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그림을 자유롭게 시작하지 못한 게 마음에 내내 걸린다. 입시미술을 잘하는 학원에서 시작했고, 나는 나름 스파르타 선생님들이 원하는 수채화 방식을 잘 답습해서 그림대회에서 1등을 해서 상금을 받기도 하고, 다른 대회나 학교에서도 엔간한 그림 그리기 대회에서는 2등 안에는 드는 기술을 습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였다. 정확히 말하면, (선생님의 붓터치를 잘 따라서) 그리는 아이였지만.
그림 그리기 실력은 학원을 다니지 않고, 선생님과 만나지 않게 되면서 지지부진했다. 그리고 학원도 중학생이 되어서는 이제 공부를 해야 한다며 더 이상 다니지 않게 되었다. 늘 비슷한 색조, 비슷한 패턴, 비슷한 스케치. 그런 그림을 나는 10년간은 우려먹은 것 같다. 그렇게 나의 그림 그리기는 사명을 다했다.
10살 때 같이 맨날 보던 친구 Y의 소식을 스무 살이 넘어서 전해 들었다. Y의 가족과 우리 가족은 자주 교류를 해서 아직도 부모님들끼리는 친하게 지내서 내가 시작한 거면 뭐든 Y도 따라서 했다. 내가 머리 염색을 하면 Y도 어느새 똑같은 색으로 염색을 하고, 그림을 시작하면 그림을, 발레를 시작하면 발레를 따라 시작했다. 그땐 다 그랬으니까. 그런데 Y의 소식은 뜻밖이었다. Y가 미대를 갔다는 소식이었다. 사실 나는 무척 놀랐다. 그때 분명 Y는 두각을 보이지 않았고, 나도 그 어린 나이였지만, 내가 그림을 더 잘 그린다고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 Y는 그림을 그리고 치유미술 쪽으로 직업을 삼고 있고, 나는 그림과 문외한이 되었고 낙서조차 못생기게 그리는 사람이 되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사실 어떠한 것도 잘못된 건 없었던 거 같다. 자신의 장래는 결국 자신이 만드는 것이니까. 어릴 때의 특기가 늘 꿈과 직결되지는 않으니까. 내가 잘하는 줄은 알았지만, 나는 화가를 진지하게 꿈꿔본 적은 없으니깐. 그래도 씁쓸한 것은 나는 어른들의 그림을 따라 그릴 줄은 알았지만, 꿈의 그림을 그릴 줄은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로운 그림, 나를 표현하는 그림, 세상에 있지도 않은 것들을 그리면 혼나는 줄 알았다.
예전에 류승범이 자신의 아내분에 대한 일화를 꺼내면서 이런 말을 했다. 아내분이 화가를 직업을 삼고 계신데, 아내분께 그림을 왜 그리냐는 질문에 "어린아이들은 다 그림을 그려. 자기표현을 그림으로 하는 거야. 근데 너는 멈췄고 나는 멈추지 않았을 뿐이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나의 자기표현이 멈춘 건 기정사실화지만, 그림으로 자기표현을 잘 못해봤다는 그런 갈증이 느껴졌다. 그래서 올해 목표가 그림시작하기다. 뭐라도 그려보고 싶다. 그런데 한 번도 그려보지 않은 도구로. 그래서 나는 유화를 선택했다. 나는 수채화만 죽어라 팠어야 하는 과거가 어쩐지 불쌍하게 느껴진다. 도구들은 하나씩 모으고 있는데 아직 뭐 하나 제대로 시작하진 않았지만, 끊겨버린 자기표현은 계속해봐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한다.