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837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837
ㅡ 인류구제가 불가능한 시간, 영화 <25時>를 보고 ㅡ
오래 전에 봤던 영화를 어제 다시 봤습니다. 명화가 그렇지요. 같은 장면인데도,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보면 전혀 다른 빛깔로 다가 옵니다.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하루 스물네 시간, 일 년 열두 달 365일, 우리가 숨 쉬듯 당연히 받아들이는 이 체계는 자연의 창조물이 아니라, 인류가 스스로 발명해 낸 위대한 관념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흐르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짧고 가볍게, 또 다른 이에게는 무겁고 가혹하게,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인간의 시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시각, <25시>
이 제목은 '루마니아' 출신 소설가 '게오르규'가 1949년 발표한 소설에서 비롯 되었습니다.
2차세계대전 중 '나치'와 '소련'의 볼셰비키 압박 속에서, 루마니아 민족 고난과 개인 절망을 응축한 작품입니다.
루마니아 수난사는 우리민족의 고난사와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 '요한'은, 시대의 광풍 속에서 자신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끌려다니며 고통을 겪습니다.
그 모습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의 소용돌이를 지나온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들 삶과 겹쳐집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1967년 프랑스에서 영화 <25時>가 개봉 되었습니다.
주연은 대배우 '안소니 퀸', 감독은 '앙리 베르누이'.
안소니 퀸은 잘생긴 배우는 아니지만, 그 얼굴에는 인간의 굴곡진 삶을 그대로 품어내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영화 속 요한으로서 그는 그 어떤 배우보다도 적격이었습니다.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루마니아 농부 '요한'은 순박한 사람이다. 미인 아내 스칼라와 아이와 함께 소박한 행복을 누리던 그는, 어느 날 그 지역 경찰서장이 미인 아내를 노리고, 음흉한 모략에 휘말려 유대인으로 몰려 수용소로 끌려간다. 그 뒤로 이어지는 그의 삶은 끝없는 수난 연속이었다. 유대인 수용소, 탈출, 또 다른 수용소, 독일군 두상학 표본으로 전락한 굴욕, 군복 광고 모델이 되는 아이러니, 그리고 소련군 포로가 되어 또다시 재판 받는 악몽. 그는 무려 13년 간 자신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오직 시대라는 톱니바퀴 속에서 부서지며 살아야 했다. 요한이 산전수전을 모두 겪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요한을 맞이한 것은, 요한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미인 아내와 재회가 아니라, 아내가 소련군에 의해 강간당해 태어난 아들이었다. 영화 마지막 장면 에서, '요한'을 연기한 '안소니 퀸'이 그 아이를 안고 사진을 찍는 기자 부탁대로 억지로 웃다가 끝내 일그러지는 표정을 짓는다.]
마지막 '안소니 퀸' 얼굴 표정 하나에 이 영화 전체 내용인 전쟁과 억압, 인간의 무력감 등 모든 것이 담겨 있었습니다.
웃는 것이지, 우는 것인지, 허망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표정을 본 그 순간, 내 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안소니 퀸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것 보고 대배우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는 배우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25시>는 단순히 루마니아의 비극을 넘어, 약소국의 개인이 어떻게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낙엽처럼 휘날리는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 이야기 이기도 했습니다.
게오르규는 말합니다.
"<25시>는 이미 인간구제가 불가능한 시각이다. 구세주조차 도착하기에 늦은 시간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서구사회는 이미 그 ‘25시’에 와 있었으며, 인간 존엄과 인권은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영화 속에서도 한 소설가가 '요한'을 만나며 이 시간의 의미를 되새기고, 끝내 소련군 총탄에 쓰러집니다.
이 장면은 독일과 소련, 적과 해방군은 결국 다르지 않다는 냉혹한 진실 드러내 보여줍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수많은 ‘25시’가 있었습니다.식민지의 고통, 전쟁 폐허, 분단의 상처 등등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과연 ‘25시’를 벗어난 것일까요?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지금 우리 현실에서도 ‘25시’에 여전히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우리 '청년'들을 보십시오.
끝없는 스펙경쟁, 취업난, 불안정 한 일자리… 그래서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해야 하는 세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청춘이 빛나야 할 시절이 그저 버티기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중년'들은 어떻습니까?
회사에서는 구조조정과 고용불안 시달리고, 가정에서는 부모 모시고, 자식 키우고, 사방에서 짐을 지고 서 있어야 합니다.
'중년의 위기'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노년'세대는 더 안타깝습니다.
세계 10위 경제대국이라면서도, 여전히 노인빈곤율과 자살률은 OECD 최고 수준입니다.
지하철역에서, 편의점에서, 폐지 를 줍는 거리에서 칠순, 팔순 어르신들이 여전히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고독사'라는 단어가 뉴스 속 용어만 아니라, 바로 우리 이웃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 시계는 몇 시쯤에 멈추어 있을까요?
혹시 이미 되돌릴 수 없는 <25시>를 넘어가 버린 것은 아닐까요?
영화 <25時>가 던지는 물음은 결국 이것입니다.
“한 개인이 존엄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게오르규는 세계대전이라는 광풍 속에서 그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현실 속 에서 보다 단순하면서도 본질적 해답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요?
'청년의 꿈'이 꺾이지 않도록 사회가 조금만 더 손을 내밀고,
'중년의 짐'이 무겁지 않도록 제도가 조금만 더 어깨를 보태며,
'노년의 삶'이 고독하지 않도록 공동체가 조금만 더 따뜻하게 품어준다면,
우리는 어쩌면 이 <25시>에 가까이 다가가는 시간을 다시 <24시>로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세대가 서로 등을 돌리면 시계는 <25시>로 더 가혹하게 흐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한다면, 우리는 이 어둡고 절망적 <25시>로 향해가는 것을 밈추고, 다시금 새로운 <24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요?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