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떠나보낸 뒤, 남는 것

초롱초롱 박철홍 지금도 흐른다! 832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 지금도 흐른다!

832


ㅡ부모님 떠나보낸 뒤, 남는 것ㅡ


가까운 이의 죽음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허망함으로 가득 채웁니다.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해주신 부모님 두 분 모두 이제는 저 세상 으로 떠나셨습니다.


세월은 흘러, 언젠가 우리 또한 이 길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아들들 기억 속에는 희미하게나마 내 부모님 자취가 남겠지만, 그마저도 머지않아 사라져 버리겠지요.


결국 남는 것은 작은 묘자리 하나뿐일 것입니다.


조금 더 세월이 흐르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백 년쯤 뒤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았다는 사실조차 잊히고 말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서전을 남겨 후대에라도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그런 흔적 을 남길 분들은 아니셨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작은 글 한 편이라도 남겨드리고 싶습니다.


이 글은 내가 20년 전쯤 썼던 기록입니다.


아부지 인생을 이 짧은 글로 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나마 기록으로 남겨 놓고 싶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정리하여 올려봅니다.


**************


ㅡ 아부지라고랄? ㅡ


언젠가 어디선가 본 시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아부지가 마시는 술잔에는 절반이 눈물이다.”


정확한 문구는 아니지만, 그 뜻은 오래도록 제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제 저도 어느새 아부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두 아들 녀석들을 책임져야 할 나이가 되었으니, 아부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제 마음속의 아부지는 늘 애증이 교차하는 존재였습니다.


아부진 살아생전 제 일에 단 한 번도 참견하지 않으셨습니다.

거의 무관심이라 할 만큼, 집안 일에는 발을 담그지 않으셨지요.

대신 밖에서는 늘 존경을 받으며, 지역유지로 활발히 활동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가정은 늘 불화와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엄마와 아버지는 태생적으로 너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충돌의 불꽃은 우리 형제자매 청소년기 지긋지긋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저의 가장 큰 소원은 그런 싸움서 벗어나는 것 이었습니다.


아부지는 자식들에게 무관심한 자유방임형이셨습니다. 엄마는 아부지와 정반대로 악착같이 자식들 사랑하고 간섭하셨습니다.


그 극단의 두 사람 사이에서 자라난 제가 때론 헛웃음 나오고, 때론 괴롭고 아픈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가정에 무심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선출직에 나서 많은 이들을 만나면서, 나는 비로소 다른 눈으로 아버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 기억 속 아버지는 늘 휴일 이면 집을 비우고 결혼 주례를 보러 나가시던 분 이었습니다. 수백 쌍의 신혼부부 앞에 서셨고,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이 제 아부지가 주례를 봐 주셨다고 했고, 또 아부지를 아는 대부분 사람들은 “당신 아버지는 욕심 없고 정말 좋으신 분이셨다”는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저한테 아부지 모습은 집안에서 어머니와 다투던 모습만 각인되어 있었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제게 낯설면서도 새로운 아버지 얼굴을 보게 해주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세대 많은 이 들이 이와 비슷한 기억을 안고 살아갈 것입니다.


가정에는 소홀했으나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묵묵히 헌신했던 아부지들.


아부지들 삶은 자식들에게 때로는 원망으로 남았고, 시간이 지나서 야 이해와 존경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아부지를 새롭게 바라보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 이기도 합니다.


원망 속에도 사랑은 있었고,

거리감 속에도 그리움은 깃들어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아부지 삶이 결국 우리를 위한 또 다른 방식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 아부지가 제게 처음으로 환하게 웃어주신 날이 있었습니다.


제가 직장을 다니면서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던 시절,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고 35살 나이로 마지막 국가직 7급 필기 시험에 합격했을 때였습니다.


그때 아부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인자 디얐다. 나가 니헌티 짐하나 벗었다.”


아부지의 그 환한 웃음이 아직도 눈앞에 선합니다.


그러나 내 점수가 커트라인에 걸려있어서 면접에서 탈락했고, 실망스러운 아부지 표정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때의 좌절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고나서 5년 정도 지나서 건강하시던 아부지는 저녁 식사 후 평온히 주무시다가 새벽녘 천식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73세, 젋다면 젋은 나이였습니다.


세상을 떠난 아부지,


이제 더는 만날 수 없는 분.


그분은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 유일한 뿌리였고, 나와 가장 가까운 유전자의 그림자였습니다.


애증을 남기고 떠나신 그 빈자리 지금도 제 마음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돌아보면 저 또한 아부지께 따뜻한 말 한마디, 효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 회한이 늘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저도 두 아들 아부지 자리에 서 보니, 이제는 두 아들 에게 내가 어떤 아버지로 기억될 지 자문하게 됩니다.


저는 아부지가 걷던 길을 따르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지만,

문득 문득 제 안에서 아부지 모습을 발견하며 놀라곤 합니다.


정말 다른 길을 걷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닮아가는 구석들이 보이곤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는 아부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아버지를 인생의 스승으로 삼아 그대로 따르는 아들,


또는 반면교사로 삼아 정반대 길을 걷는 아들.


대부분의 아들들은 그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두 부류 모두,

아버지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 안에서 아부지 흔적을 발견하게 되지요.


우리 아들들에게 저는 어떤 아부지로 남을까요?


부디 제가 바라는 모습으로 남기를 소망합니다. 쉽진 않겠지만, 꼭 그랬음 합니다.


