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끝에 우리는 다시 마크리의 무료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바다 근처에 있는 무료 주차장으로는 이만한 곳이 없다고 판단했고, 더이상 돌아다니느라 허비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알아보니 멀지 않은 산 비토 로 카포에 있는 캠핑장에서 물만 갈 수도 있다고 해서 이번에는 좀 더 느긋하게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우리 차는 3일에 한 번은 오수를 비우고 새 물을 넣어야 해서 무료 주차장에 오래 머무르기가 힘든데,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캠핑장에서 5유로만 내면 물을 갈 수 있으니 마침 다행이었다.
하지만 샤워까지 해결하지는 못 하기 때문에 수영하고 남은 소금기라도 씻어내기 위해서 햇볕에 데워서 쓰는 20L짜리 워터팩에 물을 가득 담아왔다. 마실 물과 먹을 것도 최대한 사 왔다. 냉장고가 없어서 한계가 있었지만 사 온 재료를 소진한 후에는 아침마다 오는 빵차에서 빵과 피자, 샌드위치를 사 먹기도 하고 첫 번째 해변에 있는 매점에서 가끔 맥주를 사 마시기도 하면서 일주일 정도를 이곳에서 보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여유롭게 보낸 그 며칠이 참 행복했다. 우리는 가깝고 모래사장이 있는 첫 번째 해변보다, 멀고 열차에서 내려서도 힘들게 걸어들어가야 하는 바위 해변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사람도 적고 물이 훨씬 맑았던 그 바다. 그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와 이곳 주차장에서 보낸 시간들 덕분에 시칠리아까지 온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굳이 캠핑카를 타고 시칠리아에 오는 바람에 한 고생들과 버린 돈과 시간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올 지경이니, 이곳에서 보낸 시간들이 아니었다면 캠핑카를 타고 여기까지 온 것을 분명 후회했을 것이다.
아침마다 오는 빵차에서 빵을 사 먹는 것도 이곳의 큰 즐거움이었다. 크루아상과 비슷하지만 더 크고 식감이 부드러운 꼬르네또(Cornetto)는 커스터드 크림이 들어간 것과 피스타치오 크림이 들어간 것 두 가지를 먹어 봤는데 두 가지 다 빵이 부드럽고 크림이 가득 들어 있어 정말 맛있었다. 아침에 커피와 같이 먹으면 정말 최고. 가격도 저렴해서 안에 들어간 크림의 종류에 따라 가격이 다르긴 하지만 하나에 2유로를 넘지 않았다. 넓은 들판과 먼 바다를 보며 크림이 가득한 빵을 베어물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시간, 어느 좋은 커피숍이 부럽지 않았다.
점심으로 사 먹었던 빠네 쿤자또(Pane cunzato)도 잊을 수 없는 맛이다. 시칠리아어로 양념빵이라는 뜻의 빠네 쿤자또는 토마토와 오레가노, 시칠리아 전통 치즈(caciocavallo), 올리브오일, 엔초비가 들어가는 시칠리아 샌드위치인데, 엔초비가 들어가서 비릴 것 같았지만 전혀 비리지 않고 신선하면서 감칠맛이 있어 정말 맛있었다. 나는 원래 엔초비를 안 좋아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엔초비의 매력을 알게 된 것 같다.
윗면을 빵가루로 덮어 구운 것이 특징인 시칠리아 피자 스핀쵸네(Sfincione)도 이때 처음 먹어 봤는데, 옛날에 치즈가 없어서 대신 빵가루를 뿌렸던 것이 레시피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여기도 엔초비, 오레가노, 양파, 토마토소스, 시칠리아 치즈가 들어 간다. 이것도 맛있어서 매번 빠뜨리지 않고 사 먹었다.
그렇게 우리는 6일 동안 이곳에 있었다. 이때 시칠리아는 섬 곳곳에서 끊임없이 산불이 날 정도로 날씨가 건조하고 뜨거웠는데, 이곳은 낮에는 뙤약볕에 뜨겁게 달아올라도 해가 지면 바다에서부터 탁 트인 넓은 들판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와 캠핑카에서 지내기 좋았다.
마음 같아서는 남은 여름을 다 이곳에서 보내도 좋을 것 같았지만 그날은 7월 8일이었고, 우리는 12일에 팔레르모에서 배를 타야 해서 이제 이곳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워터팩에 든 미지근한 물로 소금기와 기름기를 씻어내는 걸로는 더이상은 힘들기도 했다. 이제는 샤워를 해야 했고, 마침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 트라파니(Trapani) 외곽에 샤워가 가능한 주차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