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트라파니로 갔고, 그곳에서의 이틀과 팔레르모에서 이틀을 여느 관광객처럼 즐겁게 보낸 후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트라파니와 팔레르모에서 좋은 것을 많이 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참 좋았지만, 우리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마크리의 무료주차장에서 하릴없이 보낸 일주일이었다. 시칠리아에서 와서 며칠 동안은, 솔직히 이 돈으로 이렇게 시간을 보낼 바에는 그냥 비행기를 타고 와서 체팔루 같은 아름다운 해변이 있는 도시에 숙소를 잡고 며칠 잘 보낼 걸 그랬다고 후회도 했지만, 여행의 말미에는 결국 우리에게는 캠핑카 여행이 가장 행복한 여행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하고 불편하고 고생을 하는데도 그게 좋으면, 그건 정말 찐인 거지.
우리는 그 이후에도 캠핑카를 타고 이탈리아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그리고 겨울에는 출산을 하는 언니를 도우러 한국에 다녀왔고, 그 후에는 아르헨티나에 사는 남편의 가족들을 만나러 아르헨티나에도 몇 달 다녀왔다.(체류허가증 발급 전이라도 솅겐국가가 아닌 나라로는 출국이 가능하다) 그렇게, 원래 계획했던 유럽을 떠도는 여행은 시작조차 해 보지 못하고 생각했던 기간의 마지노선인 2년이 지나갔다. 통장 잔고는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제서야 나의 2년짜리 체류허가증이 발급되었다.
아~ 어쩌란 말이냐~ 이제 와서 체류허가증을 내 주면..
원래 정했던 기간인 2년이 지났고, 돈도 그만큼 썼으니 원래 하려던 유럽을 떠도는 여행을 하지 못했더라도 이만 접어야 하는 걸까. 사실 체류허가증 발급이 (최초 발급도 아니고 연장임에도) 하염없이 늦어지면서 언젠가부터는 이렇게 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체류허가증이 나오고 나서 접으려니 너무 아쉬운 거다. 이제 드디어 다른 나라로 나갈 수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찔끔찔끔 여행하고 말려고 가진 모든 걸 털어 한국을 떠나온 게 아닌데.. 이대로 접으면 이 아쉬움이 평생 갈 것 같았다. 인생에 회한을 남기지 않겠다고 한 여행이 더 큰 아쉬움을 남기면 안 되기에 우리는 결국 유럽 여행을 하기로 결정했다. 단, 서유럽만 여행하고 최대 6개월 안에는 꼭 돌아오기로. 기간은 지금까지 여행 중 가장 길지만 예산은 훨씬 적게 잡았다. 돌아와서 일을 구하고 생활이 안정되기까지 몇 달 월세 낼 돈과 최소한의 생활비는 남겨야 했으니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이 한창이어서 기름값이 많이 오른 것이 걱정되었지만 그래도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은 이탈리아보다 물가도 저렴하고, 우리가 이제 나름 베테랑 캠핑카 여행자가 되었으니 돈을 최대한 아낄 수 있다는 심산이었다.
만료된 캠핑카의 보험을 갱신하고, 추가로 수리를 하고, 필요한 물품을 채우며 처음 떠나는 타국에서의 장기 여행을 단단히 준비했다. 그리고 2023년 5월 13일, 이제는 정말 코앞에 닥친 빈털터리가 될 두려움을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두고 우리는 드디어 바라던 유럽 여행을 떠났다.
안녕하세요? 마레입니다. 지금까지 이탈리아 여행 이야기를 읽어 주셔서 감사드려요. 시칠리아 이후의 이탈리아 여행 이야기는 생략하고 이 매거진은 이렇게 마무리하려 합니다. 일단은 이렇게 마무리하지만 천천히 여유를 두고 하나씩 풀어 보도록 할게요. 인스타그램에 사진 위주로 올리고 있으니 여행 사진들과 남은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인스타그램 구경 와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bei_momenti_mare)
드디어 떠난 유럽 여행 이야기는 새로운 매거진에 올리려고 해요. 에피소드 위주로 짧은 호흡의 글을 써 볼까 해요. 쓸 내용을 제대로 준비한 뒤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