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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온 Sep 25. 2018

장교의 책무

군에서 얻은 4가지 비유, 그 마지막

군에서 얻은 4가지 비유, 그 마지막

# 깨달음에 관하여


깨달음에 관하여 강렬한 경험 하나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테다. 깨달음은 마치 육즙이 풍부한 과일을 베어 먹는 것과 같아서, 감정에 즐거움을 선사하고 생각의 뿌리가 한 층 깊어졌음을 확인시켜준다.


우리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특정 공간을 의도적으로 찾기도 한다. 여행자의 신분으로 밟는 낯선 이국 땅을,

고매함이 묻어나는 학자의 강연장을, 영감 깃든 작품들이 수두룩한 전시관을 찾는다. 서점에서 신중히 집어 든 책의 어느 문단 속 얇은 행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분주한 발걸음과는 상관없이, 깨달음은 대개 불현듯 찾아온다. 앎의 순간, 찰나의 번뜩거림에는 어떠한 예고도 기 때문이다. 보리수 밑에 석가모니, 목욕탕의 아르키메데스, 침대 위에 케쿨레, 길거리에 마쓰시타 고노스케, 슈퍼마켓에 오노 다이치가 그랬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니었다. 드넓은 바다와 거선, 백 명이 넘는 인부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 지적 항해사들의 위대한 발견은 평범한 일상 가운데 이루어졌다. 일상으로의 조용한 침투랄까.


다만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고대했던 손님이 두드렸던 문 뒤의 풍경은, 어떠한 노도보다도 치열했으리라.


이렇게 보면 결국 깨달음은 고민을 하는 자의 특권이다. 특권이라는 표현은 경우에 따라서 거창하게 들릴 수 있다. 고민에도 다양한 주제가 있고 각각의 깨달음마다 그 무게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 글은 필자가 한 동안 떠안았던 고민을 다룬다. 물론 위에 언급된 위인들의 것과는 당연히 비할 바가 못된다. 그래도 필자에게는 나름 무게감 있는 주제였다. 필자의 고민은 다음과 같았다.


리더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이는 군 복무 기간 28개월, 후보생 기간 24개월, 총 52개월을 하나로 관통한 고민거리였다. 고민의 영역은 기술적 명제가 아닌 규범적 명제다. 바람직한 리더가 되고 싶던 개인적 열망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개인의 바램과 고민, 장교의 책무,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깨달음을 담았다.



# 장교의 책무


'리더'의 당위성에 대한 규명.

사실 여기에는 장교로서 정석적인 답변이 있다. 바로 장교의 책무다.


장교의 책무
 
장교는 군대의 기간이다.
그러므로 장교는 그 책임의 중대함을 자각하여
직무수행에 필요한 전문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건전한 인격의 도야와 심신의 수련에 힘쓸 것이며
처사를 공명정대히 하고 법규를 준수하며
솔선수범함으로써 부하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아
역경에 처하여서도 올바른 판단과 조치를 할 수 있는
통찰력과 권위를 갖추어야 한다
 
- 부대관리훈령  제2장 1절 16조 2항


필자가 갓 전입했을 때 다른 부대 동기로부터 들은 얘기다. 대뜸 장교의 책무를 다 외워보라고 대대장이 시켰단다. 근데 우물쭈물해버렸다고. 그래서 엄청 혼났다고.


그 얘기를 듣자마자 부랴부랴 외웠던 기억이 있다. 당시 필자도 마찬가지 수준이었다. 첫 문장 외에는 완벽히 외우지 못했는데, 이후 토씨 하나 안 틀리려고 정말 열심히 외웠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상관이나 선배가 그렇게 시키는 경우는 없었다)


외우면 외울수록 장교의 책무에 나와있는 내용이 갈수록 공감 갔다. 그만큼 어렵고. 그리고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리더십의 모든 것을 압축된 정수의 문장들이라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출근해서 한 번, 멘탈이 흔들릴 때마다, 전역 때까지. 거의 중세시대 수도사가 주기도문 외우듯 입으로 내뱉으며 중얼거렸으니, 그때를 되돌아보면 거의 강박이라는 표현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현에도, 비록 전역을 했지만, 기계적으로 외워질 만큼 각인이 되어있다.



# 책임에 대하여


장교의 책무를 나름대로 요약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장교의 책무는 다섯 가지의 방법론을 나열하고

   1. 책임 인식

   2. 전문성 배양

   3. 자기계발

   4. 윤리의식 고취

   5. 솔선수범


두 가지 갖추어야 하는 자질

   1. 통찰력

   2. 권위


한 가지 역할을 제시한다.

   1. 마찰 극복(문제 해결)


앞의 다섯 가지 방법론들은 사실 너무나도 일반론적이다.

리더십을 다루는 여느 서적이나 경영 교과서에 나와있는 법한 내용이다.


그러나 장교의 책무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특이하게 여기게 된 점이 있다.

리더의 당위에 대한 다섯 가지 방법론 중 첫 번째로 언급된 부분, ‘책임 인식’이다.


장교로 복무하며 군에서 얻었던 마지막 교훈의 주제로, 이 '책임'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 책임 인식 vs 책임감


‘리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일까?

흔히 '책임감'이라고 곧잘 답한다.


그렇다면 장교의 책무도 책임감을 언급했을까?


아니, 장교의 책무에는 책임감에 대한 언급이 없다.

