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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온 Sep 08. 2017

최저임금은 어떻게 합헌이 되었나?

그 비하인드 스토리

# 해고된 호텔 청소부


이야기는 한 호텔 청소부에서부터 시작된다.

워싱턴주의 Cascadian 호텔, 그곳에는 Elsie Parrish라는 이름의 여성이 객실 청소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Cascadian Hotel (좌), Elsie Parrish (우)


근무가 막 2년 차에 접어들려는 무렵, 그녀는 해고 통보를 받는다.


일주일 후 Parrish는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마지막 급료를 받기 위해 매니저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매니저에게 한 가지 요구를 한다.

요구의 내용은 아마도 매니저를 당황시켰을 것이다.



# 요구, 216.19 달러


내용인 즉, '216.19달러를 지금 바로 지급하라' 는 것이었다.


여태까지 호텔 측이 워싱턴주가 규정한 최저임금보다 낮은 급여를 주었으니

해당 차액을 받아야 하는 것이 그녀의 온당한 권리라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216.19달러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당시 Parrish의 시급이 25센트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녀가 865시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었으며,

이는 현재 구매력으로 환산 시 3,895달러로 한화 440만 원쯤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 호텔 측의 거절


호텔 측은 Parrish의 요구를 거절했다.

대신 17달러에 합의를 보자고 제안했다.

당연히 Parrish는 호텔 측의 제의를 거부했고, 그녀는 대신 소송을 건다.

피고는 Cascadian 호텔의 지주사였던 West Coast 호텔.


1935년 봄에 일어난 일이었다.



1심, 2심을 거쳐 최종심으로


처음 1심에서 주 법원은 호텔 측에 손을 들어줬다.

이에 Parrish는 항소를 제기했고, 사건은 주 대법원이 주관하는 2심으로 이어진다.


2심, 여기서 판결이 뒤집힌다.

호텔 측이 Parrish에게 해당 차액을 지불해야 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이는 워싱턴 주에서 1932년 통과된 노동자보호법인 '여성에 대한 최저임금제도'에 근거했다.


그러나 Parrish의 안도감도 잠시, 판결은 이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호텔 측이 상고를 올리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호텔 측은 승기(勝氣)를 확신했다.


최종심을 맡는 연방대법원이 매우 보수적인 성향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 연방대법원의 보수성향 - Lochner 시대의 시작


미국 연방대법원의 보수 성향은 그동안 30년이나 가까이 지속되어온 것이었다.

그 분기점은 1905년으로 여겨지는데, 당시 있었던 Lochner v. New York 사건 판결이 그 기원이다.


내용인  Lochner라는 제과점 사장이 휘하의 제빵사들을 초과 근무시켜서 벌금이 물리자

항소에 상소를 거듭해 뉴욕주의 법안을(제과점법, 1895) 두고 위헌 소지를 제기한 것이었다.


제빵사들의 노동시간에 상한선을 부여한 조치는 계약의 자유를 침해하는 공권력의 남용이며

수정헌법 제14조를 위반했다는 게 제과점 사장 측의 주장이었다.


수정헌법 제14조 제1절

"... 어떤 주에도 법의 적정 절차 없이 개인의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빼앗아서는 안 되며, 그 사법권 범위에서 개인에 대한 법의 동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한다."


공교롭게도 이 주장은 대법원 측에 받아들여지고 결국 뉴욕주의 제과점법은 폐기된다.

이후 각 주의 각종 근로 개입 법안들은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연방대법원은 동일한 기조를 유지하여

약 30년 동안 200개가 넘는 법률들을 계약의 자유가 침해된다는 이유로 무효 선언한다.

이 시기를 일컬어 탐욕스러운(?) 제과점 사장의 이름을 따 'Lochner 시대'라고 부른다.


Lochner 시대에서는 최저임금제도도 마찬가지였다.


각 주에서 시행하는 최저임금제도에 대해, 연방대법원은 줄곧 위헌으로 일관했다.

이미 1923년에 선례가 있었다(Adkins v. Children's Hospital).

여기서 연방대법원은 워싱턴 D.C. 에서 1918년 통과된 '여성과 아동에 대한 최저임금' 법안을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그리고 당장 Parrish의 판결이 상고로 올라간 시점에서,

뉴욕주의 최저임금법 또한 연방대법원으로부터 위헌으로 판결받는다(Morehead v. People of State of New York).


모든 것이 Parrish에게 불리했다.



