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는 복구하지 말고 일단 보존하라 1

[불난 집 아랫집의 간접피해 보상기] 14화

by 조서경

[본 글은 개인 경험 기록이며, 개인적 판단을 포함합니다. 상세 고지는 글 하단을 참고하세요.]


제목을 써놓고 보니, 나는 어쩌면 이 얘기를 쓰고 싶어서 브런치를 시작한 것 같다. 화재를 몰라서, 보험을 몰라서, 내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를 몰라서 놓쳐버린 일들. 그래서 나처럼 하지 말라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내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다.


내가 사는 집이고, 내가 쓰는 살림살이인데, 더러워지면 씻고 닦고 기름 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이건 평상시의 일이고, 피해자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아니다.


증거 확보가 우선. 성급한 복구는 증거를 훼손할 수 있다.

당시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안타깝고 안쓰럽다. 쳇바퀴를 돌리면 전기가 생산돼서 결국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실험실의 쥐처럼, 그 공간을 뱅뱅 돌며 증거를 없애고 다닌 것이다. 그래서 이번 편에서는 어떻게 피해를 보존하면 좋을지에 대한 생각을 적으려고 한다.


피해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다음의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


1. 현장은 전체 샷과 근접 샷을 촬영하고, 동영상으로 기록한다.

2. 오염이 의심되는 물품은 복구하지 말고, 사진을 찍은 후 비닐에 밀봉한다.

3. 세탁이나 청소는 증거 사진, 샘플을 확보한 후 진행한다.

4. 샘플은 라벨(날짜, 시간. 채취자)을 붙여서 보관한다.

5. 전문가 분석, 또는 법률 상담을 고려한다.

6. 이와 관련된 보험사와의 통화와 문서 기록은 보관한다.


나는 처음에는 증거를 보존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에어컨 필터를 씻어버렸고, 실리카겔 제습제를 폐기했고, 증거를 확보하지 않고 세탁했고, 옷에서 나온 분진을 보관하지 않았다. 만약 피해 증거를 잘 보관했다면 보험사와의 협상이 이렇게 난항을 겪지는 않았을 것 같다.



[주의] 이 글에 소개하는 일부 내용을 따라 하지 마십시오. 화재 유해물질을 가열하면 몸에 해로운 초미세먼지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샘플 채취 후 보관하고, 필요시 전문 기관에 의뢰하길 권합니다.



에어컨 필터

이것은 화재가 발생하고 3주 후인 9월 중순의 벽걸이 에어컨의 상태이다. 화재 후 3주 동안 계속해서 냉방, 제습, 공기 청정으로 가동했더니 시커먼 먼지가 잔뜩 붙어있다. 이때 사진을 한 장 찍었고 이후 다른 짐과 함께 집이 아닌 곳에 보관했다. 그리고 공사 후 입주하면서 에어컨 분해 청소를 하며 같이 세척했다. 나는 에어컨 필터가 따로 있고 저건 덮개인 줄 알았는데 이 에어컨은 필터가 따로 없다고 했다. 그렇게 사진만 한 장 남기고 좋은 증거가 사라졌다.


덮개든, 필터든 그 표면의 분진은 화재 흔적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실내에 분진이 있다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에어컨 필터에는 차곡차곡 쌓인다. 옷이나 책도 피해 증거가 될 수 있지만, 에어컨 필터는 이미 먼지가 모여 있어 채취하기도 쉽고, 다른 물질과 섞일 가능성도 낮다.


필터 분리 후 가능한 손대지 말고, 세척도 하지 말고 사진 촬영 후 그대로 밀봉 보관

세척했다면 언제, 누가, 어떻게 세척했는지 기록


화재 분진에 있는 유해물질은 대기 중에도 있고, 담배 연기에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집에서 담배 피우면서 분진을 모았다면 시빗거리가 될 수도 있다.



실리카겔 제습제

이것은 화재 사고 전에 사용하던 제습제다. 실리카겔을 넣는 스마트 의류 관리기를 옷장에 사용했는데, 실리카겔이 남아서 플라스틱 용기를 구입해 서랍장에도 넣었었다.


실리카겔은 처음에는 주황색인데, 습기를 먹으면 노랗게 변하기 시작해서, 점차 진한 녹색이 된다. 햇빛이나 드라이기, 전자레인지에 말리면 다시 주황색이 되고 재사용할 수 있다.


화재사고가 나고 열흘쯤 지난 9월 초순, 옷에서 꿉꿉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아채고 급히 탈취제와 제습제를 사서 보충했다. 그리고 며칠 후 이 실리카겔이 모두 진녹색으로 변한 것을 알았다. 화재 후 습도가 높아서 그런가 보다 하며 평상시와 같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다음 순간, 전자레인지에서 정말 독한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심한 구역질과 기침이 나서 한참 후까지 진정이 안 될 정도로 독했다. 각각 다른 서랍에서 나온 것을 몇 개 더 돌려보았는데 마찬가지였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다.


