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싣고 갈 달빛은 무엇인가

[불난 집 아랫집의 간접피해 보상기] 12화

by 조서경

[본 글은 개인 경험 기록이며, 개인적 판단을 포함합니다. 상세 고지는 글 하단을 참고하세요.]


이 시리즈를 10화까지 올리고 나서 다음 글을 올리는데 잠시 망설였다. 화재 피해를 자세히 적었더니 일부 지인들이 읽기 힘들었다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고통의 시간을 기록하고, 같은 경험을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려는 마음에 구체적으로 적었더니, 읽는 이들이 내가 겪은 고통을 느껴버린 듯했다.


그런 피드백을 받으면서 2013년에 개봉한 영화 <더 임파서블>이 생각났다. <더 임파서블>은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의 재난 영화로, 2004년에 발생한 동남아 쓰나미에 휩쓸렸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가족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여 태국으로 여행을 떠난 부부와 세 아들은 해변가에서 즐겁게 보내다 갑작스러운 쓰나미의 공격을 받고 뿔뿔이 흩어진다. 서로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가 결국 재회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가족의 스토리와 함께 내가 인상적으로 봤던 점은 재난 그 자체였다. 해일이 육지의 모든 것을 휩쓰는 것까지는 뉴스에서 많이 봤고, 재난에 대한 상상력도 거기에서 그쳤었다. 이 영화는 해일에 휩쓸린 뒤, 물속의 상황을 보여준다. 무너진 건물, 깨진 유리 등 육지의 잔해들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밀려오면서 해일에 휩쓸린 사람을 치고 찌른다. 그 장면을 보았을 때 내가 베이고 잘리는 것처럼 통증을 느꼈다. 그동안 롱샷으로 재난을 봤다면 이건 클로즈업이다.


재난을 보는 것과 겪는 것은 많이 다른 것 같다. 책의 소개 기사를 읽는 것과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정독하는 것의 차이만큼. 내가 <더 임파서블>을 보면서 느낀 고통을 내 글을 읽는 지인들이 느끼는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은 화재의 간접피해에 관한 내용은 이제 거의 적었다. 작년 12월경에는 피해 물품을 거의 다 버리거나 이동 보관했고, 집에서 나던 냄새도 청소와 환기를 통해 어느 정도 수습했다. 이후에는 보험 청구 과정에서 느끼고 배운 점을 적을 예정이다.


2025년 1월에 내 개인보험에 보상 청구를 했다. 처음에는 내가 제출한 피해 내용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으나 4개월 간의 협상 끝에 일부 가재도구의 전손이 인정되었다. 그리고 그 외 나머지 피해는 발화 세대 보험에 청구했다. 정리해 보니 피해액은 생각보다 컸다. 구제하는 데 드는 비용, 폐기 비용, 새 물품 구매 비용, 이동 이주 비용, 의료비 등. 그러나 이 협상은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다. 발화 세대의 개인보험과 아파트 단체보험 양측은 각각 보상 가능한 범위를 제시하며 나머지는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였다. 내 입장에서 보면 제시된 보상 범위가 매우 협소했으며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개인보험에 말씀하시죠', '그건 단체보험에서 할 일이죠' 이런 핑퐁게임이 석 달 이상 이어져, 금융감독원에 협상 대상이 누구인지 알려달라는 민원을 낸 것이다. 그리고 지난 9월 27일에 금융감독원으로부터 한 통의 카톡을 받았다.


“귀하의 민원에 대해 금융회사가 자율적으로 해결하도록 하는 절차(자율 조정)를 거쳤으나 자율 조정이 성립되지 아니하였습니다.”


자율 조정 기간은 3주인데 그동안 보험사의 입장이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리고 금감원에 진행 과정을 문의했을 때 보험사가 자율 조정 이행을 위해 유예를 요청했다는 것까지는 들었다. 그리고 9월 27일 자율 조정이 성립하지 않았다는 문자를 받은 것이다. 이제 금감원에서 조정 의견을 낼 때까지 기다려봐야 한다.


그래서 한번 돌아보고 싶기도 했다. 나는 왜 이 피해와 피해 증명에 이렇게 열중하는 것인가


“아이고 우리 언니가 꽂히셨네, 꽂히셨어.”


만날 때마다 화재 얘기를 하는 나에게 후배 작가가 말했다. 방송 아이템을 선정할 때, 기획할 때는 그 아이템에 몰두하는데 꽂혔다고 말한다. 흔히 쓰는 말이어서 브런치만 검색해 봐도 ‘여행에 꽂히다’, ‘재무제표에 꽂히다’. ‘노래에 꽂히다’ 등 많다. 개구리에도 꽂히고, 바람에도 꽂히고, 대학 동아리에도 꽂히고, 참 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꽂히고 있다.


‘꽂히다’의 낱말 뜻은 이렇다. (1) 어디에 박히어 세워지거나 찔리어 넣어지다. (2) 다른 사람에 의해 내던져져 몸이 거꾸로 박히게 되다. (3) 윷놀이에서 말이 뒷밭에 놓이다

그러니까 낱말 뜻대로 보면 피동태다. 내가 목표물을 인지하고 좋아서 달려갔다기보다는, 누군가가 나를 그곳을 향해 던져버렸다는 뜻이다. 나는 왜, 누구에 의해, 무엇 때문에 이런 상황과 절차에 던져졌단 말인가.