# 미 연방대법원의 최종 판결 - Lochner 시대의 종언


햇수로만 2년이 지난 1937년 3월 29일,

드디어 연방대법원이 판결을 내린다.


'여성에 대한 최저임금제도는 합헌'


Parrish가 이겼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판결이었다.

합헌 5표, 위헌 4표, 단 한 표 차이.


이것은 Lochner 시대의 종언이자,

연방대법원이 보수에서 진보로 전환하게 되는 사법사의 분수령이었다.


그렇다면 왜 위헌이 아닌 합헌으로 판결이 났을까?
무엇이 연방대법원의 생각을 바꾸었는가?


이에 대한 답은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 표면적인 스토리


1. 판결문


가장 표면적인 답안이다.

판결문에는 합헌 표를 던진 대법관들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합헌 측 판결문은 연방대법원장이었던 Charles E. Hughes가 작성하였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사실 '계약의 자유'란 개념은 헌법에 명시된 바 없다. 계약의 자유는 적정 절차를 갖춘 공권력에 의해 제한이 가능하다.

(2) 고용주와 근로자가 모두 자유로운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계약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근로자들 중 특히 취약계층에 속하는 이들은 현실적·금전적 요인에 의해 크게 제약을 받는다.

(3) 공권력은 취약계층을 보호할 권한과 역할이 있으며, 여성에 대한 최저임금제도의 경우 적절한 조치에 해당된다.


Charles Evans Hughes (11대 연방대법원장)

Hughes 대법원장은 계약의 자유가 실체 하지 않음을 갈파했다.

그는 논리적인 접근에 있어 자유에 내재된 본질적인 한계점과 그 작동방식에 주목한다.

구체적인 논거는 다음과 같다.


절대적 자유는 존재하지 않음(헌법에도 언급 없음).

자유는 상대적 개념으로 시대에 따라 고유의 역사관과 사회상을 반영함.

자유가 발현되기 위해서 그것을 침해하는 해악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함.

지역 사회로부터 채택된 합리적이고 공익에 부합하는 규제를 통해 자유를 보호할 수 있음.


이를 통해 Hughes 대법원장은 계약의 자유가 갖는 의미를 매우 협소한 범위의 것으로 축소시킨 다음,

여기에 현실의 실상을 끌어들여 여성에 대한 최저임금제도의 당위성을 밝혔다.


여성의 복지는 공익과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음(출산과 육아).

여성은 노동시장에서 협상력이 상대적으로 낮아 고용주의 착취에 취약함.

착취구조는 개인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의 공익에 해를 끼침.

지역사회는 공익 차원에서 취약계층을(여성) 해악 요인으로부터 보호할 권한이 있으며 최근 전래 없는 경기침체에 의해 그 역할이 부각됨.


합헌이냐 위헌이냐 논점의 기준이 되는 것은 결국 수정헌법 제14조였다.

해당 조항 제1절은 한 가지 조건을 명시한다.


일정한 법률이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기 위해서는

적법 절차(due process)라는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위에서 최저임금제도의 기능과 법률의 적용을 받는 구성원들의 이해관계를 살펴본 바,

그 정당성을 확인하였고 Hughes 대법원장은 최저임금제도가 적정 절차에 부합한다고 결론지었다.


최저임금제도 합헌.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대법관들 다수가 합헌이라는 결론을 내린 데는,

워싱턴주의 최저임금제도가 특출 나게 정당성을 갖추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결정적인 계기는 대법관들이 기존의 관점을 저버린 것,

즉 '적법 절차'에 대한 아주 엄격한 잣대의 벽을 과감히 허물어버  있다.


실제로, Hughes 대법원장은 판결문 후미에서 과거 1923년의 Adkins 판례가 번복되어야 함을 밝혔다.



2. 경제


대공황의 여파는 엄청났다.


가령 연평균 가구소득의 경우,

1929년에서 1933년 사이 $2,300에서 $1,500로 추락한다.

35%p의 격차다.


실업률도 상당했다.

기존(1929년) 3.2% 수준에서, 불과 3년 만에 20%대 수준으로 치솟았으니

실업자만 30~40만 명, 그중 20만 명 이상은 노숙자였다.


실업 현상은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그 이유는 불황직격탄을 맞은 게 주로 공장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공장 노동자 대부분이 남성이었고, 여성은 대부분 교육, 간호, 가사, 가게 관련 직업군에 속했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에게 있어 결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빗발치는 해고통지서는 남편들을 꿰뚫고 수 천 수 만 개의 가정을 파탄 낸 다음,

다시 부메랑이 되어 그 부인들을 가격했다.

