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14

고려거란전쟁 3 ―전쟁을 멈춘 혀, 서희 외교담판과 '강동 6주' 획득)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14

― 고려거란전쟁 3 ―

(전쟁을 멈춘 혀, 서희 외교담판과 '강동 6주' 획득)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전쟁을 반복해 왔다.


인류는 언제부터 전쟁을 정당화하기 시작했을까.


전쟁 명분은 언제나 그럴듯하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


전쟁은 늘 ‘불가피한 선택’으로 설명되어 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전쟁 속에서 늘 ‘영웅’을 찾는다.


알렉산더, 카이사르, 칭기즈칸, 나폴레옹...


하지만 나는 그들을 불세출영웅으로 보지 않는다. 그저 거대한 전쟁을 일으킨 권력자들일뿐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수천만 명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전쟁을 증오한다.


어떤 이유로도 인간 대량살육을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곳곳에서 총성이 멈추지 않고 있다.


우리 한국사 역시 전쟁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사실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6·25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단지 휴전 상태일 뿐이다.


이런 전쟁 이면에는 언제나 무기, 자본, 그리고 권력의 냉혹한 계산 존재한다.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 어떤 전쟁이라도 막아내야 한다.


내가 인류 역사에서 진정한 영웅으로 보고 싶은 인물은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막아낸 사람이다.


칼을 들지 않고 나라를 지킨 사람,

전쟁을 시작하지 않게 만든 사람,

피를 흘리지 않고 승리를 얻은 사람.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이름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역사 속에는 그런 장면이 있다.


고려 역사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칼 없이 성을 얻었다.>


고려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평화의 순간 가운데 하나다.


993년, 거란 80만 대군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였다.


그리고 한 사람이 나섰다.


"칼이 아니라 혀로 전쟁을 멈추겠다"라고.


그가 바로 '서희'였다.

고려 '성종' 재위시기였다.


이 사건이 바로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이다.


당시 거란 목표는 분명했다.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던 고려를 압박하고, 송나라와 관계까지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대군 침입에 고려 조정은 큰 혼란에 빠졌다.


강경하게 싸워야 한다는 주장과 현실적으로 화친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견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누군가는 성을 지키며 싸우자 했고, 누군가는 수도를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해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나라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나섰다.


전쟁이 아니라 외교로 해결하겠다고 나선 인물.


그가 바로 '서희'였던 것이다.


서희는 스스로 말했다.


“내가 나가 담판을 지으면 싸우지 않고 물러가게 하겠다.”


그는 거란장수 '소손녕'과 직접 마주 앉았다.


외교가 곧 전투였던 순간이었다.


서희는 먼저 고려의 역사적 정통성을 강조했다.


“우리는 고구려의 후예다.”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가라는 점을 분명히 하며 고려의 역사적 지위를 주장했다.


그리고 거란 침략명분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거란이 과거 고려사신을 죽였던 사건을 지적하며 도덕적 정당성을 흔들었다. 고려와 송나라 관계 역시 군사동맹이 아니라 단순한 외교관계일뿐이라고 강조했다.


서희 언변에 거란 논리는 점점 힘을 잃어 갔다.


그러자 서희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전쟁을 멈추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압록강 동쪽지역, 이른바 '강동 6주'를 고려가 관리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침략군에게 영토문제를 제기하는 대담한 외교였다.


논리는 분명했다.


고려는 고구려 계승국가이며, 거란이 멸망시킨 발해 역시 고구려 계통 국가였다.


따라서 압록강 동쪽지역은 역사적으로 고려 영향권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그 지역은 여진세력이 장악하고 있어 거란과 고려 사이의 통로가 막혀 있었는데, 이를 고려가 정리하면 오히려 거란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현실적인 논리도 제시했다.


당시 거란 역시 계산하고 있었다.


송나라와 긴장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고려와 장기전쟁을 벌이는 것은 부담이었다.


결국 거란은 철수를 선택했다.


고려는 이후 '강동 6주'를 바로 얻은 것은 아니었지만, 거란의 묵인아래 여진세력을 정리하며 '강동 6주' 지역을 고려영토로 실제로 편입하게 된다.


말이 칼을 대신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다.


서희의 외교가 모든 갈등을 완전히 끝낸 것은 아니었다.


거란은 이후에도 고려를 압박했고 결국 17년 뒤 다시 침략하게 된다.


그 사건이 바로 1010년에 발생한

<제2차 고려거란전쟁>이다.


즉 서희의 담판이 영원한 평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희 외교담판이 가진 의미는 분명했다.


그 외교는 당시 당장 벌어질 수 있었던 대규모 전쟁을 막아 냈고, 고려가 국력을 정비할 시간을 벌어 주었다.


그리고 그 사이 고려는 북방방어선을 강화하며 이후 전쟁에 대비할 수 있었다.


서희 외교담판으로 획득한 '강동 6주'는 거란 2차 침략 당시 고려 중요한 방어선이 되었으며, 고려 승리 기반이 되었다.


대군이 침략했다고 해서 반드시 칼을 뽑는 것만이 용기는 아니다.

때로는 전쟁을 피하는 선택이 더 큰 용기가 될 수도 있다.


흥미롭게도 서희 외교담판 이후 약 600년 뒤 한반도에는 비슷한 구조 위기가 다시 찾아온다.


거란 대신 새로운 세력 '여진'의 후금(청)이 등장했을 뿐이다.


그 사건이 바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당시 조선은 결국 전쟁을 피하지 못했다. 조선사대부들은 다 망해 가던 명나라와 의리를 중시하며 청과 관계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이러한 경직된 외교 태도는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수 십만 백성이 희생되고, 왕은 굴욕적 항복의식을 치러야 했다.


역사는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던진다.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우리는 왜 그 길을 선택하지 못하는가?


서희는 무조건 평화를 외치는 이상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가능한 모든 외교적 수단을 먼저 사용하고, 그것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현실적으로 국익을 생각했던 정치가였다.


오늘날 대한민국 역시 여전히 휴전선 위에 서 있다.


전쟁 억제를 위한 군사력도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평화를 위한 외교적 지혜 역시 필요하다.


힘의 외교만 유일한 길 아니라는 역사적 사례를 우리에게 이미 알려준 인물, 그 이름이 바로 '서희'다.


<서희의 혀는 칼보다 강했다>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말재주가 아니라 전쟁을 막아 내겠다는 결심에서 나온 힘이었다.


싸우지 않고 얻은 평화는 결코 약한 평화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전략적이고, 가장 인간적인 선택일 수 있다.


역사는 전쟁에서 이긴 사람을 오래 기억한다. 그러나 인류가 정말 기억해야 할 사람은 전쟁을 막아낸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이어서 <강조의 정변>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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