이 실리카겔에 대해서 **연구소에 분석힐 수 있는지 물은 적이 있다. 연구원은 습기를 흡수한 물질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일단 분쇄한 후 추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실리카겔의 구성 성분도 있기 때문에 몇 번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가열하여 수증기만 모으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과정이 복잡했다.


이 실리카겔은 비닐봉지에 담아서 끝까지 보관했었다. 그러다 내 개인보험에서 가재도구 전손 처리를 하기로 하고 옷을 폐기할 때 같이 사라졌다. 보험사에서는 내가 보험금을 받고도 그 옷을 활용할까 봐 모두 폐기하고 사진을 보내라고 했다. 간혹 보험금은 받고 피해 물품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폐기하려고 뒀다가 도둑맞았다고 거짓말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폐기물 업체에 다 폐기하라고 맡겨두고 사진만 찍었다. 그때 미리 실리카겔을 챙겨야 했는데 생각하지 못했다.


다행히 실리카겔을 전자레인지에 말리던 날, 대학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신문사에서 근무하다 얼마 전 국장급으로 퇴사한 후배인데, 앞으로 계획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 화재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 실리카겔의 냄새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후배는 '어머, 어머, 그 공기 어떡해'하며 안타까워했다. 고맙다. 후배야, 그날 전화해 줘서. 그 통화가 녹음돼 있어서 내용을 정리해 자료로 제출하기는 했다.


실리카겔은 제습기로는 파악할 수 없는 피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화재 피해를 입었거나, 공기의 질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할 일이 있으면 실리카겔을 비치해 보는 것은 해볼 만한 일이다. 실리카겔을 보관할 때는 비닐봉지에 넣고 공기를 최대한 빼고 여러 겹으로 밀봉하는 게 좋다고 한다. 다행히 보험 협상이 잘 진행된다면 사용할 일은 없을 것이다.


단, 나처럼 오염된 실리카겔을 집에서 직접 전자레인지에 돌려서는 안 된다. 나야 모르고 한 일이지만, 알고도 유독한 가스를 흡입할 필요는 없다. 매우, 아주, 대단히 독하고 위험하다. 확인은 안전한 장소에서, 안전장비를 갖추고, 가급적이면 전문가와 함께 할 것을 권한다.



숯검댕이

숯검댕이라는 말이 있다. ‘숯검정’의 방언이고, ‘숯에서 묻은 그을음’을 말한다. 나는 숯검댕이라는 말은 임시숙소로 나가 있던 9월 어느 날 새벽 1시에 들었다. 도배장판을 하기 전에 화재 청소를 하려고 업체를 알아보던 중이었다. 청소업자는 벽면의 분진을 제거하고 스팀으로 밀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숯검댕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숯검댕이가 없어요”


내가 말했다. 왜냐하면 어디서도 시커먼 분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소업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시멘트가 미세 다공질이다 보니 먼지를 포집하며, 세탁하면 옷에서도 까만 물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하얀 옷들 같은 경우에 그런 데 연기에 있으면 그냥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는데 물로 빨면 까만색 물이 나오거든요. 그게”


청소업자의 설명을 듣는 순간 퍼뜩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맞아요. 맞아요. 제 옷이 그랬어요.”


나는 너무 놀라서 말이 빨라졌다.


“그게 숯검댕이예요.”

“예 예. 맞아요. (중략) 제 옷을 빤다고 했는데 시커먼 물이 이렇게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 왜 이래 과탄산소다를 너무 많이 넣어서 이렇게 빠졌나 내가 이랬거든요. 그게 그게 숯검댕이구나”


2024년 9월 7일 옷에서 냄새가 난다는 것을 처음 알아채고, 겉옷은 내다 널고, 탈취제와 제습제를 보강하고, 속옷류는 다 꺼내서 빨았다. 다 삶아 빨아서 정리해 둔 옷을 다시 꺼내서 세탁한 것이다. 당시 세탁기 배수 기능에 문제가 있어서 탈수할 때 세탁기 아래쪽에 있는 잔수제거 밸브를 열어놓았다.


그런데 시커먼 물이 줄줄 나오는 것이다. 광부의 작업복도 아니고, 다 빨아서 넣어둔 옷에서 그렇게 시커먼 물이 나올 일이 없다. 배수 기능에 문제가 없었다면 그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물을 하수구로 다 흘려보내기는 했지만, 어쨌든 고맙다 세탁기야, 그때 배수 기능이 고장 나서.


만약 집에 화재 연기가 유입되었다면, 연기가 들어와서 냄새가 나는데 그을음이 보이지 않았다면, 그을음이 보이는데 의류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면 세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화재 연기가 옷에 흡착되었다면 시커먼 물이 배수될 가능성이 크다.


다음과 같은 순서라면 좋을 듯하다.