많은 수의 전업주부들이 취업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에 닥친 것이다.


어떻게든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다수의 여성들은 악조건을 감수해서라도 일했다.

제조업의 경우, 여성들은 주로 부가가치가 낮은 산업군의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캔 제조, 섬유, 제과, 육류가공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부가가치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남성과 여성의 임금 수준은 매우 불균형했다.

1937년 발표한 사회보장국 통계에 따르면 남녀 연평균 근로소득은

각각 $1027과 $525, 약 2배 정도의 격차가 났다.


그렇다면 근로시간이 차이가 났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여성의 평균 근로시간은 절반 이상이 주 50시간 이상,

각 주의 근로제한법에서 제시한 한계치에 근접했었다.


추가적으로 노동시장의 수급 불균형 때 두드러지는 고용주-고용인 사이의 갑을관계,

남성 근로자들은 그런 저임금을 받고 일할 의사가 없었다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면,

여성 근로계층을 둘러싼 착취구조의 존재는 명백했다.


서비스업의 경우 상황은 더욱 심각했는데,

흑인 여성들이 백인 여성들에 의해 기존 일자리를 빼앗기는 양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취약 계층의 증가와 이들을 둘러싼 착취구조의 문제는

정부로 하여금 적극적인 개입을 하게 만들었다.



3. 정치


1929년 대공황 발생 후 집권을 한 Roosevelt 대통령.

그는 야심 찬 계획을 추진한다. 그 유명한 뉴딜 정책.


그러나 뉴딜 정책은 연이은 연방대법원의 위헌 판결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노조, 농민, 광부들에 대한 지원, 최저임금 보장, 생산 및 가격 통제 등

관련 행정소송에서 정부가 잇달아 패소해 제동이 걸린 것이다.

실제로 1935~36년 사이에 무효화된 뉴딜 입법만 해도 13개에 이르렀다.


이에 Roosevelt 대통령은 연방대법원의 보수성향을 타파하고자

고심 끝에 결국 초강수를 꺼내 든다.


'연방대법원 개편 요구(일명 court packing)'

개편 내용은 추가 임명을 통한 재판관 구성의 고령화 타파였다.


결론적으로 이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삼권분립 원칙의 균형을 깨는 무리수로 여겨졌기 때문.


그러나 이 과정에서 형성되었던 여론은 사법부에 큰 압박으로 작용을 하여 국면 전환에 큰 기여를 했다,

라고 세간에 흔히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 비하인드 스토리


사실, Roosevelt 대통령의 압박용 카드는 판결의 판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연방대법원 개편 요구가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거론된 시점은 1937년 2월이었다.

Hughes의 훗날 회고에 따르면, 판결의 판도가 뒤집힌 시점은 그 보다도 두 달 전인 1936년 12월이었다.


이 때면 아무도 연방대법원 개편 요구에 대해 모를 시기다.

연방대법원 개편 요구는 Roosevelt 대통령과 그 참모들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아이디어였을 뿐,

세상의 빛을 아직 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왜? 하필 1936년 12월 그 달에! 전세가 극적으로 역전될 수 있었을까?


정답은 1936년 11월 3일에 있다.

이 날은 미국의 서른여덟 번째 대통령 선거날이었다.

이 대선에서 Roosevelt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한다.


주목할 점은 Roosevelt 대통령의 지지율이었다.

60.8%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지지율이었다.

바로 이 대선 결과가 전세 역전의 뇌관으로 작용했다.


최저임금제도는 줄곧 위헌 판결을 받았다고 했다.

1930년 Hughes가 11대 연방대법원장에 취임한 이래, 계속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내막을 살펴보면 결코 간단한 판결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법관들의 의견 구도가 팽팽했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Morehead 판결,

그러니까 Parrish의 판결 불과 일 년 전에 있었던 뉴욕주의 최저임금제도 위헌 판결도

위헌 5명, 합헌 4명에 의한 단 한 명 차이의 다수결 판결이었다.


물론 Hughes 대법원장은 이때에도 소수의견 쪽이었다.

이런 팽팽한 구도 속에서, 대선 결과가 Roosevelt 대통령의 압승으로 발표되자

Hughes 대법원장은 승부수를 띄운다.