대신 장교의 책무는 책임감(感)-느낌이 아닌 책임에 대한 인식(認識)-앎을 제시한다.


물론, '장교직은 정말 중요해!'라는 발상은 장교라면 누구든 가져야 할 마음가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고가 이 수준에서 멈춰 버린다면, 이는 단순한 느낌의 기술에 불과하다.

 

# 감성이 아닌 이성으로써의 책임


실제로 많은 이들의 사고가 이 수준(단순히 책임감-느낌에서 끝나는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여겨진다.


필자는 군 복무 때, 리더 포지션에 있음에도 책임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감정을 구분하지 못한 리더들을 많이 보았다. 왜일까? 그들에게 책임에 대한 정의가 본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비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해야 할 과업과 임무가 본인이 감당해야 할 리스크로 부각될 때, 책임은 곧 감정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책임이 감정의 대상이 될 때, 그것은 대개 부담감으로 귀결된다.


책임에 대한 부담감은 리더십을 발휘하는데 촉매제로 활용될 수는 있겠으나, 리더십의 동력은 결코 못된다. 부담감은 책임의 본질과 거리가 먼 파생물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부담감에서 나오는 책임은 구성원들에게 설득력이 떨어진다.


장교의 책무를 그대로 인용하자면, "책임의 중대함을 자각"이라고 했다. 스스로 자(自)에 깨우칠 각(覺), 이것은 명백히 이성의 활동 영역이다. 책임에는 사심이 개입되선 안된다. 리더십의 출발점은 감성이 아닌 이성에 있다.


장교의 책무는 책임에 관하여, 단순한 느낌의 기술이 아닌, 더 깊은 수준의 사고를 요구한다.



# 책임을 인식하는 두 가지 축


그렇다면 책임에 대한 인식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맥락적 사고가 필요하다. 책임은 ① 조직 수준과 ② 시간이라는 두 축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① 조직 수준 - 수직 축

 

책임, 그 테두리를 결정짓는 것은 오로지 상위 목표와의 유기성이다.


소대장이 본인 소대에 부여된 임무의 중요성을 온전히 자각하려면 반드시 중대의 임무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소대는 결국 중대가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동원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중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대, 대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대, 연대 위에 사단, 사단 위에 군단을 이해해야 한다. 소대장이 군단의 작전계획을 다 알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제대의 상하를 꿰뚫는 핵심 의도는 필히 숙지해야 한다.


상급부대의 의도를 바탕으로 부대가 전개될 때 본인 소대가 어디에 위치하는지 아는 것, 그 의도가 각 제대 별로 요구조건을 부여할 때 본인 소대는 전체에서 어느 연결고리를 담당하는지 아는 것은, 모든 의사결정의 기초가 된다.

 

만약 소대장이, ‘나는 일개 소대장일 뿐이야’ 하고 스스로를 한정시켜 버린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오히려 무지에서 비롯되는 교만에 가깝다. 임무의 맥락을 읽지 못하는 것은 이하 제대를 의도로부터 고립시키는 처사이고, 결국 조직력을 헤친다.


② 시간 - 수평 축


임무는 결코 단발적인 개념이 아니다. 현재 임무는 결국 차후 임무 달성을 위한 하나의 수단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차후 임무는 항상 상급제대의 의도와 관련 있다. 즉, 상급부대의 의도를 명확히 숙지하고 있을수록, 하위 부대는 Next Step이 무엇인가를 예측할 수 있다.


책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예측성을 제공하기 때문에, 행동의 원천으로 작용하며 공리적으로도 유의미하다. 책임에 대한 인식은, 막연한 책임감처럼 결코 허공에 울려 퍼지는 메아리나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다.


 

# 책임 = 조직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단위


현행 임무는 끊임없이 바뀐다. 그러나 현행 임무가 상급 제대의 의도에 따라 계속해서 갱신되는 가운데,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공통의 요구조건이 관찰되는데, 이것들의 집합이 곧 책임이다.

 

따라서 책임은 정적인 성질을 갖는다. 현시점에서 텍스트화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상하 조직 상호 간 기능적으로 연결시키는 접점이기도 하다.

상급자와 하급자 각각의 책임에 대한 기술은 하나의 기능적 논리를 구성한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하여, 책임은 조직에서 주요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된다.



# 리더와 책임


리더는 모든 조직 구성원들에게 책임을 명시하고 공언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리더는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팔로워들의 책임이 무엇이고

각기 어떻게 표현되는지 정교하게 설파할 수 있어야 한다.


20대 초중반, 대한민국 육군 장교를 꿈꾸던 장교 후보생이었던 나는

마음 한 켠에 늘 다음과 같은 질문을 품었었다.

리더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20대 후반, 후보생 2년과 장교 생활 2년 4개월을 마치고 전역을 한 나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갖게 되었다.


리더란 '책임'을 관리하는 책임이 있는 존재다


19대 미 합동참모의장이 었던 Joseph F. Dunford, Jr.의 발언을 인용하여 본편을 마무리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명확한 의사소통입니다. 결정권을 지닌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이 내린 지시가 일선에 있는 해군 일병이나 육군 상병에게 명확히 전달되어야 합니다. 일선의 군인들은 주어진 특정 임무만 수행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더 큰 목표를 이해해야 하죠.”
- 19대 미 합동참모의장 Joseph F. Dunford, J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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