사고 후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때, 보험사의 대응이 납득하기 힘들 때마다 누적된 분노가 11월쯤에는 목구멍까지 차서 일렁거렸다. 그러다 예상치 않았던 일이 벌어지는 순간 치밀어 오르는데, 그것이 터져 나오는 데 3초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분노를 유발한 대상은 멀리 있으니 그냥 옆에 있는 사람에게, 도와준다고 한마디라도 거드는 사람을 향해 터트리곤 했다. 그래놓고서는 ‘당신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에요’, ‘너한테 화가 난 게 아니야 “라고 뒤늦은 사과를 했다. 하지만 분노에 죄책감이 더해지고, 무력해지고 깊은 우울감이 찾아왔다. 몸도 마음도 세상도 모든 게 힘겨웠다.


”이것도 재난이잖아요. 화재는 인재지만, 재난은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니까.... “


작년 11월 중순에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을 때 의사가 말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애도 5단계가 떠올랐다. 죽음, 또는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부정-분노-타협(협상)-우울-수용의 5단계라고 한다.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상태를 대부분 겪는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재난도 비슷한 것 같다. 현실을 부정하고,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냐고 분노하고, 잘 수습될 것이라고 달래 보다가, 깊은 우울감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면 이제 수용할 차례인가?


그런데 말이다. 나는 윗집에 불이 나서 화가 난 것이 아니다. 내 분노는 화재 자체가 아니라, 화재에 의한 내 피해를 부정당하는 데서 시작됐다. 누군가 밀어서 넘어져 다쳤는데 일부러 민 건 아니라고, 네가 하필이면 거기 있던 게 잘못이라고, 이 정도는 다친 축에도 못 든다며 피해를 부정하니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러면 내 분노의 대상은 분명하다.


”작가님은 글쓰기 무기가 있어 부럽습니다. “


브런치의 구독자이기도 한, 명상 학교 동기가 남긴 댓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의 글쓰기가 무기라고 생각하는구나. 무기라고 표현을 한 데는 이 글이 사고에 대응하는 힘이 된다는 뜻일 것이다. 완전히 무장한 상대 앞에 뭐라도 무기 삼을 게 있으면 다행이지. 그것이 창도 칼도 아닌 샐러드용 포크라 할지라도 말이다.


글쓰기는 분명히 힘이 된다. 쓰는 동안 감정의 움직임 없이 몰두할 수 있고, 내 경험을 정리하여 남길 수 있고, 같은 피해를 겪는 이들과 정보를 나눌 수도 있다. 내가 긴 시간을 들여 알아차린 몇 가지 사실과 절차가 누군가의 빠르고 현명하고 강력한 대응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생산적인 글을 단 한 자도 쓰지 못하고 보내버린 시간에 대한 나름의 위로이며, 이 글의 첫 번째 목적임을 말해두고 싶다.


시간이 나면 브런치에 들어와서 몇 분이 읽었는지 보곤 한다. 그리고 반응을 보인 분들의 브런치를 찾아서 읽는다. 글을 잘 쓰는 사람도 많고, 몰랐던 이야기들도 많다. 그래서인가 나와는 구독자와 조회수에서 엄청 큰 차이가 난다. 그동안 SNS를 하지 않아서 구독, 좋아요, 댓글이 신기하기만 하다.


‘아니, 이분은 어떻게 구독자가 이리 많나? 독자들은 이런 글을 좋아하나 봐"


오래전, 인터넷매체나 유튜브 등이 없고 오직 4대 방송과 TV만 있을 때, 다큐 시청률도 30%를 넘고는 했다. 그러다 종편도 생기고 이것저것 볼거리가 늘어나면서 시청률은 점점 낮아졌다. 어느 날부터 한 자릿수가 나오더니, 급기야는 0.7% 이런 시청률이 나오기 시작했다.


”뭐야 샤프심이야? “


한 피디가 자조적으로 말했고, 그때부터 우리는 1%가 안 되는 시청률을 ‘샤프심 시청률’이라 불렀다. 지금 내 구독자와 조회수는 시청률에 빗대 말하자면 샤프심에 해당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기록을 남겨 공개할 수 있는 것이 나에게는 이미 위로가 된다. 문득 얼마 전에 들은 『금강경오가해』 해설 중, 중국 남송 도천선사의 유명한 선시가 생각난다.


나뭇가지에 높이 오르는 일은 기이한 일이 못 된다.

벼랑에 매달려 있을 때 손을 놓는 사람이 대장부다.

물이 시리고 밤공기가 싸늘하여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다면,

빈 배인 채로 달빛만 싣고 돌아오면 되는 거지.


이 선시를 해석할 때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도 달빛을 싣고 가면 된다’라고 하는 분도 있고, 혹은 ‘물고기가 됐든 달빛이 됐든 구분하지 말라 ‘고 알려주시는 분들도 있다.


나의 해석은 달빛부터 실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빈 배에 달빛을 실었다. 다만 물이 시리고 밤공기가 싸늘하여 잡히지 않는 물고기, 그 물고기를 실을 수 있을까. 그건 좀 기다려보기로 한다.


본 글은 개인의 경험을 정리한 기록입니다. 관련 서류와 자료(증빙)는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목적은 유사한 상황에 처한 분들이 빠르게 대응하는 데 참고가 되도록 경험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포함된 의학적, 과학적 내용은 개인의 경험과 참고 자료 및 제삼자의 의견을 종합한 개인적 판단이며, 전문적 검증이나 수치화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본 게시물은 고의적 비방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사실 관계의 오류가 발견될 경우 정정하겠습니다. 현재 이 사안은 금융감독원에 정식 접수되어 조정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접수번호: 202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