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5 ㅡ 강조의 정변 1- 황제가 직접 부른 장군에게 죽다)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16
ㅡ 고려거란전쟁 5 ㅡ
(강조의 정변 1- 황제가 직접 부른 장군에게 죽다)
1009년 고려 궁궐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황제가 직접 불러들인 장군이 결국 바로 그 황제를 폐위시키고, 나중에는 목숨까지 빼주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이 바로 고려 정치사를 뒤흔든 <강조의 정변>이다.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었다.
외척세력 제거, 황제폐위, 그리고 이후 거란과 전쟁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정치격변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중앙군 수장이자 서북면도순검사였던 '강조'(康兆)가 있었다.
1. 정변 명분
역사기록에 따르면 강조가 정변을 일으킨 이유는 비교적 분명하게 설명된다.
'목종' 친모 '천추태후'가 승려출신 '김치양'과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았고, 당시 황위계승자로 지목되던 '대량원군'(훗날 현종)을 제거한 뒤 그 아들을 황위에 올리려 했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것이다.
즉, 황실내부에서 황위찬탈 음모 진행되고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 강조가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 '고려사' 등에 기록된 정변 공식적 명분이다.
하지만 이 설명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적지 않다.
정말로 천추태후와 김치양 권력이 황제를 압도할 정도였을까.
2. 과연 목종은 무력했을까
대부분 역사기록은 다음과 같은 분위기를 강조한다.
"천추태후와 김치양 권세가 지나치게 강해 목종조차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기록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맞지 않는 부분들도 적지 않다.
목종은 18세에 즉위했고 이후 12년 동안 황위에 있었다.
이 정도 기간이면 군주가 직접 정치를 운영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시간이다.
실제로 목종초기에는 황제가 직접 추진한 것으로 보이는 정책과 치적들도 기록에 나타난다.
따라서 목종이 재위 내내 어머니에게 완전히 휘둘렸다고 단정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3. 어머니와 황제
목종이 어머니 천추태후에게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보였던 배경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목종의 아버지 '경종'은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천추태후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홀로 남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김치양을 만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목종 어린 시절은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시기였다.
성종시대에는 황위계승 문제로 인해 목종 생명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도 있었다. 그때 끝까지 목종을 보호했던 인물이 바로 천추태후였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목종은 어머니에게 상당한 효심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치양 행동이 문제가 되었음에도 목종이 어느 정도 눈을 감아주었던 이유 역시 이러한 개인적 관계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4. 갈등의 확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점점 복잡해진다.
김치양 정치개입이 커지고 권력 역시 점점 확대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면서 권력갈등 더욱 민감한 문제로 변했다.
왕권과 외척권력이 충돌할 가능성 커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목종이 김치양을 견제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를 개경으로 불러들였다는 해석도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목종의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치명적인 결정이 되고 말았다.
왕이 부른 장군이 결국 쿠데타의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이다.
5. 강조의 선택
정변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결국 목종은 폐위되었고, 이후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종은 유배길 과정에서 목숨까지 잃게 된다.
권력을 장악한 세력 입장에서 이전 군주가 살아 있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기록들을 보면 강조 역시 이 사건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6. 강조의 죄책감
목종은 생전에 강조를 여러 차례 승진시키고 후계문제에도 참여시킬 만큼 신뢰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군주가 결국 자신 정변으로 죽게 된 것이다.
정변 당시 목종 측근 '최항'이 강조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옛적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가.”
이 질문에 강조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목종 사후 능호·시호·묘호를 강조가 직접 정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강조가 거란과 전쟁 중 패배한 뒤 정신적으로 크게 흔들렸다는 기록까지 보면 그는 이 사건을 평생 마음의 짐으로 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정변이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왜 굳이 왕까지 죽어야 했을까.
당시 고려는 건국된 지 100년도 되지 않은 국가였다. 정치 체제 역시 완전히 안정된 상태는 아니었다.
군주가 자신 권력과 생존을 위해 측근세력에게 상당한 권력을 부여하는 일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조선시대만 보더라도 연산군이나 광해군은 폐위되었지만 목숨까지 잃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목종 죽음은 여전히 많은 의문을 남긴다.
7. 황제의 마지막
목종 개인적인 삶을 돌아보면 상당히 비극적인 측면도 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고 황위계승 과정에서도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다. 어렵게 황위에 올랐지만 정치적 갈등 속에서 결국 폐위되고 살해당하고 말았다.
기록에 따르면 유배길에 오를 때 강조는 말 한 필만 내려 보냈다고 한다.
목종은 그 말을 어머니 천추태후 에게 태우고 자신은 고삐를 잡은 채 걸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결국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사실 여부 관계없이 이 이야기는 고려왕조 정치의 비극적인 장면으로 자주 언급된다.
8. 역사기록 문제
흔히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많은 역사기록이 당시 집권세력에게 유리하게 작성되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정변 최종승자였던 현종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이전 권력자였던 목종, 천추태후, 김치양에 대한 평가가 일정 부분 부정적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사료를 모두 조작으로 치부할 수도 없다. 그렇게 되면 역사기록 자체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기록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날마다 썼던 '조선실록'과 달리 고려가 멸망한 뒤 조선에 들어와서 고려시대 여러 자료를 종합해 정리한 역사서이다. 따라서 특정인물 의도만으로 모든 기록이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이 기록들에는 목종이나 강조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내용도 함께 남아 있다.
결국 우리는 남아 있는 기록들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강조의 정변은 단순한 궁중 쿠데타로 끝나지 않는다.
이 사건을 명분으로 곧바로 거란이 침입해 온다. 고려거란 2차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강조의 쿠데타는 어떻게 거대한 국제전쟁으로 연결되었을까?
이어서 ‘강조의 정변’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그 사건이 어떻게 거란과 전쟁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