교적 성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보통 서희 업적으로만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정작 국가적 성과를 이끈 성종역할은 거의 부각되지 않고 있다. 나 또한 이 글을 쓰면서 알았다. '여요 전쟁'이 한 창이었던 '목종'이나 '현종'시대 일어난 일인 줄 알았다.


3. 성종 정책에 대한 평가


성종 정책은 고려를 지방호족 중심사회에서 중앙집권국가로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유교적 이상에 기초한 정책을 추진했다는 평가도 있다.


예를 들어 군사보다는 농업과 민생을 강조하는 정책 펼쳤는데, 무기를 농기구로 바꿨다는 야사도 전해진다. 이는 평화시에는 칭송받을 일이겠지만 당시는 거란이 굴기하여 고려를 침략하던 때였다. 지나치게 유교적 이상에 매몰되어 순진했다. 하지만 이 일은 공식역사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야사에만 전해져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러한 유교적 이상주의 정책이 훗날 거란과 전쟁에서 군사준비가 부족해지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 지적하긴 한다 물론 이것 역시 후대 해석이며 당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4. 성종 이후 정치갈등


성종은 38세,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며 천추태후 세력에 의한 독살 등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추측에 가깝다. 드라마와 역사적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성종 사후 왕위는 예정대로 목종에게 이어졌다. 그러나 이후 정치상황은 매우 복잡해지게 된다. 천추태후가 정치전면에 등장하면서 권력다툼이 심해졌다.


천추태후 상간남으로 알려진 '김치양' 존재가 정치문제로 크게 확대되기도 한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훗날 '강조의 정변'으로 이어지며 고려정치에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이 이야기들은 상당히 흥미 있다. 이어지는 편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5. 결론


성종은 고려초기 분권적 체제를 유교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시키는 기반을 마련한 왕이었다. 그의 재위기간 동안 이루어진 제도 정비는 이후 고려정치 체제 틀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성종 사후 왕위계승과 권력갈등은 다시 고려정치 불안 요소로 떠오르게 되었고, 이는 목종시대 정치적 혼란과 거란과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어서 <광종개혁과 왕위다툼> 편은 끝나고 <고려거란전쟁>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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