“남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 아버지가 된다.”


그 말이 이제는 뼈저리게 와닿습니다.


아부지가 돌아가신 지 3년 뒤,

저는 생전 처음으로 아부지만을 위한 벌초를 했습니다.


낫이 없어 친구 집에서 날 빠진 낫을 빌려와,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시간을 넘게 풀을 손으로 뜯다 시피 하며 묘를 정리했습니다.


비오듯 흐르는 땀속에 그날 느낀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오로지 아부지만을 위해 제 손으로 땀을 흘렸으니까요.


조금 있으면 또 설입니다.


겨울이라 벌초할 풀도 없겠지만,

그래도 아부지 산소에 한번 더 다녀와야겠습니다.


제게 남은 효도라곤,

그 묘 앞에 서는 일밖에 없으니까요.


아부지라고랄~?


이제 저도 진짜 아부지가 되어버렸당께요.


*************


윗 글을 AI에 '시'처럼 바꾸어 달라고 했더니 아래 처럼 나오네요.


참 좋은 세상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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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라고랄~?


아부지가 마시는 술잔엔

절반이 눈물이라 했지요.


이제 나도 아부지가 되어

두 아들놈을 앞에 두고

그 구절을 떠올립니다.


살아생전 아부진

내 일에 단 한 번도 참견하지 않으셨습니다.


무관심이라 해도 좋을 만큼,

가정보다 밖을 더 중히 여기셨지요.


밖에서는 존경받는 유지,

집 안에서는 늘 싸움뿐인 남편,

그리고 애증의 아버지.


엄마는 악착같이 제 삶에 간섭했고,

아부지는 끝내 말없이 바라보셨습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자라며

벗어나고 싶다는 소망 하나로 청춘을 견뎠습니다.


딱 한 번,

국가직 7급 필기 합격 소식을 전했을 때,


아부지는 환히 웃으셨습니다.


“인자 디얐다, 나가 니헌티 짐하나 벗었다.”


그날의 웃음은 아직도 눈앞에 선합니다.


그러나 면접에서 탈락 소식에

실망하신 그 표정도 함께 남았습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저녁 잘 드시고 곤히 잠드시던 아부지는 새벽녘 천식으로 홀연히 떠나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없습니다.

나를 이 땅에 있게 한 분,

나와 가장 닮은 피를 지닌 분.


남은 것은 애증뿐,

그리고 따뜻한 말 한마디 못 드린

나의 회한뿐입니다.


세월 흘러 나 또한 아부지의 자리에 서니

내 아들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

가끔은 두렵습니다.


닮고 싶지 않다 다짐했지만

문득문득 내 안에서 아부지의 그림자를 봅니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나는 다른 길을 간다,

다짐하며 또 하루를 삽니다.


남자는 아버지를 잃고 나서야

진정한 아버지가 된다 했지요.

그 말이 이제는 뼈에 사무칩니다.


아부지 떠난 지 삼 년,

나는 처음으로 벌초를 했습니다.

날 빠진 낫으로 한 시간을 넘게,

손으로 풀을 뜯어내며 땀을 흘렸습니다.


태어나 처음,

오롯이 아부지만을 위해 드린 노동이었습니다.


겨울이 오고 곧 설이 옵니다.

풀은 자라지 않아도,

나는 아부지 산소에 다녀오렵니다.

내게 남은 효도라곤

그 자리에 서는 일뿐이니까요.


아부지라고랄~?

이제 나도 진짜 아부지가 되어버렸당께요.


이렇게 자유시로 옮기니, 수필보다 감정의 결이 훨씬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혹시 원하시면 제가 더 짧게 응축한 시(한두 페이지 분량)로도 만들어드릴 수 있는데,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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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라고랄~?


아부지가 마신 술잔엔

절반이 눈물이라 했지요.


무심한 듯,

한 번도 제 일에 참견 않으시던 분.

밖에서는 존경받고,

집 안에서는 늘 불화뿐인 분.


그런 아부지가

단 한 번 환히 웃던 날,

“인자 됐다, 짐 하나 벗었다.”

그 말이 제 가슴에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곧 떠나셨지요.

저녁 드시고 곤히 잠든 새벽,

홀연히 천식으로.


남은 건 애증,

그리고 따뜻한 말 한마디 못 드린

저의 회한뿐입니다.


세월 흘러, 나도 아부지가 되었습니다.

닮고 싶지 않다 다짐했지만

문득문득 내 안에서 아부지를 봅니다.


남자는 아버지를 잃고 나서야

진짜 아버지가 된다 했지요.

그 말이, 이제는 제 삶입니다.


더 압축해준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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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라고랄~?


무심한 듯

한 번도 말 없던 아부지,


떠난 뒤에야

내 안에서

그 얼굴을 봅니다.


남자는 아버지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가 된다지요.


ㅡ 초롱박철홍 ㅡ



아버지에 대한 지역신문기사를 찾아보니 이 정도로만 남아 있습니다.


['광복30년 담양인물집'의 저자 '박성환' 선생은 1929년 담양에서 출생하여 서중, 일고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제8기생으로 입학 했으나 축녹증으로 자퇴하고, 성균관대 법대에

입학 재학중 6.25로 귀향, 대한청년단 담양군 단장과 재건국민운동 郡위원장, 축산협동조합장 등을 지낸 反共鬪士이자 政治家로 담양 발전에 一路邁進한 鄕土史의 큰 支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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