기존에 중도성향이었던 대법관 Owen J. Roberts를 설득하기로 나선 것이다.


설득의 요지는 이번 대선을 통해 뉴딜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대폭적인 지지가 확인되었으니,

국민을 위한 정부의 청사진이 실현될 수 있도록 동조해달라는 내용이었다.



Owen J. Roberts (연방 대법원 대법관)


Roberts 대법관은 고민했다.

한 달 동안.

그리고 그 해의 끝무렵 그는 결심을 한다.

위헌·합헌 5:4 구도가 4:5로 역전되는 순간이었다.


9명의 연방대법관들. 이들 중 다음 5명이 합헌 판결을 내렸다: Hughes, Brandeis, Stone, Roberts, Cardozo.


이로써 최저임금제도가 미국에서 합헌으로 판시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개인 간 체결되는 계약의 자유가 정부에 의해 침해되어도 되는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서,


“스스로 구제할 능력이 없는 이들을 정부가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가능하다”

라는 답변으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이는 최저임금제도의 본질을 다루는 근 백 년 전의 문답이면서도,

오늘날 우리에게

“정부가(또는 국민이) 취약계층과 착취구조를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지?”

묻는 유효한 질문이다.



# 개인적인 생각들


판결이 이루어지기까지 일련의 과정복기해볼 때, 필자 개인적으로 들었던 몇 가지 생각이 있어 이에 대해 풀어보고자 한다.


1. 노년의 용기


첫째, '노년의 용기'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보았다.

흔히 용기라고 하면 젊은이들의 전유물로 인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판시 과정 중 정치적 배경을 다룬 에피소드를 볼 때,

Hughes 대법원장과 Roberts 대법관이 보인 행동들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은

용기가 아닐까 싶다.


먼저 Hughes 대법원장의 경우,

국가기관의 수장으로서 가졌을 무거운 부담감을 신념 하나로 정면 돌파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최저임금제도에 대한 그의 신념이라면

Parrish의 판결 직전에 있었던 Morehead 판결에서 잘 드러나 있다.


그는 판결문의 소수의견을 작성했는데, 그 내용이 다수의견에 버금갈 정도로 길고 치밀했다.

Roosevelt 대통령 당선 직후 한 달여 기간 동안

그가 Roberts 대법관을 얼마나 열심히 설득했을지 상상된다.


결국 이 75세의 대법원장은 설득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고집불통 늙은이들을 갈아치워야 한다!'라는 식의 행정부의 공격으로부터

사법부를 훌륭하게 지켜냈다.


Roberts 대법관.

필자는 그의 용기를 더 높이 평가한다.

그가 감수했던 리스크는 Hughes 대법원장의 것보다 더 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Hughes 대법원장은 잃을 게 그리 많지 않은 입장이었다.

그를 둘러싼 세간에는 시스템의 관성이라는 보편적인 명분이 존재했다.


반면 Roberts 대법관의 경우는 좀 달랐다.

그는 법관으로서 명예가 실추되는 위험을 온전히 떠안아야 했다.


기존에 중도적 성향을 유지했다고는 하나, 어쨌든 이전 판결에서 그는 위헌 입장이었다.

판정 번복은 법관 스스로의 법리적 일관성을 깨뜨리는 일이고,

흔한 일도 아니거니와 비판의 소지를 제공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러나 이 62세의 대법관은 과감히 조타기를 돌렸다.

자신의 안위와 기존의 법리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현실을 직시하고자 했다.


그의 전향은 비판을 받았을까?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

비판은커녕 당시 언론에서 그는 시의적절한 판단으로 찬사를 받았다

(Switch in time that saved the nine, 원래는 switch가 아닌 stitch로, 첫 단추를 잘 꿰다 라는 의미를 가진 미국 속담의 언어유희적 변형이다)


훗날 역사에서도, 그의 이름을 딴 교육구까지 존재할만큼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로 그는 기억되고 있다.


초고령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는 우리나라 현실을 생각할 때,

두 노법관이 보여준 용단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2. 통찰력


둘째,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는 통찰력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통찰력이란 현상을 파악함에 있어 그것을 아우르는 전후 맥락,

즉 현상의 기저에 존재하는 인과관계 또는 상관관계를 정확히 식별해내는 능력을 말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 이는 법관에게 더욱 요구되는 자질임이 틀림없다.

법관은 법과 현실 두 가지 모두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법률 체계는 입법자들마저도 구체화를 포기해버린 추상적 개념과 언명들로 이루어져 있다.

