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4 ㅡ강조의 정변 직전, 고려왕실 스캔들 - 목종,천추태후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15
ㅡ 고려거란전쟁 4 ㅡ
(강조의 정변 직전, 고려왕실 스캔들 - 목종, 천추태후 그리고 김치양)
고려역사에서 가장 복잡하고 논란이 많은 시기가 있다.
바로 <목종, 천추태후, 김치양>
세 인물이 등장하는 시기다.
이 시기는 최근드라마 <고려거란 전쟁>에서도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했다.
이들 권력다툼은 결국 고려왕조 큰 정치 사건인 <강조의 정변>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거란과 2차 전쟁까지 연결된다.
오늘 올리기로 한 강조의 정변에 앞서 그 출발점이 되는 목종과 천추태후 그리고 김치양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1. 거란과 긴장 속에서 시작된 시대
고려는 이미 한 차례 거란과 충돌한 적이 있었다.
앞 편에서 정리한 993년 발생한
<거란의 고려 1차 침입>이다.
이때 고려는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전쟁을 피하고 오히려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성과를 얻었다.
겉으로 보면 고려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고려내부 정치상황은 점점 불안해 지고 있었다.
2. 왕위에 오른 젊은 왕, 목종
997년 고려 제6대 왕 '성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의 조카가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고려 제7대 왕 '목종'이다.
목종의 어머니는 훗날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인물 '헌애왕후'(천추태후)였다.
헌애왕후 혈통을 보면 고려왕실 혼인구조가 얼마나 복잡한지 알 수 있다.
-그녀는 고려 태조왕건 손녀.
-고려 제5대 왕 경종의 왕비
-고려 제6대 왕 성종의 친여동생
-고려 제7대 왕 목종의 어머니
-고려 제8대 왕 현종의 이모
즉 한 사람을 중심으로 여러 왕이 동시에 연결되는 복잡한 구조다. 이 때문에 고려 왕실족보를 보면 머리가 아플 정도로 혼란스럽다.
3. 젊은 과부와 한 남자의 등장
경종은 28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헌애왕후 역시 아직 이십 대 젊은 나이였다. 이 시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김치양'이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한때 승려로 행세했던 인물이며 외모가 준수했다고 전해진다. '정사'기록 에는 안 나오지만 '야사'에는 김치양 성기에 수레를 걸어 둬도 될 만큼 김치양 양기가 셌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결국 헌애왕후와 김치양 사이에는 불륜관계가 형성되었고, 이 사실 조정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된다.
유교에 심취되어 있던 '성종'은 이를 크게 문제 삼아 김치양을 처벌하고 유배 보내기도 했다.
4. 천추태후의 등장
하지만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목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뀐다.
헌애왕후는 '천추전'에서 국정을 주도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녀를 '천추태후'라 부르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바로 김치양을 다시 불러들이는 일이었다.
김치양은 관직을 받고 빠르게 승진하며 정치권력 중심으로 올라간다. 당시 기록을 보면 그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5. 권력의 중심이 된 두 사람
천추태후와 김치양 권력이 커지면서 조정내부 갈등도 점점 커졌다.
기록에는 이들 두 사람에 의해 반대세력에 대한 탄핵, 인사개입, 권력남용 등이 이루어졌다는 비판이 등장한다. 또한 김치양의 집이 왕실에 버금갈 정도로 규모가 크고 사치스러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불만이 점차 확산되면서 반대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에는 장군 ‘강조’도 있었다.
6. 왕위계승을 둘러싼 긴장
더 큰 문제는 왕위계승 문제였다.
기록에 따르면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목종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난 아이를 왕위와 연결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나오기 시작했다. 드라마에서도 이 문제를 중심에 놓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 단순한 권력문제가 아니라 왕조계승 문제가 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또 다른 제1순위 왕위 계승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훗날 고려 제8대 왕인 고려'현종'이 되는 '대원산군'이었다.
대원산군 출생배경 또한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훗날 현종은 어린 시절을 절에서 지내야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훗날 한 정치사건을 통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 사건이 바로 고려정치사를 뒤흔든 <강조의 정변>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7. 목종(穆宗, 980~1009)은 정말 무능한 왕이었을까?
고려 제7대 왕인 '목종'은 정치적으로 외척과 권신에게 권력이 집중된 상황 속에서 '무능한 군주'로 평가되기도 한다. 또한 '고려사'에는 왕이 젊은 신하 유행간을 특별히 '총행'하여 항상 곁에 두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왕이 유행간을 총행 하여 늘 곁에 두었다.”
(王寵幸柳行簡 常置左右)
ㅡ 고려사 목종 편 ㅡ
이 기록에서 사용된 '총행'(寵幸)이라는 표현은 '특별히 총애한다'
'가까이 두고 총애한다' 등으로 풀이되지만 동아시아 '사서'에서 '남색관계'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기록 때문에 목종은 한국사에서 남성신하에 대한 동성애가 비교적 명확히 사료에 나타나는 왕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다만 사료의 '총행'(寵幸) 하였다 표현이 현대적 의미의 동성애 관계로 단정하기 보다는 왕과 총신사이 특별한 관계를 기록한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강조의 정변 이후 왕위에 쫓겨나고 살해까지 당한 목종을 폄훼하기 위한 기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천추태후 권력, 김치양 전횡, 측근 유행간과 관계 때문에 목종이 변태적인 무능한 왕으로 낙인 되어 있지만 목종시대 다른 기록들을 보면 꼭 그렇게 볼 수만 없다.
예를 들어 목종은 즉위 초기에 군제개편을 추진했다.
998년 그는 중앙군을 정비해
'2군 6위' 체제를 확립했다.
이 체제는 이후 고려 군사제도의 기본 틀이 된다.
또 인사문제에서도 상당한 영향력 행사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점을 보면 목종을 단순한 허수아비 왕으로만 보기 어렵다.
오히려 목종이 '외척정치'를 배격하고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따라서 목종에 대한 평가는 '강조의 정변' 이후 작성된 기록에 담긴 정치적 해석 가능성까지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후 고려정치 흐름을 완전히 바꾸는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강조의 정변>이다.
이 사건은 목종몰락, 현종즉위 그리고 이어지는 거란과 2차 전쟁으로 이어진다.
다음 편에서는 <강조의 정변>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정치싸움을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 초롱박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