1. 전 과정은 동영상으로 촬영한다.

2. 세탁해서 넣어둔 옷 중에서 흰색 옷을 여러 벌 골라 세탁기에서 높은 온도로 돌린다.

3. 세탁기 배수 호스를 밖으로 꺼내서 배수되는 물의 색을 확인한다.

4. 배수되는 물은 채취하여 투명 용기에 밀봉, 보관한다.

5. 샘플에는 라벨지를 붙인다. (날짜, 시간, 채취자)

6. 샘플은 서늘한 곳에 보관하는 것이 좋으며, 필요할 때 전문 기관에 분석을 의뢰한다.

7. 이와 관련된 보험사와의 소통은 기록한다. (통화, 문자 기록 보관)



세탁 건조기로 ‘숯검댕이’ 확인하기

옷에 대해서는 제10화 ‘세탁 건조기의 신박한 쓰임새’에서 자세히 적었다.


화재 세탁해 온 겨울 패딩을 먼지라도 털어서 입어볼까 세탁 건조기에 넣고 '먼지 털기'를 했을 때 매캐한 냄새가 번져 나오고, 집진기에 새카만 분진이 모이는 것을 봤다. 까만 옷을 돌려도 까만 먼지, 흰 셔츠를 돌려도 까만 먼지, 베이지색 여름 바지를 돌려도 까만 먼지.


옷을 비롯하여 가재도구에서 매캐한 냄새가 나는데 보험사에는 아무 냄새가 안 난다고 하고, 그 매캐한 냄새의 원인이 유해 물질인 ‘다환방향족탄화수소(PAHs)’이 아닐까 불안한데 증명할 길이 없었을 때다.


그러다 우연히 세탁 건조기에 까만 먼지가 모이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밝고 연한 색 옷에서 까만 먼지가 모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옷에서 이 분진을 확인한 후에 피해 청구서를 쓸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했으니, 보험사에서 피해를 인정했을까. 아니, '건조기에 옷을 돌리면 원래 먼지가 모이지 않나, 더 입증을 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 먼지의 정체를 과학적으로 밝히라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옷의 분진을 모아 분석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분진을 모으는 일이 장난이 아니다. 건조기에 피해 본 옷을 돌리면 매캐한 먼지가 건조기 밖으로 빠져나와 온 집으로 퍼져버린다. 기껏 비싼 편백오일로 벽을 닦아서 청소한 집에 화재 분진이 다시 퍼진다는 의미였다. 그러면 이 옷을 다 들고 연구소로 가야 하나. 그렇게 하기 싫었다. '피해가 이렇게 확실한데 뭘 더하라는 건가' 반감도 생기고, 또 내가 최선의 노력을 해서 결론을 얻는다고 해도, 보험사는 또 다른 입증, 또 다른 입증을 요구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보험사에 직접 알아보는 게 어떠냐고 요청했다. 내 옷을 모두 제공할 테니 보험사 건물 어딘가에 밀폐된 공간을 마련해서 내 편도 아니고 네 편도 아닌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개적으로 한번 돌려보시면 어떻겠냐고. 그리고 한편으로는 금융감독원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문의했다. 그 후로 협상이 빠르게 진행됐고 가재도구의 전손이 인정되었다. 충분히 인정할 만한 피해를 두고 계속 입증하라는 압박을 했나, 의심이 들었다.


옷 전부를 보관하고 있으니 필요하면 언제든 분진은 모을 수 있어, 당시에는 분진을 모으지 않았다. 개인보험이 타결된 뒤에는 피해를 입증할 분진이 필요 없어서 옷을 다 폐기했다. 그래서 지금은 그 증거가 없다. 모든 것이 끝나야 끝나는 것인데, 생각이 좀 짧았다.


증거를 모아 두는 일은 번거롭고 감정적으로도 힘든 일이다. 하지만 나중에 보면 한 장의 사진. 한통의 문자. 한 개의 샘플이 큰 힘이 된다. 이때 주의할 것은 샘플의 확인과 채취는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안전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사마스크와 장갑을 끼고 눈과 피부를 드러내지 않은 상태로 접근하거나, 가급적이면 안전한 장소에서 전문가와 함께 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피해 보존 방법에 대한 글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두 편으로 나눠서 실어야겠다.

‘피해는 복구하지 말고 일단 보존하라 2’에서 계속...)



본 글은 개인의 경험을 정리한 기록입니다. 관련 서류와 자료(증빙)는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목적은 유사한 상황에 처한 분들이 빠르게 대응하는 데 참고가 되도록 경험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포함된 의학적, 과학적 내용은 개인의 경험과 참고 자료 및 제삼자의 의견을 종합한 개인적 판단이며, 전문적 검증이나 수치화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본 게시물은 고의적 비방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사실 관계의 오류가 발견될 경우 정정하겠습니다. 현재 이 사안은 금융감독원에 정식 접수되어 조정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접수번호: 202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