현실 세계의 경우, 그 복잡성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는 수준의 것이다.


법관이 마주하는 난해한 대상들 그리고 이 가운데서 판시를 해야 하는 어려움을 살펴볼 때,

이러한 작업은 필자에게

'기표는 기의에 닿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진다.'라는 라캉의 유명한 표현을 떠오르게 한다.


언어의 형식을 빌린 법률과

인간의 무의식처럼 복잡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사회 현실을

상호 대입하는 과정에서,

법관은 미끄러 떨어지는 괴리들을 관찰하면서도

결국 본인의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려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03조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Parrish 사건 중 판결문을 다룬 에피소드를 볼 때

Hughes 대법원장의 판결은 통찰력에 관해 훌륭한 교훈을 준다.


가장 본질적인 수준에서부터 사고하는 것이 통찰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자유에 대한 견해를 전개한 대목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결론에 도달하기에 앞서 자유의 정의, 기능, 한계 등을 두루 다룬다.


자유에 대해 본인의 의견을 별다른 인용 없이도 당당히 밝힐 수 있는 법관이 몇이나 될까?


양심의 깊이는

인간을 구성하는 근원적인 이념(자유, 평등, 정의, 박애 등)에 대한 이해의 폭과 비례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3. 국민들의 역할


셋째, 사법 체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최저임금제도 합헌이라는 일대의 사건도,

그 시발점은 Parrish라는 한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알고 끝까지 주장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 법은 생활의 테두리를 규정하는 형식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법률이야말로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교양이라 할 수 있다.


관련해서,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시청하게 된 TV 프로그램(비정상회담, 163화) 속

어느 독일인 출연자의 발언이 떠오른다.


자국 베스트셀러 도서 순위 중

1위가 민법, 2위 상법, 4위 주요 세법 조항, 7위 노동법 법전이라는 내용이었다.


덧붙여 독일에서는 성인식을 기념하여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선물이

다름 아닌 법전이라고 소개했다.


반면 우리나라 국민의 법률적 지식수준은 체감상 높지 않은 듯하다.

대학 기관의 법학 교육은 철저히 법률 직업인 양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문제는 고등학교인데,

사실상 의무교육과정이나 다름없는 우리나라 고등학교의 교과목에서,

법 관련 과목은(법과 정치) 사회과 탐구과목군 중 선택 사항일 뿐이다.


여기에 필자는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


국사는 필수과목이면서 법은 왜 필수과목이 아닌가?

역사가 과거를 지배하는 지식체계라면,

법이야말로 현재를 지배하는 지식체계인데 말이다.


초등교육 6년, 중등교육 6년을 모두 수료하여 성인이 된 이가

간단한 소장 작성이나 세무 절차조차 제대로 모른다면

문제가 있어도 제대로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절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결국 국민이 주도해야 한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적어도 침묵하지 않고 목소리 정도는 낼 줄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권리에 대한 이해, 나아가 사법체계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이해가 요구된다.


근래 우리나라 사법부가 참 시끄럽다.

여기에는 다양한 시각들이 존재한다.


어느 보수 언론사의 한 사설에서,

판사들의 단체 요구를 두고 판사 노조가 생긴 것 아니냐며 한심한 일이라는 비난 글을 읽은 적도 있다.


무릇 우리나라 사법체제의 역사,

사법부가 독재정권에 의해 얼마나 유린되었는지 잘 알고 있는 국민이라면,

소장 판사들의 단체 행동을 절대로 가볍게 치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판사들의 양심에 의해 국운이 갈리는 것을

우리는 여러 역사적 장면들을 통해 지켜보았다.


양심 있는 법관들을 응원한다.

그리고 사법부 개혁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참고 링크 및 문헌


1. https://www.dollartimes.com/inflation/inflation.php?amount=1&year=1935
2. https://supreme.justia.com/cases/federal/us/300/379/case.html

3. https://www.pbs.org/wnet/supremecourt/capitalism/landmark_westcoast.html

4. http://www.dailylocal.com/article/20120524/LIFE01/120529817/history-s-people-owen-j-roberts-a-man-of-justice&pager=full_story

5. 미국 헌법과 인권의 역사, 장호순 저

6. 실체적 적법절차 원리의 헌법적 기능, 이종근, 2015

7. 미국헌법상 적법절차 법리와 전개에 관한 연구, 유승하, 2004

8. 권력·정의·판사, 양삼승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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